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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마나 Sep 07. 2020

22화. 때가 되었다.

 “고보영!”

 정신을 차리고 이름을 외쳐 부르며 멀어지던 그녀의 뒷모습을 향해 달려갔다. 고보영이 우뚝 멈춰서더니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사무실로 들어갈 거야?”

 “그게 무슨 말이야? 이용선 씨가 하 사장 밑에서 일한 지 20년인 게, 그게 뭐. 그게 무슨 뜻인데?”

 이용선이 저질렀다는 두 개의 살인사건이 모두 하 사장 밑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면 그 둘을 비교해 보자던 박춘수의 말을 떠올리며 나는 물었다. 그런 박춘수의 속을 알 리 없는 그녀가 의미심장한 미소로 왜 그 사실을 알려준단 말인가. 마치 선물이라도 하는 듯.

 고보영이 나의 물음에 눈을 가늘게 뜨더니 희미하게 웃어 보이며 내게 한걸음 가까이 다가섰다. 그리고는 한동안 내 눈을 빤히 응시하더니 재미있다는 듯 코로 숨을 뱉어내며 미소 지었다.

 “내가 술에 취했다고 아무 말이나 하는 건 아니야. 저번에 그랬잖아. 박춘수 씨가 왜 홍영에 내려왔는지 먼저 말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나도 그걸 알아야 도울지 말지 결정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방금 내가 그 말을 한 건, 뭐랄까. 어필을 한 거야. 나라는 사람이 도움 될지도 모른다는. 그러니까 잘 생각해 보고 결정하시라고 해.”

 나는 잠시 박춘수나 내가 실수로 무슨 말을 했었던가, 떠올려 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에게 흘린 말이 없다. 그렇다면 편집장에게 무슨 말이라도 들은 것일까. 그러나 편집장은 나와 박춘수가 무슨 연유로 은옥 아주머니 사건을 다시 알아보고 있는지 알 리 만무하다. 은옥 아주머니 사건은 단서일 뿐 이용선이 박춘수 집에 왔다 갔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그 자리에 있던 우리 세 사람뿐이다. 이용선이 하 사장에게 말하고, 하 사장이 그걸 다시 편집장에게 말하고, 그걸 다시 고보영이 들었다고 생각해 봐도 현실성이 낮다. 어찌 되었든 고보영이 우릴 도울 이유는 없지 않은가. 굳이, 도울 이유가 없지 않은가.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내가 생각에 잠긴 사이 고보영은 오른발 끝을 땅에 툭툭 치며 그런 내 모습을 내내 지켜본 모양이었다. 그녀의 물음에 정신이 든 나는 표정을 가다듬었다.

 “아니, 그게 그러니까, 춘수 형이 홍영에 내려온 이유가 왜 궁금한데. 그러니까…그게 왜….”

 내가 말끝을 흐리자 그녀의 표정이 점차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오늘도 어제도 아닌 아주 먼 옛날 어딘가의 괴로웠던 기억이 그녀에게 달겨든 듯 그녀는 가볍게 몸서리치듯 고개를 젓고는 시선을 발끝에 둔 채 답했다.

 “잘은 모르지만 박춘수 씨가 억울한 일을 당한 것 같아서. 그냥, 도와주고 싶어서. 억울한 일 당하는 거 싫잖아.”

 그녀의 말에 내 머릿 속은 더욱 어지러워졌다. 이용선이 박춘수에게 그날 밤 건넸던, ‘억울한 일’이라는 말이 섬광처럼 기억을 뜷고 날아들었다. 자기가 당한 일이 왜 억울한 일이냐며 이용선에게 되묻던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박춘수 스스로도 그 일의 전개와 이유를 모른다는 뜻인데 어떻게 고보영이 이를 안다는 것인가. 그리고 그냥 도와주고 싶다니. 박춘수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도대체 왜.

 “그리고.”

 고보영이 조용히 말을 내어놓고는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빛나는 두 눈이 나를 멀게 바라보고 있었다.

 “너가 박춘수 씨 많이 아끼잖아. 은옥 아주머니도 많이 아끼고. 그냥 그래서. …취재 있니? 난, 바로 사무실로 들어가려고. 그럼. 먼저 갈게.”

 그녀가 내 팔을 가볍게 툭 치고는 다시 돌아서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너한테 입장료 받아야겠다. 너무 자주 오는 거 아냐?”

 박춘수가 손에 무언가를 든 채 침실에서 나오며 말했다. 그가 테이블 위로 무언가를 툭 던져놓았다.

 “간 김에 샀어. 너도 입어.”

 검은 비닐봉지 안에는 남자 속옷 세 벌이 들어있었다.

 “에이, 뭐예요. 제 사이즈도 모르면서. 그리고 무슨 남자끼리 속옷이에요.”

 “야, 인마. 내가 너보고 사귀자고 했냐. 감사합니다 하고 90도 인사를 해도 모자랄 판에 무슨. 취향을 몰라서 회색으로만 샀어. 일부러 제일 비싼 걸로 샀어. 참고로 내꺼랑 같애. 하하.”

 “아이!”

 질색하는 내 표정이 재미있다는 듯 박춘수는 평소답지 않게 가볍게 껄껄거리더니 냉장고로 가 콜라 두 캔과 황태포를 꺼내왔다.

 “그래서, 오늘 고 주임하고 셋이서 본 거냐?”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도 나를 따라 고개를 끄덕거렸다. 황태포를 하나 집어 입으로 밀어넣고는 질겅거리더니 콜라를 한 모금 들이켰다. 참으로 희한한 음식 조합이다.

 “나도 오늘 속옷가게 가서, 요즘 기분 좋으시다던 그 이 씨 사장님을 만났거든. 간 김에 재미있는 이야기도 듣고. 속옷을 비싼 걸 사서 그런가. 잘해주더라.”

 나도 황태포를 하나 집어 들었다. 입안으로 밀어 넣자 냉동실에 보관했었는지 찬 기운이 입안에 퍼졌다.

 “만둣집 있던 자리에는 카페가 들어서는지 인테리어 공사가 한창이더라. 그 속옷가게 사장한테 말했거든. 가게 하나 내보려고 동네 알아보고 다니다 저번에 만둣집 자리가 비었길래 알아보려고 했다고. 그런데 그 사이에 가게가 나갔다고 너스레를 좀 떠니까, 그런가보다하고 별 대수롭지 않게 듣더라. 그러다 그랬지. 가게 내려고 알아보니까 만둣집 주인이 사고를 당했다면서요라고. 그랬더니 살짝 당황하더라고. 자기가 죽인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당황하나 싶더라. 그러다 내가 자기를 의아하다는 듯 보니까 스스로 느끼기에도 자기 행동이 어색해 보였는지 말을 쏟아내더라고. 죽인 놈이 원래부터 이 동네에선 형편없는 주제에 거들먹거리기로 유명한 놈이었는데 얼굴 반반한 여자한테 집적거리다가 잘 안되니까 결국 일을 쳤다고. 내가 만둣집 사장님 죽인 사람을 아느냐고 물었더니 고개를 끄덕끄덕하더라고. 물론 시선이야 다른 곳을 향하고는 곧바로 말을 돌렸지만. 거기에서 더 물어보면 경계할 것 같아서 나도 거기에서 말았어. 그러다가 내가 지나가는 말처럼 그랬어. 그런 살인사건이 같은 건물에서 나서 한동안 손님 없어서 좀 힘드셨겠어요. 월세도 비쌀 것 같은 데라고. 그랬더니 안 그래도 임대인이 행여 그럴까봐 여기 입주해 있는 점포들 전부 임대료를 좀 깎아줬다는 거야. 임대인이 보기 드물게 좋은 사람이라고. 나한테도 이왕 가게를 얻을 거면 그 사람 건물을 한번 알아보더라고 그러더라. 홍영에 많다고. 그러면서 하재명 사장 연락처를 주더라고. 아래 일하던 사람은 사정이 생겨서 요즘엔 하 사장한테 직접 연락한다면서 말이야.”

 박춘수는 한참 동안 속옷집에 다녀온 이야기를 늘어놓다 별안간 하던 말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다. 무언가를 알아듣고 무릎이라도 쳤어야 하나 생각에 잠에서 깬 것처럼 눈썹을 추켜세우자 그가 웃었다.

 “임대료 절감을 속옷사장만 해 준 게 아니라 이거지. 그 건물에 있던 사람들을 다 해줬다거나 아무리 못해도 몇 집을 더 해줬다는 뜻인데.”

 박춘수가 그렇게 말을 보태자 별안간 오늘 낮 진우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 ‘다행히 그 건물 사람들이 용기 내어 진술을 해 줘서 수월하게 잡았어.’ 내 표정을 살피던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혹여라도 말이야. 그 목격자들이 다 그 건물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이라고 하면, 이상한건가 아니면 그 반대인건가. 그게 자연스러운건가.”

 나는 마른 침을 꼴깍 삼켰다.

 “진우가 그러는데, 첫 번째 살인사건은 십여 년 전이었고, 고보영이 그러는데 이용선 씨는 하재명 사장 밑에서 이십 년 가까이 일했다고 그랬어요. 그리고.”

 내가 말을 멈추자 박춘수가 숙였던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건물 사람들이 진술을 해 줬다고….”

 박춘수는 말이 없었다. 순간 겁이 덜컥 났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은옥 아주머니 사건에 앞장 서 진술했다던, 그 본 적도 없는 이들에게서 어떠한 선의도 느껴지지 않았다. 막연한 불신 때문이었는지, 그들이 월세를 감면받았다는 사실 때문이었는지, 그도 아니라면 같은 건물에 가게를 두고 살아가던 그들도 결국 시장 사람들처럼 은옥 아주머니를 죽음으로 내몰았던 공범일지도 모른다는 원망 때문이었는지 나는 그들이 갑자기 용기를 내었다는 그 진술이, 그 진술 덕에 누리고 있다는 경제적 안도가 어쩐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말야.”

 박춘수가 입을 열었다. 혼잣말처럼 어렵게 터지듯 새어 나온 그의 음성은 전에 없이 낮고 음울했다. 그의 시선도 창밖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늦은 저녁의 불빛들이 가끔 그의 창밖을 오갔다.

 “기본적으로 사람들의 선의를 믿지 않아. 더군다나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사이의, 그 어중간한 인간관계에서 일어나는 선의는 더욱 믿지 않아.”

 그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그의 얼굴 위로 한꺼번에 시간이 내려앉은 듯 전에는 보이지 않던 주름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 속옷가게 주인 말이야. 은옥 아주머니가 안 됐다는 말은 단 한 마디도 없었다. 죽인 놈이 얼마나 형편없는 놈인지에 대해서만 말했어. 멸시가 느껴졌달까. 내가 무리하게 넘겨짚은 것일 수 있겠다만. 그 사람이 했다는 그 진술이란 건 최소한 선의는 아니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런데 선의 없는 진술이 여럿에 의해 그것도 동시에 이루어졌다면 좀 이상하지 않냐. 그리고 그때 봤던 이용선 씨가 내 눈엔 그렇게까지 개차반으로 보이지도 않았다.”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은옥 아주머니의 죽음 이후, 모든 것이 부자연스러우리만치 어색하고 일사천리가 아니었던가.

 “다음엔 고보영하고 같이 올게요.”

 “응? 갑자기 무슨 말이야. 고 주임은 왜?”

 “말해주세요. 왜 여기 홍영에 내려왔는지. 저도 이젠 알고 싶어요.”

 박춘수가 멍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럴 때도 됐다.”     

(수요일 ,23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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