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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마나 Sep 23. 2020

29화. 둘이서

 “그래, 그럼 위원회 회의 때 보자.”

 박춘수의 짧은 인사를 뒤로하고 고보영을 따라 아파트 복도로 나서자 어느새 길고 느린 해가 저 멀리 운곡산 너머로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이제 집으로 가?”

 나의 물음에 앞서던 고보영의 발걸음이 느려졌다. 무언가를 생각하는 눈치였는데 그녀답지 않게 무얼 그리도 망설이는지 쉽게 말을 뱉지 못하는 듯 했다.

 “왜, 무슨 할 말 있어?”

 그제서야 고보영은 나를 향해 돌아섰고 눈을 마주보며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근처에 카페 있는데 들렀다 갈래? 멀진 않아.”     


     

 카페는 테이블 대여섯 개가 미로 같은 공간에 여기저기 숨듯 놓여있었다. 손님은 우리 말고도 두어 테이블 정도 있었는데 이야기 나누기에 적당히 시끄럽고 알맞게 조용했다. 우리는 주문을 마치고 가장 안쪽자리로 가서 마주 앉았다. 고보영은 애써 표정을 가다듬으려 노력했지만 불편한 마음을 쉬이 숨기지는 못했다. 미간은 시종일관 살짝 일그러져있었고 가녀린 어깨에는 힘이 잔뜩 들어가 있어 보는 내가 안쓰러울 정도였다.

 “뭔데, 편하게 말해봐.”

 나의 말에도 여전히 고보영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열심히 말을 고르고 생각을 다듬는 눈치였으나 평소의 그녀와 달리 망설이는 시간이 길어졌다. 박춘수의 집에서 보이던 활기찬 모습은 아주 먼 과거의 일인 양 영 딴판의 그녀 모습을 마주하니 나까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기다리는 것 외에 달리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주문한 음료가 나왔고 고보영은 음료의 삼분의 일을 비울 때까지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지쳐간다는 사실조차 잊을 만큼 시간이 흘렀을 때 그녀가 드디어 입을 뗐다.

 “덕구, 너는. 어때?”

 “응? 뭐가?”

 “박춘수 씨 이야기 말이야.”

 나를 이 대리가 아닌 덕구라고 부른 것도 낯설었지만, 방금까지만 해도 춘수 삼촌이라며 친근하던 그녀의 호칭이 박춘수 씨로 바뀌었다. 바뀐 것은 호칭만이 아니었다. 박춘수를 이야기할 때면 장난스럽고 호기심 넘치던 그녀의 표정도 전과 달리 어두웠다.

 “이야기면 뭐. 뭘 물어보는지 잘 모르겠는데.”

 “그러니까…, 박춘수 씨 말…. 넌, 다 믿어?”

 그녀의 그 짧은 말이 차갑게 날아들었다. 그 누구도 내게 박춘수를 믿느냐는 질문을 하지 않았다. 나는 그 핑계로 꾸준히 대답을 미룰 수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예기치 않은 순간, 예상치 못한 사람으로부터 그 질문을 마주하고 만 것이다. 다른 사람도 아닌 고보영이 고민에 고민을 삼키고 삭혀가며 던진 그 말을 피할 방도는 없었다. 그녀의 질문을 받아든 내 눈빛을 고보영은 피하지 않았다. 한동안 내 대답을 기다리던 그녀는 짧은 숨과 함께 고개를 떨구며 말을 이었다.

 “당장 대답하지 않아도 돼. 이렇게 말하는 나도 모르겠는데, 뭘.”

 이상한 일이었다. 나를 다독이듯 내뱉는 그녀의 말에 일순간 모든 것이 혼란스러워졌다. 그녀가 고심 끝에 건넨 그 말은 의심의 씨앗이 되어 내 마음 어딘가에 단단히 박혀버린 듯 했다. 그리고 마음 밑바닥 어딘가에서 낮고 조용한 음성이 ‘물론, 다 믿을 수는 없겠지’라며 그녀의 물음에 답을 내어놓고 있었다. 나는 내 안의 목소리를 떨치려 고보영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다행히도 그녀는 막상 말을 시작하자 마음이 조금씩 편해지는지 처음보다 한결 편안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처음에는 단순 호기심이라고 해야 하나. 궁금했거든. 도대체 누구길래 아빠며 아빠 주변 사람들이 저렇게 관심을 가지는지. 그런 사람과 가깝게 지내는 것 같은 내 또래의 너도 물론 궁금했고. 사실 너를 궁금해했던 이유는 아빠의 유례없는 칭찬도 한몫하기도 했지만. 여튼 그런데, 오늘 박춘수 씨하고 이야기하고 나니까 나는 어쩐지 좀 무섭다.”

 “왜?”

 나는 허공에 뱉어내듯 고보영을 향해 이유를 물었지만, 기실 그것은 고보영이 아닌 나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이었다. 도사리고 있는 줄조차 몰랐던 박춘수에 대한 의구심이 먼 곳에서 일기 시작한 불길처럼 소리없이 나를 향해 번져오고 있었다. 난 고보영이 그 불길을 붙잡아주기를, 멈추어 주기를, 그게 아니라면 어디로 향하는 불길인지라도 알려주기를, 그 순간 간절히 바랐다.

 “그렇잖아. 여기에 온 분명한 이유가 있잖아. 억울한 일을 당했다고는 하지만 그것도 박춘수 씨 이야기일 뿐이고. 박춘수 씨가 오해하고 있는 부분이 있을 수도 있고. 그리고 무엇보다 누구를 응징하든, 누명을 벗든 결국 그 사람 삶의 동력이 분노라는 것도 나는 어쩐지 불안해. 그리고.”

 “…그리고?”

 나는 애걸하듯 그녀의 다음 말을 구했다. 그녀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며 다음 말을 망설였다. 그녀의 눈에도 내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그녀의 얼굴이 종이처럼 잔뜩 구겨지기 시작했다.

 “아니야, 내가 괜한 말을 한 것 같아. 미안해.”

 늘 당당했던, 그래서 때로는 차가워 보이기까지 했던 그녀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안은 채 고개를 푹 숙였다. 하지만 이미 시작해 버린 대화였다. 나홀로 그녀의 다음 말을 상상하는 것은 너무나도 가혹한 일이었다.

 “아니야, 말해 줘. 그리고, 뭔데?”

 고보영의 말을 마주하기 직전까지, 단 한순간도 박춘수를, 그의 말을, 그의 행동을 의심해 본 적 없었던 나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박춘수가 나를 속였다는 어떤 이유도 근거도 없었지만 나는 이미 마음이 아팠다. 한편으로는 이럴 필요없다고, 아직 분명한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고보영의 괜한 노파심이나 불안일 뿐이라며 나를 애타게 다독여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서울 스튜디오에서 일할 때 팀장을 믿었다는 나의 말에 ‘니가 애냐, 아직도 사람을 믿게’라며 혀를 차던 같은 팀의 누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뭔데, 그냥 말해. 이미 시작했으니까 다 말해.”

 나도 어찌할 수 없이 목소리가 격앙됐고 그녀의 두 어깨는 무력감으로 흘러내렸다. 그러나 되돌릴 수는 없었다. 그녀의 말은 이미 엎어졌고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는 이상 나의 괴로운 상상이라도 멈추어 주어야 했다. 오직 그녀만이 할 수 있었다. 그녀 역시 지금 그녀가 해야 하는 일은 마음에 담았던 말을 모두 뱉어내는 것임을 내 표정을 통해 깨달은 듯했다.

 “그리고, 혹시… 우리한테도 의도적으로 접근한 건가, 그런 생각도 들어. 그냥 혹시나 하는 그런 생각.”

 “의도적으로? 어떻게?”

 “생각해 보면 박춘수 씨 입장에선 너나 내가 자기한테 도움을 주고 있는 게 사실이잖아. 그 사람이 여기 와서 혼자 무언가를 알아내려면 어려웠을텐데, 우리가 있으니까 한결 쉽지 않겠어?”

 “그건… 너무 나간 거 아냐? 내가 누군지 알고 우리 옆집에 의도적으로 이사를 왔다는 거야? 그리고 그 사람 우리 집 옆집에 이사 왔을 때 난 백수였어. 소식지에 들어간 건 그다음 일이고.”

 “뭐, 처음 계획에 우리가 들어있던 건 아니겠지. 지내다 보니 유용하다고 생각했던 건 아닐까. 그런데 박춘수 씨하고 처음에 어떻게 친해졌는데?”

 처음은 카메라였다. 그날 소식지로 아르바이트를 하러 나서는 집 앞에서 그와 마주쳤었다. 내 카메라 가방을 먼저 알아보고 아는 체했던 건 그였다. 그날 이후, 그는 내게 사진이며 카메라를 가르쳐 달라 했었다. 다음은 행복군민위원회 발족식이었다. 아르바이트생일 뿐인 나를 기자라며 추켜세워주었고 근로계약서를 쓰라는 조언도 그날 들었었다. 아무 것도 아닌, 기껏해야 이웃사람인 내게 근로계약서를 챙기라며, 이미 내가 기자라며, 나 자신을 소중히 여기라던 그의 말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모든 말들이 사실은 그가 계획해 놓은 계산의 일부일 수 있다는 추측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아렸다. 박춘수의 그런 말 덕분에 나는 소식지에 입사하여 대리도 될 수 있었고, 고보영도 만나게 되었고 엄마가 믿고 의지해 볼 수 있는 그런 아들도 되었는데 이 모든 것이 나를 향한 어떤 호의나 애정이 아닌 박춘수가 세워놓은 계획의 일부일 뿐일 수 있다는 사실에 나는 가슴이 뻐근해져 똑바로 앉을 수 없었다.

 “어떻게 친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박춘수 씨 입장에서는 네 덕에 경찰서 소식도 듣게 된 거고, 내 덕에 편집장이나 하재명 사장 이야기도 듣게 된 거니까. 나는 잘은 모르겠는데 그냥 아까 이야기 나누고 보니 그런 생각이 문득 들더라고. 너나 내가 박춘수 씨를 너무 믿고 있는 건 아닌지. 사실 그 사람 의도가 뭔 줄도 우리는 정확히 모르잖아. 왜 내려왔는지조차도. 일기장을 보여주기는 했지만, 그 사람 말을 온전히 믿는 것도 나는 사실 좀 겁이 나. 만약에 그 사람이 정말 잘못해서 내려온 거면 어떻게. 그 사람이 그냥 꼬인 사람이라서 자기가 잘못해 놓고 엄한 사람한테 복수하려고 드는 거면 어쩌느냐고.”

 “잠깐만.”

 나는 그녀의 말을 막아섰다. 견고하게 쌓여있다고 믿었던 박춘수를 향한 믿음의 벽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것을 망연자실 지켜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나는 잠시 눈을 감아야 했다.

 “고보영, 넌. 그러니까 넌… 박춘수 씨한테 믿음이 안 가는 거야? 그런데, 그런데 말야. 그렇다고 해서 춘수 형이 딱히 의심 갈만한 말을 하진 않았잖아. 앞뒤가 틀린 말이 있었어? 그렇게 따지면 믿을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어.”

 고보영은 숨을 토해내며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어루만지는 듯한 그 고요한 눈빛이 나를 더욱 서글프게 만들었다.

 “덕구야, 박춘수를 믿지 않는다는 게 그 사람을 의심한다는 뜻은 아냐. 심지어 아예 안 믿는다는 말도 아냐. 그냥, 혹시 모르니까 너무 믿지는 말자는 거야. 나는 군민위원회도 갈 거고, 박춘수 씨가 도와달라고 하면 어느 정도 선에서 도와줄 거야. 다만 너무 믿지는 말아야겠다는 말을 하는 거고, 너도 그랬으면 해. 그냥, 말 그대로야. 너무 믿지 말라는 거. 너무 마음도 주지 말고. 사실, 뭐. 우리가 박춘수 씨에 대해 아는 건 그 사람이 우리한테 한 말이 전부잖아.”

 적당히 마음을 준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 걸까. 누군가를 적당한 선에서 믿는다는 건 대체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내 마음은 아직 어른의 것만큼 복잡하지 못한 탓인지 고보영의 말처럼 누군가를 적당히 믿고 의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내게도 물론 사람을 믿은 내가 바보라며 후회한 적이 적지 않았다. 다시는 사람을 믿지 말자, 마음을 주지 말자, 어차피 사람이라는 것은 자기 잇속이 있어서 기회가 생기고 상황이 만들어지면 상대를 이용하려 드는 것이 본성이라고 수없이 되뇌이곤 했었다. 그러나 막상 마음을 주고픈 누군가와 관계를 맺어 나가기 시작하면 그런 다짐들은 물거품이 되곤 했다. 그 순간 나는 그 많은 다짐들을 모두 잊고 마는 것이었다. 삶의 경험들은 결코 어떤 교훈이나 거울이 되지 못하고 또다시 반복되는 것이었다. 여전히 누군가 믿고 싶은 사람이 생기면 나는 온전히 믿고 마는 것이었다. 그러다 이런 순간을 맞이할 때야 이번에도 또 내가 실수를 하고 말았구나, 바보짓을 하고 말았구나 하고 후회를 하는 것이었다. 그럴 때면 이미 주어버린 마음을 거두는 일은 온전히 내 몫이었고 그것은 매번 고통스러웠다. 되풀이될수록 그 고통은 익숙해지기는커녕 배가 되곤 했다. 그렇게 마음의 후회를 안고 상대를 보게 되는 날이면, 상대의 표정이 내 마음에 인 변화를 눈치채지 못하고 평소와 다름없이 여전히 온화하고 따뜻할 때면 괴로움은 또다시 온전히 내 몫이 되곤 했다. 그리고 나는 그 고통을 피하고자 의심을 거두어 상대를 또다시 믿었고 마지막에 가서 결국 후회하게 되는 것이었다. 박춘수도 마찬가지일까. 그런 가정만으로도 나는 온몸의 힘이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것은 내가 그를 얼마나 온전히 믿고 있었는가에 대한 반영이었다. 사무실 내 자리 곁을 지키고 있는, 박춘수가 내게 준 올리브 나무가 떠올랐다. 마음의 평화를 바란다는 그의 말도, 내 등을 두들기던 그의 손바닥 온기도, 나를 대견하게 바라봐주던 눈빛도 박춘수처럼 철두철미한 사람이 만들어 낸 하나의 계산일 수 있다는 가정만으로도 충분히 내 마음은 지옥이 되었다. 할 수만 있다면 박춘수에게로 달려가 고보영과 나눴던 말들을 전하며 정말 그런 의도로 나를 곁에 둔 것이냐 묻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를 향한 의심의 싹이 이미 돋아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금요일, 30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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