핸드폰이 울렸다. 박춘수였다. 내가 차 안에 있다고 생각했는지 운전석 차문에 기대어 선 채 내게로 향하는 신호음을 멍한 얼굴로 듣고 있었다. 나는 전화를 받는 대신 그에게로 달려갔다.그가 나를 알아보고 방긋 웃으며 핸드폰을 들었던 손을 가볍게 떨구었다.
“어디 갔었어? 고 주임은?”
“차에서 자요. 아직 자는 것 같은데. 하도 안 오길래. 그... 입구에서 만난 거 봤어요.”
그는 내 말에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 삼키고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에게 차키를 넘기자 그가 차를 열고 운전석에 올라탔다. 나는 뒷자리로 가려다 말고 조수석에 올라탔다. 차에 올라타니 고보영은 그제야 잠이 깼는지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응? 이제 왔어요? 나 얼마나 잔거지?”
그 모습에 박춘수가 웃으며 말했다.
“집에 바래다 주고 싶은데 방금 아버님을 뵈어서 말야. 근처에서 내려줘도 괜찮나?”
고보영은 자세를 고쳐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네, 인사는 잘하셨어요?”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묻는 고보영의 말에 나와 박춘수는 웃음이 터졌다. 인사는 잘 나누셨냐니, 보고 싶고 그리워했던 이를 만난 것도 아니건만 이것은 또 무슨 너스레란 말인가.
“그럼, 언제 들려주시는 거예요?”
고보영의 질문에 박춘수가 룸미러로 그녀를 바라보더니 무슨 말인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언제가 좋은가. 그 때 오늘 말고 다음에라고 해서.”
“다음 주에 군민위원회 있으시죠? 그 전에 말씀해 주세요.”
“그럼 장소는 어디가 편해?”
박춘수의 말에 고보영이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한참 고심하더니 답했다.
“박춘수 님 자택 어떠신가요?"
“하하, 고 주임만 괜찮으면.”
“그럼 토요일에 봬요.”
“그래.”
두 사람의 대화가 그렇게 끝이 나고 차가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노래방을 나온 네 사람이 어디로 향했는지 알 수 없었으나 분명한 건 지금쯤 술맛이 확 달아났으리라.
날은 화창했다. 하늘은 가을이었다. 선선한 날씨 덕이었는지 한낮에도 놀이터에 나와 노는 아이들의 들뜬 목소리가 이따금 방 안으로 날아들었다. 방문을 열고 나서자 엄마가 식탁에 앉아 핸드폰을 열심히 들여다 보고 있었다.
“응? 오늘 시장 안 가?”
엄마는 내가 방에서 나오는 것조차 몰랐는지 잠에서 깨듯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
엄마는 내게 그렇게 묻고 다시 핸드폰으로 눈을 돌렸다. 애초에 답을 바란 것은 아니었을테니 이상할 일도 아니다. 나는 엄마 맞은편에 앉으며 물었다.
“뭔데 그렇게 열심히 봐?”
“응? 아니 무슨 시장 사람들 몇몇이 하는 단체창이 있는데, 무슨 말을 해서.”
나는 식탁 위에 놓여있던 물통에 있던 물을 한 컵 따라 크게 들이켜고는 물었다.
“무슨 말인데 내 얼굴도 안 봐?”
그 말에 엄마가 나를 기가 차다는 눈으로 보며 헛웃음을 웃었다.
“야, 너는 언제부터 내 얼굴을 그렇게 들여다봤다고. 그런 말은 나중에 니 마누라한테나 해. 징그럽게.”
“뭐라는 거야.”
엄마는 다시 핸드폰 속 화면을 뚫어지게 보았다. 엄마는 대화에 참여하지 않고 그저 사람들의 대화를 지켜보는 듯했다. 그 모습을 보자니 아들이 묻는 말에는 관심조차 없이 무슨 이야기에 그렇게 빠져있는지 궁금했다.
“뭔데, 궁금하잖아.”
엄마는 내 말에도 한참 동안 대꾸를 않더니 단체창에서 마침내 대화가 끝났는지 핸드폰을 식탁에 내려두며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정말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 내가 말 없이 지켜보자 엄마는 고개를 들어 나를 보며 말했다.
“시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 상가 건물이 들어선다는데, 거기에 마트도 생긴다는데.”
엄마는 그렇게 말을 내어놓고 울상이 되었다.
“정해진거야 아니면 들리는 소문인 건가. 나는 못 들어봤는데. 그런 소식이면 나도 들었을텐데.”
나의 말에 엄마는 슬쩍 안심이 된다는 듯 표정이 풀렸다가 이내 어두워지며 말을 이었다.
“홍영도 저번에 아파트 지어지면서 사람이 점점 많아지고 있잖아. 사람들이 그러는데 이제 마트가 들어올 때가 되지 않았냐면서. 걱정이네.”
그 말을 듣자 나도 마음이 무거워졌다. 시장이 사라진다는 건 상상하기 어려웠다. 내 표정에 엄마는 더 불안해지는지 채근하듯 물었다.
“왜, 너도 들은 게 있어?”
나는 엄마를 향해 웃어 보였다.
“아니, 그리고 그거 확정된 건 아닐거야. 저번에 보니까 그 행복군민위원회 있지? 거기에서 아무 말도 없었어. 내가 알게 되면 바로 알려줄 테니까 걱정하지마.”
그제야 엄마는 안심이 되는지 가슴을 쓸어내렸다.
“세상에, 덕구 니가 그렇게 소식지에 있고 그러니까 군청 소식을 제일 먼저 알게 된다. 아이고 세상에.”
엄마는 다시 핸드폰을 열어 밝아진 얼굴로 무언가 메시지를 보냈다. 엄마처럼 가슴을 졸이는 시장 상인들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다독이고 있을 테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냉장고에서 땅콩버터를 꺼내어 식탁 위에 놓여있는 식빵에 쓱쓱 발라 하나는 엄마를 주고, 하나는 내가 베어물었다. 엄마는 핸드폰에 눈을 고정한 채 빵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더니 입맛이 돌았는지 냉장고에서 우유를 꺼내어 나 한 잔, 엄마 한 잔 따라내고는 핸드폰을 식탁 위에 엎어두고 먼 곳을 응시한 채 입을 오물거렸다. 내게는 한시름 놓았다 말하고, 시장 사람들에게도 걱정하라 해 놓고 정작 자기는 기운이 죄다 빠진 모양새로 어깨를 축 늘어뜨린 모습이라니, 엄마도 참 엄마답다.
“엄마, 내가 아는 누가 그러는데, 인생은 성공도 실패도 없대. 케네디 대통령 알지? 그 사람 암살 당했잖아. 대통령이라서 성공한 인생인 줄 알았는데 그렇게 죽고 나서 그런 생각 안했겠어? 괜히 대통령했다, 뭐 그런.”
엄마가 나를 돌아보며 두 눈망울을 끔뻑거렸다. 깨달음을 얻은 표정인지, 충격을 받은 얼굴인지 분간이 안 되었다. 나는 괜한 말을 했나 싶어 손에 쥐고 있던 남은 빵을 입에 욱여넣었다. 엄마는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먹던 빵을 내려두며 말했다.
“하하하 난 방금 알겠는데. 내 인생이 성공했다는 거.”
“어?”
“니가 아직 자식이 없어서 그렇지 자식을 딱 낳잖아? 그리고 심지어 그 자식이 이렇게 커서 그런 말 막 해 주고 그러잖아? 그럼 내 인생은 성공했다는 확신이 드는 거야.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네. 하하하하”
엄마는 기분이 좋아졌는지 언제 그랬냐는 듯 한껏 밝아진 얼굴로 시원하게 웃었다. 내가 낯간지럽다는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리며 어깨를 들썩이자 엄마는 자리에서 일어나 굳이 내 쪽으로 돌아나가며 내 등을 한 대 차지게 때리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시계를 보니 박춘수 집에 가야 할 시간이다. 나는 화장실로 바삐 들어가 샤워를 하고 면도도 말끔하게 한 뒤, 평소 입지 않고 아껴두었던 연보라색 티셔츠와 청바지를 꺼내어 입고 거울 속 나를 이리저리 몇 차례 점검한 뒤 현관으로 나섰다.
“엄마, 나 나갔다 온다!”
엄마가 내다보기 전에 재빨리 현관을 나온 나는 곧장 박춘수의 집으로 날아들 듯 향했다. 박춘수는 기다리고 있었는지 바로 문을 열어주었다.
“뭐야, 향수 뿌렸냐? 옷도 새 옷인 것 같은데?”
박춘수가 능글거리는 미소로 묻자 나도 모르게 얼굴이 화끈거렸다.
“무슨 향수예요, 바디샴푸예요.”
“야, 무슨 바디샴푸야! 그냥 비누나 문지르면 될 것을. 하하하”
나는 새 옷인 것이 너무 티가 나느냐고 물으려다가 말았다. 공연히 박춘수가 장난칠 핑계만 줄 게 뻔하다.
30여 분 기다렸을 때 누군가 벨을 눌렀다. 고보영이었다. 고보영은 화창한 가을 하늘을 뒤로 하고 검은 모자를 눌러쓴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문을 열자 그녀 역시 나처럼 집으로 날아들 듯 들어왔다.
“어, 이 대리도 왔네.”
고보영의 말에 나는 건조하게 손을 들어보였다. 혹여 박춘수처럼 새 옷이라는 걸 눈치챌까 봐 나는 덥지도 않으면서 티셔츠 목 부분을 잡고 덥다는 듯 슬쩍 펄럭였다. 고보영이 모자를 벗자 모자 속에 숨겨져 있던 긴 머리가 어깨 위로 쏟아졌다.
“날도 화창한데 혼자 너무 우중충한 거 아냐? 스파이 놀이도 아니고.”
내 핀잔에 고보영이 눈을 흘겼다. 박춘수가 부엌에서 무엇인가를 달그락거리더니 쟁반 위에 견과류와 병맥주를 내 왔다.
“대낮부터 맥주를 마시자구요?”
내가 뜨악한 표정을 짓자 그가 웃으며 말했다.
“덕구 니가 아직 몰라서 그러는데, 맥주는 대낮이 제격이야. 왜 더울 때 맥주가 생각나겠어.”
고보영은 벌써 병따개를 집어 병 하나를 따고 있었다. 갈증이 났는지 한숨에 벌컥 들이켜 맥주병의 삼분의 일이 비우고는 말했다.
“주말이라 그런지 사람이 너무 많았어.”
도대체 무슨 마음가짐으로 오느라 저렇게 나름 변장까지 온 건가 싶다가 남자 혼자 사는 집에 홀로 들어선다는 것이 고보영 입장으로서는 부담스러웠을 수 있겠다 싶어 내심 별말 없이 이곳으로 온 그녀가 고마워졌다. 박춘수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고보영을 보더니 웃으며 말했다.
“쉽지 않았을텐데 와 줘서 고맙네. 밖에서 말하기엔 좀 그래서.”
고보영은 회의 테이블에 앉아 이리저리 시선을 돌려가며 집안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벽면에 가득한 카메라를 보더니 그녀의 눈이 나를 향했고 나는 ‘내가 말했던 그 카메라들이야, 진짜 많지’라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렇게 우리 셋은 말없이 시선을 주고 받으며 각자의 몫으로 놓인 맥주 한 병을 마셨다. 그렇게 모두 병을 비우고 나자 어색한 침묵이 찾아왔고 박춘수는 ‘때가 되었군’이라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침실로 향하더니 잠시 후 종이 뭉치를 들고 나왔다.
그는 들고 온 종이뭉치에서 노란 포스트잇이 붙어있는 종이 몇 장을 가려내어 나와 고보영 앞으로 밀어놓으며 말했다.
“여기에 다 있어. 내가 홍영에 내려온 이유.”
고보영은 그 말을 듣고 바로 손을 뻗지 않았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우리 둘을 지켜보며 박춘수가 깊은 눈으로 미소 지었다.
“참, 괜찮은 사람들일세.”
나는 그 말에 응수하거나 손을 뻗어 종이를 집는 대신 눈으로 첫 줄을 읽었다. 그건 작년 이맘때 즈음 그가 쓴 일기장인 듯 했다. 그렇다, 그의 일기장이었다.
9월 2일
이상한 것을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하면 이상하지 않은 것이 되나.
9월 16일
분명 1차 심의결과에서 검토자 점수 미달로 떨어진 홍영 사업이 재심의를 받아 통과했다. 심의총괄부에서 재심의를 거쳤다는데, 홍영 건만 그런 것은 아니라며 전반적 재검토가 필요해서 그랬다는 것이 오 팀장님의 설명이다. 이렇게 말도 안되는 건이 재심의까지 거쳐가면서 심의를 통과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그저 땅 사서 그 땅을 민간에 팔아넘기겠다는 뜻인데 왜 아무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거지. 정말 이상한 건 나인가.
9월 22일
곧 3차 심의다. 실무자 검토의견 발표에서라도 문제 제기를 해야 겠다. 내일이라도 당장 부장실에 들어가 봐야겠다. 세영이에게는...비밀로 하자. 그게 낫다. 그래 그게 낫다.
9월 23일
부장실 앞에서 낯선 남자를 만났다. 회사에 모르는 사람이야 많지만 그래도 회사 사람인지 아닌지 정도는 분간하는데...괜히 찝찝하다. 기분 탓인가.
9월 29일
권세진 대리에게 홍영 건이 넘어갔다. 인수인계자료에서 홍영 건 검토의견 부분도 삭제 당했다. 상사 허락 없이는 인수인계서에 넣어줄 수가 없다는 미친 개소리를 그놈이 늘어놓았다.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니라고? 나 때문에 다른 동료직원들 다 무능한 사람 만들지 말라는 그 개소리를 내가 귀담아들어야 하나?
10월 17일
감사과에서는 제보자의 제보 신빙성은 안 따지나. 제보자는 보호하면서 왜 나는 덮어놓고 죄인 취급이란 말인가. 지금 누군지도 모르는 놈한테 당하고 있다. 어디에서부터 잘못된 거지. 나쁜 놈이 됐다.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아보인다. 그냥 나는 그렇게 나쁜 놈이 된 것이다. 누명을 벗기 위한 소명 따위는 애초에 그들에게 중요치 않다. 어차피 저들이 처음부터 원했던 건 진실이 아니니까.
10월 22일
누굴까. 권세진은 출장 중이었으니 아닐테고. 누가 그 시각에 내 회사계정을 쓸 수 있었지. 어떻게 그게 가능하지. 제대로 걸린 건가. 내가 놓치고 있는 게 뭐지.
10월 27일
정보보안 내부규정 위반이라니. 뭐라고? ‘유령회사에 당하셨나보네요’? 규정은 규정이고 위반은 위반이니 징계가 당연하다? 개새끼들. 애초에 내가 위반을 했어야 니들 시나리오에 맞는 거겠지.
11월 2일
감사진술서를 썼다. 요즘같은 시대에 뻘건 인주에 손가락을 지져 진술서마다 지장을 찍었다. 이런 전근대적인 ritual은 진술자에게 정서학대를 가함으로써 조직의 권위를 보이기 위함인가.
11월 17일
십여 년, 여기에서 일하면서 카메라도 사 모으고, 차도 사고, 돈도 조금 모았네. 그러면 됐지. 내가 싫어서 떠나는 것인데 그보다 좋은 게 있을까.
11월 19일
회사에서 소지품이 든 상자 안고서 걸어 나오는데 권세진이 한 마디 던졌다. 너가 그 한 마디만 안 했어도 내가 이런 생각은 안 했을텐데. 홍영으로 가야겠다. 개새끼들.
(수요일, 26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