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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마나 Sep 21. 2020

28화. 셋이서

 때마침 배달 온 중국 음식이 식탁 위에 차례로 놓였다. 박춘수는 우리 두 사람에게 음식 차리기를 맡기고는 느릿느릿 주방으로 걸어갔다. 그의 냉장고에 콜라와 생수 말고도 음식이라는 것이 있었는지 그가 냉장고 안쪽 어디에선가 반찬 그릇 하나를 빼 들었다. 반찬 뚜껑을 열자 된장 같은 것 속으로 박춘수가 맨손을 푹 집어넣었고, 장아찌 한 덩이가 쏙 빠져나왔다. 울외장아찌였다. 그는 그 덩어리를 벅벅 문질러 씻은 뒤 먹기 좋게 얇고 작은 크기로 썰었다. 그동안 고보영과 나는 깐풍기, 간짜장, 팔보채의 비닐을 차례로 벗겨 먹기 좋게 늘어놓았다. 고보영이 단무지 뜯는 일은 내게 맡겨 두고 벌떡 일어나 박춘수로부터 앞접시와 젓가락을 얻어 들고 경쾌한 걸음으로 내게 돌아왔다. 나무젓가락 대신 무거운 젓가락 한 벌씩을 손에 쥔 우리 두 사람은 박춘수가 자리에 앉자마자 입안에 잔뜩 고인 침을 꿀꺽 삼켰고 ‘이제 먹자’는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합창하듯 ‘잘 먹겠습니다’라고 외치며 끼니를 시작했다. 박춘수와 나는 간짜장 소스를 면에 부었고 고보영은 깐풍기를 하나 집어 들고는 그대로 입안으로 쏙 밀어넣었다. 우리는 오래도록 매일 만나왔던 사이처럼 쉼 없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중 앞다투어 서로의 말을 잘라가며 했던 이야기는 각자의 취업면접 무용담이었는데 이를테면 이런 것들이었다 – 박춘수가 석유회사 최종 면접에서 질문 한번 못 받은 이야기, 고보영이 3만원인 줄 알았던 면접비가 10만원이라는 사실에 기분 좋게 집으로 돌아왔건만 알고 보니 그것이 출판사의 정직 테스트였다는 이야기, 내가 어느 유명한 사진작가의 보조작가의 보조 면접을 갔다가 받은 질문이라고는 ‘애도 볼 줄 아느냐?’는 것이 전부였다는 이야기 등이었다.


 식사를 끝내고 박춘수는 직접 내린 커피 위에 크림을 올리고 계피가루를 뿌렸다. 고보영은 조용한 박수로 환호했고 나는 바로 한 모금 마시는 것으로 그의 정성에 화답했다. 커피는 새콤쌉싸름하고 크림은 달달했다. 박춘수는 바로 자리에 앉으려다 말고 급히 침실로 가서 A3 크기의 노트와 새로 깎은 연필 한 자루를 가지고 나와 책상 위에 놓아두며 말했다.

 “자, 그럼 하나씩 정리 해 보자.”

 고보영이 눈을 반짝이며 두 손으로 커피가 담긴 유리잔을 감싸 쥐고는 맞은편에 앉은 박춘수를 향해 몸을 기대어 앉았다. 나도 팔짱을 낀 채 식탁에 기대며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아까 권세진 말을 좀 설명해 주면 이래.”

 그는 커다란 노트 위에 ‘화영개발’이라고 썼다.

 “내가 맡던 홍영 도시개발 심의 건이 권세진에게 넘어가고, 얼마 뒤에 익명의 제보자가 도시계획공사 감사실에 제보를 했다는 거야. 뭐, 나를 고발한건데. 요는 이래. 내가 홍영 도시개발에 대한 내부정보를 이 화영개발이라는 곳에 넘겼다는 거야.”

 일기장 속 박춘수는 말했었다. 감사실로부터 정보보안규정 위반을 이유로 징계를 받았노라고.

 “그리고 난 화영개발을 알지도 못해.”

 박춘수의 말에 권세진과 나눴던 그의 대화가 생각났다. 권세진은 박춘수를 위로한답시고 그에게 ‘작정하고 사기 치고 도망친 업체를 무슨 수로 찾겠느냐’고 말했었다. 화영개발이 그 사기를 쳤다는 업체인 듯 했다.

 “문제는 화영개발에 투자 사기를 당했다는 익명의 제보자가 그랬대. 화영개발이 도시계획공사 직원으로부터 받은 내부정보라면서 이야기를 흘리기에 그 말을 믿고 투자했다고 말이야. 그리고 그 직원이 나라는 거지. 화영개발이 증거도 없이 자취를 감추는 바람에 나는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형사처벌은 면할 수 있었는데, 이게 난 더 억울한 상황이 되었어. 죄는 있지만 마치 처벌을 면한 모양새가 되었거든. 어찌 되었든 회사 내에서는 징계를 받았지. 화영개발에 내부 정보를 넘겼다는 이유로. 물론 아니라고, 억울하다고 했지만 내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박춘수도 결국 사기를 당한 것 아니냐며 비아냥거리던 권세진의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증거가 나왔어요? 정보를 유출했다는? 그 화영개발도 못 잡았다면서요.”

 고보영의 말에 박춘수는 다시 커다란 노트에 ‘회사계정 이메일’이라고 적으며 답했다.

 “내 회사계정 이메일 주소로 내 회사 컴퓨터 바탕화면에 있던 홍영 도시개발 심의 검토자료 파일이 화영개발로 전송된 이력이 나왔어. 보낸 편지함에는 없었는데 정보보안팀에서 컴퓨터를 가지고 가서 조사해 보더니, 내가 메일을 보내놓고 이력을 삭제했다는 거야. 물론 그런 적 없어.”

 그 순간 번뜩이는 섬광이 머릿속을 가르며 지나갔다. 이용선. 예전에 이용선이 박춘수 집에 왔었을 때 박춘수에게 서울로 돌아가라며 어떤 아이디와 비밀번호가 적힌 쪽지를 건넸던 기억이 났다. 박춘수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나의 눈이 그와 마주치자 박춘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이용선이 나한테 준 그 쪽지에 적혀있던 아이디하고 패스워드가 내 회사계정이야.”

 “이용선이요? 춘수 삼촌도 이용선 씨 만난 적 있어요? 이 대리도 같이? 셋이서?”

 고보영이 문자 그대로 토끼 눈이 되어 나를 바라보며 물었고, 나는 바로 대답하는 대신 박춘수의 표정을 살폈고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응, 우리 집에 찾아왔었어. 재미있는 건 이용선이 은옥 아주머니를 죽였다고 증언하는 목격자들이 쏟아지기 전에. 이게 시점이 중요한 것 같아. 우리 집에 다녀간 이후로 갑자기 이용선이 은옥 아주머니를 죽였다고 사건이 극적으로 타살로 선회했거든. 여튼, 그때는 왜 이용선이 나한테 내 회사계정 아이디하고 비번을 주는 줄 이해못 했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걸 알려주려고 한 것 같아. 그 화영개발이라는 유령업체에 내 계정으로 메일을 보낸 사람이 이용선이거나, 혹은 이용선하고 관련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 그걸 알려주려고 했던 것 같아.”

 “이제 보니까 그때 이용선 씨가 그랬잖아요, 춘수 형이 억울한 일을 당한 건 알겠지만 돌아가라고. 그럼 이용선 씨는 알고 있다는 거 아니에요? 화영개발에 그 메일을 준 사람이 춘수 형이 아니라는 걸?”

 박춘수는 나의 말을 노트에 받아적으며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그런 것 같다 이 말이지.”

 “잠깐만요, 목격자가 쏟아지기 전에 이용선이 춘수 삼촌 집에 왔다는 거예요? 그게 왜 중요한데요? 은옥 아주머니 사건하고 연관이 있는 거예요?”

 고보영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박춘수의 말을 막아서자, 박춘수가 팔짱을 낀 채 오른손 엄지 손가락으로 자신의 턱을 쓸었다. 말이 없는 박춘수 대신 내가 고보영의 말을 받았다.

 “확실하진 않은데 너무 극적으로 바뀌었거든. 그 전엔 자살로 거의 확정이었어. 이견없이, 의심없이. 그런데 갑자기 그렇게 된거야. 그리고 그 목격자들이, 보영이 너도 저번에 진우한테 들었지만 그 은옥 아줌마 장사하던 건물에서 같이 장사하는 사람들이라고 그랬잖아. 그 사람들이 하 사장한테 건물 임대료 할인도 받았더라고. 뭔가 좀 찝찝해.”

 고보영의 얼굴 위로 그림자가 스쳐 지나갔다.

 “그럼, 이용선이 모함에 빠졌을 수도 있는 거야? 혹시...우리 아빠도 연관이 되어있을까”

 “아냐, 아직 아무 것도 확실한 건 없고 우리 추측일 뿐이니 너무 앞서서 걱정하지 말자. 그냥 지금은 은옥 아주머니 사건이 나하고 어떤 식으로든 관련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

 박춘수의 대답에 고보영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한동안 말없이 잔에 담긴 크림커피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박춘수는 마른 기침을 한번 하고는 말을 이었다.

 “상대가 하 사장이 아닐 것 같아.”

 “누구요?”

 무언가를 알고 있는듯한 눈빛으로 말을 뱉는 박춘수를 바라보며 내가 갑갑하다는 투로 되묻자 그가 개운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부터 알아봐야지.”

 “짚이는 사람이 있는 거예요?”

 나의 질문에 고보영은 내 어깨에 손을 살며시 올려놓으며 말했다.

 “이 답답아, 유 회장이지. 춘수 삼촌은 뭘 말을 그렇게 돌려해요. 각이 나왔는데.”

 고보영의 말에 내가 맞느냐는 투로 박춘수를 돌아보자 그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알아봐야지. 유 회장이라면 더 조심해야겠지. 그 사람을 잘은 모르지만 어쩐지 그래야할 것 같아.”

 일전에 매일홍영 창간호 기념식이 있던 늦은 밤에 사무실 앞으로 찾아왔던 은발의 유 회장이 떠올랐다. 그의 반짝거리던 롤렉스 시계와 매끈한 외제차, 그리고 박춘수를 향해 가감 없이 드러내던 불쾌한 낯빛의 날 선 눈빛도.

 고보영이 앞에 놓인 크림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그녀는 윗입술에 묻은 크림을 재빠르게 닦아내며 급작스레 한기를 느낀 듯 양팔로 자신의 몸을 끌어안으며 말했다.

 “어쩐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나쁜 일일까봐, 좀 겁난다.”     


 (수요일, 29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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