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읽었나.”
내가 고개를 들어 박춘수와 눈을 마주치자 그가 물었다. 먼저 읽고서 베란다 밖을 바라보던 고보영이 박춘수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세영이는 누구예요?”
고보영의 갑작스런 물음에 박춘수는 일순 당황한 듯했으나 그도 고보영의 돌려말하는 법 없는 화법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는지 이내 슬쩍 웃으며 답했다.
“아, 여자친구. 지금은 헤어졌고. 사내연애.”
“퇴사하면서 헤어진 거예요?”
“음, 퇴사의 과정에서 헤어졌다고 해야 정확하겠네. 비밀연애였어.”
“그렇구나.”
고보영은 그 이후로도 별다른 말이 없었다. 나도 달리 할 말이 없었다. 평소 보았던 그의 말투와 조금은 달랐던 일기장을 보니 새로운 그를 만난 듯도 했고, 다른 일기도 궁금해졌다. 종이 뭉치 두께를 보았을 때 매일은 아니어도 꼬박꼬박 일기를 써 왔던 것 같은데 자신의 감정을 돌볼 겨를 없었던 그 시절 이전과 홍영으로 내려온 이후 그의 일기는 어떤 내용일지도 궁금해졌다. 하지만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우리 두 사람이 별다른 말이 없자 박춘수는 충분히 이해한다는 뜻으로 고개를 서너 번 끄덕이더니 냉장고로 향하고는 미리 사 두었는지 초코 쿠키를 꺼내왔다.
“준다고 샀는데 너무 달진 않을까 싶기도 하고. 먹어 봐.”
그렇게 그가 포장지를 뜯으려는데 초인종이 울렸다.
박춘수의 일기장을 읽으며 멍해져 있던 고보영과 나는 예상치 못한 벨소리에 정신이 번쩍 든 듯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서로를 마주보았다. 박춘수도 멀뚱거리며 인터폰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택배인가. 내가 뭘 시켰나.”
인터폰으로 가까이 다가서기도 전에 초인종이 성급하게 한번 더 울렸다. 인터폰 액정 속 얼굴을 확인한 그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리고는 우리를 돌아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너희도 아는 사람이긴 한데, 같이 보는 건 좀 그렇고. 괜찮으면 저쪽 내 방에 들어가 있을래. 금방 돌려보내지 뭐. 문전박대는 좀 그렇고.”
그 말에 고보영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고 나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그녀를 따라 일어났다. 일어서는 내게 박춘수는 종이뭉치와 함께 그의 일기를 함께 챙겨 내게 건네주었다. 나는 그가 주는 일기뭉치를 품에 받아들고 오동나무 각목을 짜서 만든 근사한 침대가 있는 그의 침실로 들어갔다. 박춘수가 문을 닫자 나는 일기뭉치를 침대 위에 올려두고는, 재빨리 문에 등을 바짝 기대고 앉아 귀를 쫑긋 세웠다. 그러자 고보영이 내 어깨를 살짝 치며 속삭이듯 말했다.
“야, 그렇게 딱 붙어있으면 움직일 때마다 소리날 수도 있어. 이만치 떨어져서 앉아. 그래도 다 들려.”
나는 고개를 끄덕거리고 그녀가 하라는 대로 팔길이만큼 문에서 떨어진 그녀 옆자리에 앉았다.
이윽고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놀랐네.”
박춘수의 목소리였다. 뒤이어 귀에 익은 목소리가 답했다.
“진짜 여기 사셨네요. 오면서도 긴가민가했는데.”
기억이 날 듯 말 듯한 아리송한 말투에 내가 고보영을 바라보며 눈썹을 추켜올리자 그녀가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권세진같은데?”
그녀의 귓속말 때문이었는지 권세진이라는 말 때문이었는지 순식간에 닭살이 돋는 바람에 나는 두 손바닥으로 양팔을 문질렀다. 내 모습에 고보영이 자신의 입술 위로 집게손가락을 가져다 대며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였다.
“주소는 어떻게 알고?”
“아, 이재우 주무관한테 부탁 좀 했죠, 군민위원회 연락처 목록에 있더라구요. 기분 상하신 건 아니죠?”
권세진으로 보이는 목소리가 박춘수의 거실로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역시 우리 박 과장님. 맥주하고 계셨어요? 혼자 벌써 세 병을 따신 거예요? 아니면... 손님이 오셨던건가?”
“권 대리같은 깜짝손님이 오늘따라 있네.”
“에이, 대리 아니고 권 과장이요, 저 승진한 지가 언젠데… 그런데, 깜짝 손님이면 누구요? 저도 아는 사람이에요?”
볼 수는 없었지만 그의 뱀 같은 두 눈이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그나저나 웬일이야.”
박춘수가 답을 않고 말을 돌리자 권세진이 의자에 풀썩 앉는 소리가 들렸다.
“저번에 우연히 만난 것도 있고, 여기에 박 과장님 계신 줄 알면 진작에 와 볼걸 그랬다는 생각도 들어서요. 그냥 혹시나 하고 왔는데 계시네요. 잘 지내셨죠?”
그의 가벼운 안부 인사에 박춘수는 말이 없었다. 조금 전 보았던 박춘수의 일기를 떠 올리자 권세진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말투로 건네는 안부가 저열해 보였다.
“나 이제 박 과장 아니니까 편하게 불러. 정 호칭이 필요하면 박 위원님이라고 하든지.”
박춘수가 의자에 앉으며 답을 했다.
“이건 뭐예요? 음, 맛있다. 여기에 이런 것도 파는가봐요.”
아까 우리를 주려고 샀다는 쿠키를 권세진이 오물거리는 모양이었다. 고보영도 약이 올랐는지 주먹으로 무릎을 쾅 내려치는 시늉을 했다.
“무슨 일이야."
박춘수는 권세진에게 틈을 주지 않았다. 그도 권세진도 상대가 보고 싶어 이리 마주한 것은 아닐 테니 시간 낭비 말자는 투였다. 고보영은 무슨 스포츠 중계라도 듣는 것처럼 박춘수의 대꾸에 양손 집게손가락을 마주 치며 침묵으로 환호했다. 권세진의 말을 듣자니 약이 오르고 눈앞의 고보영을 보고 있자니 웃음이 나와서 나는 참으로 이상한 기분으로 문 저편에서 들려오는 두 사람의 대화에 집중하려 노력했다.
“박 과장님, 아니 박 위원님. 아니 오늘은 박 과장님이라고 하죠. 하하. 성격 안 변하셨네.”
박춘수는 이제 대꾸조차 없었다. 두 사람 사이를 꽉 채운 긴장감에 나까지 갑갑해졌다.
“그러니까 그, 뭐였죠? 아, 그 화영개발, 거기 찾으러 여기 홍영 오신 거예요?”
권세진의 말투에 긴장이 묻어났다. 태연한 척 했지만 숨길 수는 없었나보다.
“화영개발?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는 회사를 내가 왜 찾는다고 생각하는데?”
박춘수가 바로 받아치는 말에 권세진은 말이 없었다. 한참 만에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생각해 보면 저도 안타까운데 지금 이런다고 날라버린 놈들을 잡겠어요? 작정하고 덤빈 놈들인데.”
박춘수가 빈 웃음을 헛기침처럼 몇 번 내뱉고는 답했다.
“화영개발 찾자고 온 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고. 어차피 찾을 필요가 애초에 없었던 회사니까.”
“그래요? 아, 그래도 박 과장님도 사기당한 셈인데.”
권세진이 혼잣말처럼 뱉었으나 차갑게 내리꽂는 말투에서 어딘지 모르게 다분한 의도가 느껴졌다. 박춘수는 잠시 말이 없었다. 둘이 어떤 눈빛을 주고받고 있는지,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있기는 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사기 당했지. 그런데 권 과장이 아는 사기는 아니고. 어느 놈한테 사기당했는지는 두고 보면 알겠지. ....아, 도와달라고 하면 도와줄 거지?”
권세진은 별말이 없었다. 고개를 끄덕였는지 바로 박춘수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 고맙네. 내가 권 과장 미리 오는 걸 알았으면 좋았을 텐데. 그럼 다음 주 군민위원회에서 보게 되나?”
“그러죠. 저도 약속이 있어서 나가려던 참이었어요.”
두 사람의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바닥에 툭툭 신발 앞코를 내려찍으며 신발을 신는 권세진의 소리도 들렸다. 이윽고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고, 뒤이어 두 사람이 인사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 다음 주에 보자고.”
“네. 그나저나 잘 지내시는 것 같아 다행이네요.”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박춘수의 느릿느릿한 발소리가 들렸다. 고보영과 나는 눈을 마주쳤고 고보영이 손잡이를 잡으려다 다시 손을 내려놓았다. 이윽고 방을 향하는 박춘수 발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고, 그 뒤엔 박춘수의 환한 얼굴이 우리를 향해 웃고 있었다. 생각지 못한 그의 표정에 우리 두 사람이 당황하는 사이 박춘수는 재빨리 몸을 움직여 회의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핸드폰을 집어들고는 우리를 향해 물었다.
“깐풍기, 탕수육, 그리고 또 뭐?”
느닷없는 그의 질문에도 고보영은 스피드 퀴즈라도 푸는 것 마냥 재빨리 답했다.
“간짜장이요!”
박춘수가 나를 돌아보았다.
“…뭐, 저도 간짜장.”
박춘수는 피아노 건반을 치듯 경쾌하게 연락처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아, 네 운곡맨션 802호인데요, 깐풍기 하나, 간짜장 셋, 아, 팔보채도 하나 주세요. 네네, 맛있게 부탁드립니다.”
고보영과 나는 여전히 그의 침실 문지방 언저리에 앉아 기분 좋게 주문을 마친 박춘수의 만족스러워하는 표정을 지켜보고 있었다. 고보영은 이유를 아는지 모르는지 슬며시 얼굴에 미소가 걸렸고, 나도 그런 박춘수의 모습을 보자니 다행이다 싶어 미소가 지어지려다가도 영문을 알 수 없어 어정쩡한 표정을 지었다.
“나와, 왜 그러고 있어.”
고보영과 내가 몸을 일으켜 거실로 나가자 박춘수는 무엇이 그렇게 재미있는지 웃음보가 터졌다.
“크크크크, 하하하하"
웃는 그의 모습을 보자 나와 고보영의 입술도 씰룩거리기 시작했고 그렇게 여전히 영문도 모르는 채 우리 셋은 한참을 웃었다. 그것은 참으로 진귀하고 기이한 경험이었다. 박춘수는 눈물까지 글썽거리다 표정을 가다듬으며 물었다.
“너흰 왜 웃었어?”
“이 상황이 웃겨서요. 다 큰 어른 둘이 방에 숨어서 어른들 대화 엿듣다가 방에서 기어나오는 상황.”
고보영이 답하자 박춘수는 정답을 맞췄다는 듯 웃어보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저는, 그냥 두 사람이 웃으니까 웃겨서.”
박춘수가 고개를 깊이 끄덕거리며 싱긋 웃었다.
“나는 두 가지 때문에 웃었어. 하나는 고 주임이 말한대로 이 상황이 웃겨서 웃었고. 그리고 두 번째는.”
그는 이번에는 소리내어 웃는 대신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옅게 미소 짓더니 말을 이었다.
“권세진이 여기까지 찾아와야할만큼 똥줄이 탔다는 게 재미있어서 웃었어.”
“왜요? 표정이 그랬어요?”
고보영이 묻자 박춘수가 답했다.
“그러게 말야. 왜 그랬는지 이제 차차 보면 알겠지. 두 사람은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군민위원회 꼭 오기야. 참, 우리 고 주임님. 이제 고 주임님이 알고 있는, 내가 홍영에 내려온 이유를 말씀해 주셔야지.”
박춘수의 말에 고보영이 눈을 반짝이며 살며시 웃었다.
(금요일, 27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