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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마나 Sep 11. 2020

24화. 맨하탄노래방에서

 “왜 아직 안 가고 있어?”

 자리에서 일어나 짐을 챙기던 김 실장이 고보영과 나를 번갈아 바라보며 새초롬한 얼굴로 물었다. 편집장은 저녁 약속이 있다며 양복을 빼입고 일찌감치 사무실을 나선 뒤였다. 

 “내일 할 일 좀 미리 정리하느라…”

 내가 말끝을 흐리자 김 실장이 이번에는 고보영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고보영은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답했다. 

 “집에 일찍 들어가기 싫어서요.”

 김 실장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몇 번 끄덕이다가 굳이 내 자리쪽으로 돌아나가며 내 어깨를 가볍게 툭툭 쳤다. 내가 그녀를 돌아보자 김 실장은 영문을 알 수 없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이더니짧게 우리 둘에게 인사를 건네고 사무실을 나섰다. 

 아주 오랜만에 늦은 시간에 고보영과 둘이서만 사무실에 남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이 대리야..”

 사무실에는 아무도 없건만 고보영은 괜히 목소리를 낮추어 나를 불렀다. 나 역시 우리를 지켜보는 이 하나없는 사무실을 한번 휘 둘러보고는 고보영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그녀가 손가락으로 바깥을 가리켰고 그 신호에 맞추어 우리는 서둘러 뒷정리를 한 뒤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고보영이 말없이 정류장에 섰고, 나도 말없이 그 곁에 섰다. 

 “그냥 저기 김밥집에서 저녁으로 김밥이나 먹고 갈래? 시내에서 저녁 같이 먹고 있으면 데이트하는 것 같잖아.”

 고보영이 곁에 선 나를 향해 별안간 몸을 홱 돌리며 말했다. ‘데이트하는 것 같아 보이면 좀 어때서, 우리만 아니면 됐지’라고 대꾸하려다 말았다. 어느 것도 진심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우리는 함께 길 건너 김밥집을 향해 조용히 걷기 시작했다. 

 “방금 좀 그랬어?”

 고보영이 그녀답지 않게 조심스레 물었다. 

 “뭐가.”

 퉁명스런 내 대답에 확신을 섰는지 그녀가 나를 향하던 시선을 거두어 앞을 바라보며 말했다. 

 “다 생각이 있어서 그러는거야. 괜히 서운하게 생각하지마.”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이유를 알 수 없이 서운해져만 가는 내 마음을 그녀의 그 말이 붙들어 준 것만은 분명했다. 나는 표정을 밝게 짓고 경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게에 들어서자 우리 말고도 서너 팀이 더 있었다. 다들 퇴근길에 간단히 저녁 요깃거리를 할 요량으로 들른 사람들 같았다.

 “뭐 먹을래?”

 “난 돈까스.”

 그녀가 묻고 내가 답했다. 고보영은 손을 들어 막내딸 같이 붙임성 넘치는 사근사근한 말투로 주문했다. 

 “이모님, 여기 돈까스 하나랑 참치김밥 하나, 라볶이 하나 주세요.”

 생각보다 시키는 양이 많은 것 같아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자 고보영은 두 손으로 입을 가리고 잠시 웃더니 다시 헛기침을 하는 체하며 팔짱을 끼고 말했다. 

 “오늘 단단히 먹어둬. 노래방에 가서 달려야 해.”

 “누가 뭐래냐. 그런데 왜 노래방이야? 산만하게.”

 나의 물음에 고보영은 오른손으로 머리칼을 귀 뒤로 쓸어넘기며 입을 야무지게 앙 다물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사뭇 설레어 보이기도 하고 긴장돼 보이기도 했다. 말 없이 기다리는 나를 향해 그녀는 짧게 답했다. 

 “지금은 안 듣는 게 좋을 것 같애. 그냥 노래방에서 신나게 논다고 생각해.”

 “그런데 왜 하필 거기냐고. 거긴 어른들이 드나드는 곳 아냐?”

 고보영이 별안간 오른손을 뻗어 내 왼팔 손목을 꽉 잡았다. 순간 몸이 얼어붙는 듯 소스라치게 놀란 내가 숨을 한껏 몰아 들이쉬는 바람에 고보영의 웃음보가 터졌다. 

 “하하하하 내가 괴물이냐? 뭐야, 무안하게. 일단은 제발 묻지 말고 그냥 놀아. 한 번만 더 물으면 그땐 더 깜짝 놀래킬거야.”

 때마침 주문한 음식이 나왔고 나는 행여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 고보영이 시키는대로 열심히 배를 채웠다.           

 “어머, 보영아. 오랜만이네.”

 노래방에 들어서자 카운터를 지키고 서 있던 노래방 사장이 고보영을 향해 반갑게 인사했다. 고보영은 당황한 기색이라고는 전혀 없었으나 노래방 사장은 잠시 내 눈치를 살피더니 고보영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눈인사를 했고, 그 시선 그대로 나를 위아래로 훑더니 방 하나를 가리켰다. 고보영과 함께 노래방 사장이 일러준 방으로 들어갔을 때 박춘수는 커다란 방에 덩그러니 혼자 앉아 방만큼이나 큰 노래방 모니터를 멍하니 응시하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고 있었는지 그는 방으로 들어서는 우리를 눈치채지 못하고, 우리가 모니터 앞으로 가까이 다가갔을 때야 정신을 차리며 우리를 반겼다. 

 “어! 왔어. 반갑다! 오랜만이네.”

 박춘수가 고보영과 반갑게 악수를 하고 나의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고보영은 자리에 앉자마자 능숙하게 노래방 번호를 눌렀고 뒤이어 나는 잘 알지 못하는 빠른 리듬의 반주 소리가 방안에 요란하게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제 말 들리세요!”

 고보영이 나와 박춘수를 맞은편에 앉혀두고는 우리쪽으로 몸을 숙인 채 목소리를 높여 물었다. 굳이 노래 반주까지 틀어놓고 시끄러운 가운데 말을 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으나 김밥집에서 그녀가 해둔 말이 있어 나는 잠자코 따랐다. 박춘수도 별다르게 물을 말이 없었는지 재미있다는 듯 웃는 얼굴로 고개만 끄덕였다. 

 “오늘 노래방에서 신나게 노는 거예요! 아셨죠! 왜는 묻지 마시고! 특히 덕구 너!”

 내가 입을 삐죽거리자 고보영은 나를 슬쩍 흘기고는 박춘수를 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화장실 가고 싶으시면 저한테 물어보셔야 해요! 두 사람 다! 아셨죠!”

 박춘수와 나 모두 흠칫했다가 고보영의 완고한 표정에 하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화장실까지 따라오려는 건 아니지’라고 물으려다 정말 그러겠다며 나설까봐 말을 아꼈다. 고보영은 우리의 고분고분한 태도가 마음에 들었는지 두 손바닥을 마주 대고 두 차례 비비고는, 마이크를 잡고 신나게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박춘수와 나는 그 모습을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쉴 틈조차 없이 고보영의 두 번째 노래가 바로 시작되자 박춘수는 자신의 팔꿈치로 내 옆구리를 툭 치며 귀에 대고 속삭이듯 물었다. 

 “오기 전에 술 마셨어?”

 내가 고개를 가로젓자 그가 입을 벌린 채 혀를 내두르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신난 얼굴이 되어 박자에 맞추어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고보영은 그렇게 내리 3곡을 부르고 기진맥진한 얼굴이 되어 소파에 쓰러지듯 주저앉으며 내게 마이크를 넘겼다. 내가 머뭇거리자 이번에는 박춘수가 마이크를 가로채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알다가도 모를 것이 사람이라더니 고보영에 이어 박춘수까지 좋은 일에 술이 잔뜩 취한 이들처럼 한참이나 그렇게 노래를 부르는 것이었다. 한 곡도 못 부르고 얼이 빠진 얼굴로 자리를 지키고 있는 내가 되려 이상해 보일 지경이었다. 짓이긴 무늬의 유리창 너머로 검은 빛의 사내들 몇몇이 시끌벅적하게 묵직한 발걸음을 옮기는 소리에 박춘수가 노래를 멈추는 듯 했으나, 고보영이 재촉한 덕에 박춘수는 다시 신나게 노래를 이었다. 용기를 내어 내 차례가 왔을 때 고보영이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살며시 열고는 좌우를 살폈다. 그 모습에 나는 노래를 부르는 둥 마는 둥 했고 고보영은 뒤를 돌아 나를 바라보며 신경질적으로 손을 저어대며 빨리 부르라고 재촉했다. 나는 또 다시 고분고분 그녀의 말을 따랐다. 그녀가 슬며시 문 밖으로 나섰고 나는 분명 이유가 있으리라는 생각에 열심히 한 곡을 불렀다. 노래를 부르는 동안 잠시 고보영을 떠올렸으나 그녀가 곁에서 노래를 듣지 않은 것이 차라리 낫다는 생각도 동시에 들었다. 그렇게 박춘수와 내가 한 곡씩 주거니 받거니를 한 차례 마치자 고보영이 살짝 상기된 얼굴로 돌아왔다. 흥이 잔뜩 올랐던 박춘수도 이제는 지쳤는지 소파에 널브러지듯 쓰러졌다. 고보영이 소파에 아무렇게나 뭉개져 있던 우리를 향해 환하게 웃으며 천천히 걸어왔다. 우리 모습이 재미있어 웃는 것인지 방금 밖에 나갔던 일이 재미있었는지, 자꾸만 새어 나오는 웃음을 제대로 눌러 담지 못하고 키득거리며 우리 앞에 앉았다. 그리고 목을 가다듬더니 말을 시작하려다 ‘아차’하는 표정으로 아무 번호나 눌러 노래 반주를 틀어놓고는 다시 우리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려 앉아 몸을 숙였다. 

 “옆방에 권세진 과장, 하재명 사장, 이재우 주무관, 우리 아빠가 와 있어요.”

 나와 박춘수가 동시에 자세를 바르게 고쳐 앉았다. 고보영이 말을 이었다. 

 “어떻게 하시겠어요. 우연을 가장해서 한번 모습을 비추시겠어요, 아니면 이대로 돌아가시겠어요?”

 나는 박춘수를 돌아보았다. 박춘수가 답할 문제였다. 그는 잠시 말이 없다가 한참만에 입을 열었다. 

 “여기 왔다가 우연히 알게 된 건 아닌 것 같고, 그럼… 알고 온 건가?”

 고보영이 싱긋 웃으며 답했다. 

 “정확히 말하면 알고 온 건 아니구요, 올 것 같아서 온 건데 방금 확인해 보니까 맞네요.”

 나는 고보영에게 '네가 도대체 왜?'라고 물으려다 말았다. 그저 원해서 돕겠다는 아이에게 이유가 필요한가. 나는 보이지 않는 벽 너머를 응시했다. 그리고 그 순간 화장실에서 엿들었던 편집장과 하 사장 간의 대화가 떠올랐다. 박춘수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을 무럅, 우리 방 앞을 우르르 지나가던 묵직한 발소리의 정체가 그들이었다는 것도 그제야 깨달았다. 박춘수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말이 없었다. 고보영은 박춘수가 고민하는 동안 노래를 한 곡 불렀다. 음이 동글동글 귀여운, 그 역시 내가 모르는 곡이었다. 그녀의 노래가 끝나자 박춘수가 고보영을 불렀다. 

 “오늘은 이만하면 됐어. 이제 갈까?”

 고보영은 정지된 듯 잠시 멈춰있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고, 가장 먼저 일어나 문을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살며시 문을 열어 다시 좌우를 살폈다. 그러자 박춘수가 그녀를 조용히 불렀다. 

 “가더라도 권세진 과장 얼굴은 한번 봐야지. 그 뜻이었어. 우리 위원회 패밀리인데.”

 박춘수는 내게 차 키를 건네며 말했다.  

 “두 사람은 먼저 나가는 게 좋겠다. 노래방 뒤편 주차장에 차 세워뒀으니까 먼저 타 있어.”

 나는 그의 키를 건네받았고 고보영과 나는 카운터에 있던 사장과 인사를 나누고 재빨리 가게를 나섰다. 그리고 발걸음을 더욱 부지런히 놀려 박춘수의 차로 향했다. 서둘러 뒷좌석에 올라타고 잠시 후 실내등까지 꺼지자 나는 고보영을 돌아보았다. 그녀의 두 눈이 어둠 속에서 유난히 반짝이고 있었다. 

 “어떻게 알았어?”

 고보영이 움츠렸던 몸을 쭉 뒤로 뻗어 기지개를 켜고는 뒤로 풀썩 기대어 앉았다. 

 “아빠가 엄마한테 중요한 저녁약속이 있어서 늦는다고 그래서.”

 “그거 하나만 듣고 여기에 오자고 한거야? 노래방이 한둘도 아니고.”

 고보영은 잠시 망설이더니 씨익 웃으며 깍지 낀 두 손을 뒷목에 대어놓으며 말했다. 

 “그게. 예전에 우리 엄마가 아빠가 바람 피우는 것 같다고 나를 그 노래방에 심어놓은 적이 있어. 하하하. 웃기지. 엄마가 딸을 노래방 카운터 알바로 심어놓은거야. 하하하.”

 나는 그게 웃을만한 일인지 분간이 되질 않아 어둠 뒤에 숨어 아무 표정도 짓지 않았다. 

 “엄마가 너무 불쌍했거든. 맨날 쥐 잡듯이 아빠 잡을 땐 언제고, 바람 난 것 같다고 무너지는 얼굴로 딸인 나더러 노래방 좀 가보라니, 그 모습이 애처롭더라. 그 때 알았어. 아빠가 노래방은 여길 다닌다는 것도, 대충 어느 시간대에 어떤 모습으로 오는지도 알게 됐고.”

 “그래도, 편집장님이 들어오시면서 너 얼굴을 못 알아봐?”

 내 물음이 재미있다는 듯 그녀가 웃으며 답했다. 

 “그러니까, 웃기지? 그런데 뭐, 한 세 번 봤나? 그렇게까지 취한 것같지도 않은데 자기 앞에 선 딸은 알아보지도 못하고, 자기가 모시고 온 사람한테 온 정신이 팔려있더라. 세 번 전부 다. 그 모습이 어찌나 엄마 못지않게 애처롭던지. 나중에 엄마한테 아빠한테 잘하라고 하고, 그만 뒀어.”

 그리고 한동안 우리는 말이 없었다. 가끔 저 앞 도로를 오가는 차들의 불빛이 우리 둘의 얼굴을 비추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고른 숨소리가 나지막이 들려왔다. 옆을 돌아보니 고보영이 잠에 골아떨어져 있었다. 깨우려다 마음을 바꾸어 그냥 그대로 두었다. 차 한 대가 또다시 우리 앞을 지나갔고 아주 짧은 그 순간, 고보영의 잠든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잠들어 있는 낯선 얼굴 위로 노래방에서 신나게 노래를 부르던 그녀의 즐거운 얼굴이 겹쳐졌다. 얼마 만에 그렇게 노래를 부르며 신나게 놀았었나. 나는 슬며시 웃음이 났다. 그렇게 기다리다 문득 시계를 보니,  박춘수가 생각보자 늦다. 나는 고보영에게 잠시 나갔다 오겠다는 메시지를 남기려고 핸드폰을 꺼내들었다가, 마음을 달리하여 가방에서 펜과 노트를 꺼내었다. 그리고 노트 한 장을 찢어 ‘춘수 형 어떻게 하는지 보러 잠시 나갔다 올 테니, 걱정하지마. 차는 잠가두고 갈테니 깨어나면 연락해 – 덕구’라고 쓰고는 그녀 맞은편 잘 보이는 자리에 꽂아두고는 조심스레 차에서 내렸다. 

 주차장에서 노래방 입구쪽을 향해 돌아가다가, 나는 입구로 가는 대신 길 건너편 건물의 모퉁이에 숨어 노래방 입구쪽을 바라보았다. 입구에 박춘수가 서 있었다. 아직 그들을 보지 못한 모양이었는지 그는 오른쪽 발끝으로 바닥을 툭툭 쳤다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향해 한숨을 푹 쉬었다가 허리를 이리저리 비틀어 스트레칭을 하며 그들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꽤 오랫동안 서 있었으니 좀이 쑤실 법도 하다는 생각이 들려는 찰나, 박춘수가 노래방 입구쪽에서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입구에서 한 발짝 떨어진 곳에 섰다. 이윽고 익숙한 얼굴들이 차례로 건물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거나하게 취하여 목청이 높아진 편집장을 필두로, 어색하게 웃고 있는 하 사장과 벌겋게 취한 이재우 주무관 그리고 웃는 법이 없는 작은 눈동자로 사람들을 훑어가며 입으로만 웃고 있는 권세진 과장이 차례로 모습을 드러냈다. 박춘수는 유쾌하게 웃는 그들을 한참동안 바라본 채로 그들이 가는 길목에 가만히 멈춰 서 있었다. 천천히 그들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서로에게 주고받는 눈빛이 잦아들고 어디로 가야할지 그들 각자의 시선이 길 위로 향하자 하 사장을 시작으로 그들의 얼굴이 하나둘 차갑게 굳어가기 시작했다. 박춘수와 눈이 마주친 것일테다.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편집장이었다. 

 “어! 박 위원님이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노래방 오셨습니까? 혼자는 아니실테고.”

 박춘수가 어떤 표정이었는지 알 수 없었으나 그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평안했으며 이는 그들의 표정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었다. 내게 등을 돌린 채 선 박춘수의 차가운 목소리가 길 건너편에 있는 내게까지 들려왔다.  

  “아니요. 이 앞에서 누구를 만나기로 했었는데 이렇게 뵙네요. 네 분을.”

 편집장도 마땅히 할 말이 없는지 나머지 일행을 향해 고개를 돌렸고, 나머지 세 사람은 무엇이 그리 당황스러운지 서로 부지런히 눈을 맞추어 가며 박춘수를 떠넘기느라 분주했다. 그때 권세진이 앞으로 한 발짝 나서서 박춘수 곁에 서며 말했다. 

 “같이 가실래요? 우리 마침 자리 옮기려던 참인데.”

 그러자 박춘수는 몸을 돌려 권세진과 마주선 채로 말 없이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답했다. 

 “오늘은 말고. 다음 주 군민위원회에서 뵙죠.”

 박춘수의 말에 권세진의 미간이 일그러졌고, 박춘수는 이에 아랑곳 않고 가볍게 고개를 숙여 나머지 세 사람과 권세진에게 인사를 건네고는 천천히 주차장을 향해 걸어갔다.      


(다음 주 월요일, 25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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