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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립나 Oct 16. 2021

사랑은 스스로를 해친다

부작용이 심한 약처럼



한동안 인터넷에서 사용되던 말 중에 '사랑은 자해다.'라는 말이 있다. 처음에 그 문장을 목격했을 때 과격한 단어가 너무 자극적이라 나도 모르게 조금 꺼려졌다. 하지만 그 문장을 알고부터 그동안 내가 겪었던 고통과 괴로움의 본질을 깨닫게 된 건 사실이었다.


'자해'라는 단어가 구체적으로 명시하는 내용보다 스스로 해친다는 뜻에 집중해보자면 정말 사랑은 스스로를 해친다. 그렇다고 내가 사랑을 비관적이거나 냉소적으로 생각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나는 타고나게 사랑이 많아서 쉽게 괴로운 사람이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건 연인 사이의 사랑이나, 사람 간의 사랑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 모든 것에 가지는 애정에 대한 이야기다. 




난 늘 너무 사랑해서 괴로웠고 흔들렸다. 그동안 날 고통스럽게 만들었던 것들은 모두 내가 열렬히 사랑했던 것이었다. 이 말에는 약간의 오류가 있는데, 사실 그것들이 날 고통스럽게 '만든'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가만히 있었는데 나 스스로 괴로워한 것이기 때문에 결국 내가 나를 괴롭게 만든 것이다. 나는 언제나 사랑하는 대상에게 바라는 것이 있었고 그건 결코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어렸을 때는 내가 너무 좋아하는 친구의 가장 친한 친구가 내가 아니라서 속상했고, 내가 동경하는 모습대로 내가 자라지 않아서 슬펐다. 내가 좋아하고 꿈꾸는 일에 아무리 노력해도 닿지 않을 때 좌절했고,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의 말 한마디에 온 하루가 다 구겨졌다가 펴졌다. 나는 나를 사랑했지만 그것도 날 아프게 했다. 내 방에서 온전히 나로 있을 때 애지중지하고 아끼던 나를, 밖에서 다른 사람들을 만날 때면 쉽게 까내리고 거친 곳에 구르게 했다. 그런 밤이면 나는 내가 너무 원망스럽고 또 애처로웠다. 


어쨌거나 사랑에는 의무가 없었다. 그 어떤 대상도 나에게 조건적인 사랑을 요구하지 않았다. 내가 영원히 변하지 않고 네 곁에 있을게, 그러니까 날 사랑해줘. 이런 공평한 약속은 없었다. 그냥 그대로 존재하는 것들을 내 마음대로 사랑했고, 가끔은 불공정 거래처럼 뻔뻔하게 유혹하는 것을 다 알면서도 사랑했다. 그들이 속였다기에는 내가 다 알면서 열심히 속았다. 그래서 나는 내가 너무 바보 같았고 괴로웠다. 이 모든 건 사랑하지 않으면 끝날 텐데 난 도저히 사랑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사람처럼 굴었다. 그건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사랑하지 않는 게 힘들어서 그냥 고통을 참아내기로 했다. 나중에 결국 맞닥뜨릴 고통을 알지만 그건 그때의 나에게 맡기고 나는 눈앞의 대상을 온 마음 다해 사랑하기로 했다. 후회는 없었지만 그렇게 쉽게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자!' 할 정도의 고통도 아니었다. 힘껏 달려간 만큼 부딪힐 때 더 산산이 부서졌다.


태어나서 가장 큰 사랑을 쏟았던 우리 강아지가 하늘나라에 갔을 때 나는 내 안의 세상이 재설정되는 것 같았다. 그동안 많은 이별과 상처가 있었지만 이것과 비할 수는 없구나. 세상에는 이렇게까지 큰 상실이 있구나.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을 어쩔 수 없이 삼켜내면서 나는 너무 두려웠다. 이 고통을 알게 된 이상 같은 이별을 다시 겪을 자신이 없었다. 


사랑은 반작용이 심했다. 사랑하는 마음이 클수록 그 고통도 커졌다. 사람들이 왜 무관심이 가장 무서운 거라고 하는지 실감했다. 무관심하면 약점도 없다. 무관심한 대상은 나에게 상처 낼 수 없기 때문에 난 무적이 된다. 그래서 난 내가 사랑하는 것들이 무서웠다. 난 그 앞에 너무 연약했고 그것들은 언제든지 나를 상처낼 수 있었다.


그래서 난 조심하면서 사랑해보려고 했다. 기대하지 않고, 바라지 않으려고 애썼다. 혹시 그래도 참아지지 않아서 기대가 강요가 되고 애정이 집착이 될 것 같으면 그곳에서 도망치기로 했다. 사랑하는 대상을 상처 내고 싶지도 않았고 내가 추해지고 싶지도 않았다. 그냥 내가 사랑했던 순간이 좋은 기억으로 얌전히 남기라도 바랐다. 하지만 도망치려는 내 발바닥에서, 가장 무섭다는 '정'과 미련이 끈적하게 늘어졌다. 지금의 고통만 참아내면 다시 전처럼 행복한 사랑이 남을 거라고 자꾸 내 발목에 휘감겼다. 그렇게 난 바닥에 묶인 채 소중하게 간직하고 싶었던 추억에 금이 가는 걸 지켜봐야만 했다.





결국 나는 그저 받아들이기로 했다. 사랑은 부작용이 심한 약 같았다. 그래도 확실한 건, 그 효과가 더 크다는 것이다. 사랑하면서 행복하고 빛났던 순간이, 그리고 사랑이 만든 추억이 내가 살아온 날들을 채웠다. 친구에게 애틋한 마음을 느껴봤기 때문에 친한 친구가 생겼을 때 그 존재가 얼마나 고맙고 든든한지 알았고, 동경하는 대상을 따라 노력하면서 나만의 방식으로 성장했다. 좋아하는 일을 꿈꿀 때 가진 희망이 삶에 원동력이 되었으며, 사랑하는 사람과 마주 웃었던 순간이 가장 찬란했다. 내가 거친 곳에 구르고 있을 때 나의 손을 잡아 일으킨 것도 나였다. 그리고 나는 시간을 돌려 과거로 돌아간다고 해도 다시 우리 강아지의 언니가 될 것이다. 우리 강아지가 내 곁에 평생 있어주길 바랐지만, 그러지 못한다는 걸 알아도 난 우리 강아지를 당연히 또 사랑할 것이다.


난 여전히 무섭고 겁이 난다. 하지만 직접 부딪히고 다쳐가며 몸 사리는 법을 조금이나마 배웠으니 전처럼 준비도 없이 넘어질 일은 드물 것이다. 사랑은 스스로를 해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하는 이유가 분명히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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