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만요. 여러 번 정리했던 생각인데 막상 말하려니 기분이 이상하네. 이 대리 너는 그렇게 뚫어지게 보지 마. 긴장돼. 아니, 그렇다고 고개를 떨굴 필요까진 없잖아. 아우, 정말. 하하. 참, 이야기 시작하기 전에 박춘수 씨 호칭부터 바꿀게요. 이 대리는 춘수 형이라고 부르니까, 저는, 음… 춘수 삼촌 어때요? 뭐예요. 왜 그런 표정 지으세요? 박춘수 씨는 너무 멀고, 오빠라기엔 너무 친해보이고, 삼촌이 딱 적당한 것 같아서요. 괜찮죠? 왜요. 괜찮잖아요, 춘수 삼촌. 막상 들어보니까 괜찮죠? 방금 고개 끄덕이셨다, 맞죠? 그럼 춘수 삼촌이라고 부를게요. 호칭 정리도 끝났으니 지금부터 제 이야기를 시작해 볼게요.
조금 긴 이야기가 될 거예요.
지금 생각해 보니 그때가 박춘수 씨, 아니 춘수 삼촌이 홍영 내려오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나 봐요. 그때 전 주로 제 방에서 지냈어요. 입사원서 넣은 곳에서 다 떨어졌거든요. 원서 정말 많이 넣었는데, 면접은 딱 두 군데만 부르더라고요. 그마저도 최종면접 가기 전에 떨어지고. 그렇게 되니까 엄마, 아빠도 보기 싫더라고요. 엄마, 아빠가 떨어뜨린 것도 아닌데, 얼굴만 마주치면 말이 좋게 안 나갔거든요. 두 분은 그런 제 눈치 보느라 아무 말씀도 안 했고요. 취직하라고 잔소리 한번 한 적 없고. 정말 단 한번도. 그런데 그게 또 너무 싫은 거예요. 돌아보면 그냥 다 싫었던 것 같아. 게다가 그때 언니까지 결혼해서 서울로 가 버리고. 그래서 기분이 더 안 좋았던 것 같아요. 언니가 떠나서, 보고 싶어서 기분이 안 좋았던 건 아니었어요. 그냥, 언니는 집에서 독립했는데 나는 취직도 못 하고 여기 홍영에 묶여있다고 생각하니까 자꾸 나만 뒤처지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종일 방에 있었어요.
방 안에서는 뭐, 늘 음악 듣고. 그냥 종일 듣는 거예요. 아침이면 라디오 디제이가 출근하는 사람들이 보내는 문자 메시지 소개해 주는 것도 듣고, 애플뮤직에서 오늘의 인기가요 100위를 1위부터 쭉 들어보는 거예요. 100위까지 다 듣고 다시 처음부터 들을 때면 가끔 7, 8위가 바뀌어있기도 하고, 새로운 노래가 리스트에 들어가 있기도 하고, 그런 거 찾아내면서 하루를 보내는 거죠.
그러다 이어폰이 고장 난 거예요. 그래서 아무것도 못 듣고 멍하니 침대에 누워있었죠. 처음엔 그냥 핸드폰 스피커로 들을까 싶었는데, 어쩐지 내가 듣는 음악 소리가 방문을 넘어간다는 게 또 싫더라고요. 내가 무얼 듣는지 엄마나 아빠가 들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어쩐지 싫었어요. 내가 그 시간 할 수 있고, 하고 싶은 게 그뿐이라는 걸, 두 분이 아는 게 싫었달까. 그래서 그날은 온종일 침대에 누워서 거실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다 들었어요. 엄마가 방을 오가는 소리, 이모와 통화하는 소리, 티브이에서 흘러나오는 드라마 소리, 아빠가 들어올 때가 되자 저녁밥을 준비하는 소리, 내 방문 앞까지 왔다가 발길을 되돌리는 소리까지. 내가 바깥세상 이야기에 정신을 팔고 있는 사이 잃고 지냈던 소리를 그날 다 듣게 된 거예요. 좀 새롭더라고요. 여튼 그러다 아빠가 밤이 다 늦은 시각에 퇴근을 했어요. 엄마에게 내가 어찌 지냈는지 물었고, 술을 마셨는지 한숨이 길더라고요. 엄마는 아빠 등을 가볍게 치며 말을 막는 것 같고. 두 사람이 내 눈치 보는 거죠. 아, 지금 생각해도 너무 싫어. 그러다 아빠 핸드폰이 울렸어요.
‘아이고, 부장님께서 이 시간에 웬일로 전화를 다 주셨습니까. 아, 예. 예. 네? 박춘수요? 저는 처음 들어보는데. 직원이면 그때 식사 자리에 나왔던 그 대리입니까? 아닙니까? 그럼, 아, 네네. 그 사람 전임이요. 네? 홍영이요? 그 사람이 왜. 네? 네네. 저도 위원입니다. 아, 그 박, 이름이 뭐라고 하셨죠? 네네, 박춘수요. 그 사람이 위원입니까? 네네. 확실합니까? 네, 이 주무관이 담당이죠. 그런데 그 사람은 왜. 예. 예. 아,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예, 예. 아, 저희 직원이요? 글쎼요. 저는 잘 모르겠는데. 아, 얼마 전에 알바를 하나 들였는데, 그 친구 말씀인가 보네요. 그래요? 뭐, 기회가 되면 물어보지요. 네. 네. 예, 그럼 들어가십시오.’
그때가 처음이었어요. 박춘수라는 이름을 들었던 게. 아빠가 박춘수라는 이름을 되물어서 그랬는지 아니면 이름이 근래 못 들어본 촌스러운 이름이라 그랬는지 유독 기억에 남았어요. 아니, 그땐 그랬다고요. 그리고 솔직히 세련된 이름은 아니잖아요. 여튼 오랜만에 들어보는 새로운 이름이었어요. 낯선 이름이 나를 세상 밖으로 끌어낸 기분이었달까. 그리고 며칠 지나서 주문한 이어폰이 도착했는데, 그때부터는 종일 음악을 듣진 않았어요. 굳이 나누자면 하루의 반은 음악을 듣고, 하루의 반은 거실에서 들려오는 이야기를 들었달까. 그렇게 며칠 지났을 때, 어느 날 아빠가 엄마한테 건넨 말 속에서 새로운 이름을 또 듣게 됐어요. 응, 맞아. 이 대리, 너 이름이었어.
‘내가 당신한테 저번에 이야기했었지? 알바 하나 들였다고. 그, 순미네 아들. 그런데 그 녀석이 보통이 아닌 것 같더라고. 오늘 나한테 근로계약서를 쓰자는 거야. 하하하. 그놈 당돌하더라고. 저번에 행사 사진도 찍은 거 보니까 제법 잘 찍고. 나이가 보영이랑 동갑인 것 같던데. 참나, 내가 알바를 그렇게 썼어도 그렇게 야무진 놈은 처음이야. 그놈 참 마음에 들더라고. 이름? 이덕구. 아버지 없이도 순미가 아들 잘 키웠더라고. 김 실장? 김 실장은 애가 괜찮은 것 같다고 잘 잡으라고 그러지. 내가 봐도 그래.’
이 대리, 그냥 시원하게 웃어. 웃음을 왜 참아. 그렇지, 잘한다. 여튼 덕구 이름을 그때 처음 들었어요. 그리고 얼마 후 하 사장이 아빠에게 늦은 시각 전화를 한 거예요. 하 사장한테 오는 전화는 언제나 알 수 있어요. 아빠는 하 사장 전화 받기 전에 늘 ‘같잖은 새끼’라고 그러거든요. 처음에는 개새끼라고 했다가, 개한테 미안한 일이라면서 언젠가부터는 되도록 ‘같잖은 새끼’라고 부르더라고요. 그날도 같잖은 새끼라고 한번 내뱉고 난 뒤에 전화를 받더라고요. 그리고 그날은 박춘수와 이덕구라는 이름을 같이 들었어요. 두 사람 이름을 동시에 들은 건 그때가 처음이고.
‘아, 이 같잖은 새끼가 오늘은 왜 또 잠잘 시간에 전화질이야. 흠, 흠. 아, 하 사장! 이 시간에 어쩐 일이신가. 응? 누구? 박춘수? 글쎄, 나는 잘 모르는, 아! 그 계획공사에 있었다는? 그 사람은 왜. 우리 직원? 누구. 아, 이 대리. 응응, 아니, 알바는 아니고 우리 직원인데 왜. 아, 그래? 그냥 거기 운곡맨션 이웃이라고 그러던데. 응? 아, 뭐 내가 넌지시 몇 번 묻기는 했는데 그냥 오다가다 아는 사이 같던데. 누구한테. 우리 이 대리한테? 뭘 물어보면 되는데. 응. 응. 그래요. 한번 물어보지, 뭐. 그래, 들어가요.’
아빠는 그렇게 전화를 끊고 한동안 말이 없었는데 엄마가 묻더라고요. 도대체 박춘수가 누구길래 사람들이 그렇게 묻느냐고. 사실 저도 같은 질문을 하고 싶었는데 엄마가 한 거죠. 그런데 아빠도 영문을 모르는 건 마찬가지더라고요. 그런데 이런 말을 하는 거예요.
‘이게 잘은 모르겠는데, 그 박춘수라는 사람이 하 사장, 이놈 명줄을 잡은건가 싶기도 하고. 이 같잖은 새끼가 왜 이렇게까지 똥줄이 타서는 박춘수인지 뭔지 하는 놈이 홍영에서 뭘 하는지 궁금해하는가 싶단 말이지. 한국도시계획공사 알지? 거기 있다가 관두고 여기 내려왔다는데. 행복군민위원회 있지? 거기에서 나랑 같은 도시, 그 분과야. 응? 뭘 가까이 지내. 그냥 오다가다 말이나 섞은 거지. 이 대리? 이 대리야, 뭐, 이웃사촌이니까 아는 것 같고. 그나저나 하 사장 이놈이 왜 이 외지인한테 이렇게 열을 내면서 관심을 갖는지, 아무래도 이상하단 말이야. 보니까 저번에 서장, 응? 경찰서 최 서장한테까지 박춘수 관련해서 뭘 물어본 것 같더라고. 응, 응. 걱정하지마. 내가 엮일 일이 뭐가 있겠어. 박춘수인지 뭔지 나도 잘 모르는데. 그냥 대충 이 대리한테 물어보지 뭐.’
그리고 얼마 후에 엄마가 누군가와 통화하는 걸 들었는데, 음, 은옥 아주머니 이야기였어요. 음, 그 사건이 있었고 죽인 범인도 잡았다고, 홍영에서 이런 일도 있다면서 한참 통화하더라고요. 그런데 그 범인이 하 사장이 데리고 있던 사람이라는 거예요. 그리고 엄마 통화를 듣고 난 며칠 뒤, 아빠가 하 사장하고 통화하는 걸 들었고.
‘하 사장, 들었어. 이용선이가 사고를 쳤다고. 응, 응. 유 회장님께서 심려가 크시겠네, 안부 좀 잘 전해드려 줘. 그나저나 그런 놈을 그렇게 잘 봐 주셨는데 사람은 안 변하는가 봐, 기어이 이렇게 일을 치네. 응. 응. 응? 우리 이 대리는 왜. 어디에서, 이용선이가? 운곡맨션에는 왜. 에이, 우리 이 대리가 이용선이를 어떻게 알아. 알았어. 한번 물어는 볼게. 그래, 들어가게.’
그렇게 아빠가 전화를 끊고는 아주 의미심장한 투로 혼잣말을 뱉는 거예요.
‘이거, 박춘수인가 뭔가 하는 놈이 하 사장 명줄을 쥔 게 맞는 것 같은데. 도대체 뭐지.’
그거 아세요? 어둠 속에서 물건을 찾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눈을 감으면 돼요. 눈을 크게 뜨고 없는 빛을 끌어모아, 어둠 속을 보려 노력하면 오히려 힘들어요. 그럴 땐 눈을 감아야 해요. 그렇게 하면 손끝이 예민해지거든요. 그 예민해진 손끝을 따라 어둠 속을 더듬어 나가다 보면 물건을 찾게 돼요. 방 침대에 누워, 종일 밖에서 들려오는 이야기를 듣는 기분이 꼭 그랬어요. 어쩌면 아빠 본인은 모르는 그 정답을, 오로지 줄곧 듣기만 해 온 내가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아빠가 전화 너머 누군가와 하는 이야기, 엄마와 나누는 대화, 혼잣말로 내뱉는 이야기를 다 모아서, 그 조각들을 이어붙이다 보니 정답을 알 것 같았달까. 그래서 더 많은 조각을 찾아 밖으로 나가보자 싶었어요. 박춘수와 이덕구의 얼굴을 직접 보자. 그리고 믿고 싶어지거든 말하자. 같이 정답을 찾아보자고, 그게 무엇이든.”
(다음 주 월요일, 28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