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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마나 Oct 07. 2020

32화. 좋아해도 멀어지는, 그런 애꿎은 사이


 “이 대리님, 그럼 소식지에는 언제 실리나요?”

 동그란 안경 속 동그란 눈을 가진 담당자라는 내 또래의 여자는 나와 마주 선 채로 내 눈을 뚫어지라 바라보며 물었다.

 “내일 바로 실릴 겁니다.”

 “오, 진짜 빠르네요. 그러면 혹시, 하드카피 소식지도 받아볼 수 있을까요? 보고용으로 하나 챙겨두면 좋을 것 같아서.”

 “아까 주신 명함 주소로 내일 3부 보내드릴게요. 혹시 더 필요하세요?”

 담당자는 환하게 웃으며 내 얼굴 앞으로 두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아뇨, 그거면 됐어요. 홈페이지에서 봐도 되는데 그냥 손에 쥐고 본다는 게 좀 다르잖아요. 하하”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그러나 그녀가 기대했던 것보다 내 반응이 영 시원찮았던 모양인지 그녀는 일순 웃음을 거두고 민원인을 응대하는 직장인의 말투로 돌아가 내게 말했다.

 “그럼 오늘 수고하셨고요, 권 과장님은 내려오신다고 했으니 잠시만 기다리시면 됩니다. 그럼 조심히 들어가세요.”

 서로에게 허리를 꾸벅 숙여 인사를 건네고 그녀는 사무실로 돌아갔고 나는 건물 입구에서 이리저리 서성이며 권세진을 기다렸다. 정오가 가까워 오자 점심을 먹기 위해 어디론가 향하는 사람들이 점점 불어나기 시작했다. 하나같이 초록색 줄에 묶인 사원증을 목에 걸고서 어디론가 향하는 왁자지껄한 사람들의 무리와 마주치는 것이 부담스러워 나는 현관을 나와 입구 쪽 건물 밖으로 비켜서서 그를 기다렸다. 건물에서 쏟아져나오는 사람들을 보며 박춘수도 저 중 하나였을 것이라 생각하니 나는 어쩐지 박춘수가 안쓰러워졌다. 아무리 애를 써 보아도 그가 저 무리 중 하나였다는 사실을 상상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박춘수는 홍영에서도 이방인이지만 십여 년을 다닌 회사에서도 지금과 다름없이 이방인이었을 거라는 생각에 나는 마음이 쓸쓸해졌다.

 전화기가 울렸다. 권세진이었다.

 “이 대리님, 저 현관인데요. 어디 계세요?”

 “아, 사람이 북적여서 건물 밖으로 나왔습니다. 입구 바로 왼쪽에 있어요.”

 “아, 네네.”

 이윽고 그가 모습을 드러냈다. 무언가에 잔뜩 집중했었던 모양인지 얼이 반쯤 빠져있는 낯선 얼굴이었다.

 “많이 기다리셨어요? 생각보다 일찍 끝나셨네. 저도 막판까지 일 좀 하느라. 저쪽 주차장으로 같이 가시죠. 차를 같이 타고 이동하실까요 아니면 각자 타고 갈까요? 이 대리님은 어느 편이 덜 번거로우시려나.”

 “점심 먹고 바로 사무실 들어가 봐야해서, 저는 제 차로 이동하겠습니다.”

 “네네, 그러시죠. 그럼 제가 위치 보내드릴 테니까 거기로 찍고 오세요. 육개장 괜찮죠?”          

 식당은 생각보다 차로 한참을 달려야 도착하는 시 외곽의 작은 가게였다. 가게로 들어서니 좁을 거라는 예상과 달리 테이블이 몇 개 없는 덕에 자리가 제법 널찍해 보였다. 권세진은 가장 안쪽에 먼저 자리를 잡고서 주문을 하고 있었다. 아주머니가 주문을 받고 자리를 비키자 나는 권세진의 맞은편으로 가서 앉았다.

 “여기 와 보셨어요?”

 권세진이 내게 물을 따라주며 물었다.

 “아뇨, 처음 와 보는데 맛집같네요. 분위기가.”

 “이 대리님은 쭉 홍영에 계셨어요?”

 “아뇨, 그건 아니고.”

 “홍영이 고향이세요?”

 “네.”

 나의 대답에 권세진이 가볍게 고개를 몇 번 끄덕였다. 이렇다 할 것 없는 시시콜콜한 대화 뒤에 이어진 짧은 침묵은 생각보다 견디기 힘들었다.

 “권 과장님은 고향이 어디세요?”

 “저요? 전 서울이요. 이 대리님은 그럼 지금 부모님이랑 같이 사시는 거예요?”

 “아, 어머니만.”

 나의 대답에 권세진이 짐짓 놀란 채를 해 보였다. 굳이 그럴 것까지는 없는데 무슨 이야기를 하려 저런 표정을 짓는지 마음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형제는요?”

 “네? 아, 저 외동입니다.”

 “하하.”

 이런 개인사를 다른 누군가에게 말하게 되는 순간이면 상대의 반응은 대개 둘 중 하나로 갈린다. ‘그럴 수도 있지’라며 대수롭지 않게 반응하려 애쓰는 사람, ‘참 힘들었겠구나’라며 되지도 않는 안쓰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는 치. 권세진의 반응은 좋게 말하면 새로웠고 솔직하게 말하면 기분 더러웠다. 웃다니. 그리고 이렇다 할 말도 없다니. 어머니와 단둘이 자랐다는 내 말에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는 저 여유로이 물을 따르는 저 작태를 무어라 이해해야 할지, 불쾌한 생각에 정신마저 핑 돌았다. 얼굴 전체가 불그레하게 달아오르려는 찰나, 권세진이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렇게 동지를 만나니 기분 이상하네요. 저도 저희 어머니랑 둘만 살았어요. 오랫동안, 어릴 때부터.”

 이상한 일이었다. 뱀 같은 눈알을 굴려 가며 어디를 보는지, 무슨 생각을 머리 뒤편에 숨겨두고 있는지 도통 알 수 없다고 생각했던, 신뢰라고는 조금도 가지 않던 그의 눈빛이 그의 말과 함께 오랜 세월을 한데 버무려진 듯한 깊은 눈빛으로 바뀌었다. 내가 아무 말이 없자 별일 아니라는 듯 그가 입을 열었다.

 “우리집은 이혼이었는데, 이 대리님은요?”

 “저는, 처음부터 안 계셨어요. 돌아가셔서.”

 “그렇구나.”

 그를 만난 것은 몇 번 되지 않았지만 그런 표정은 처음이었다. 차디찬 바람이 얼굴 위를 쓸고 지나간 것처럼 그의 낯빛은 차가웠고, 무표정했다.

 “하나 물어봐도 돼요?”

 권세진은 망설이는 얼굴로 내게 조심스레 말했다. 지금껏 툭툭 던져놓듯 내 이야기를 묻고 자신의 이야기를 건네던 표정과는 사뭇 달랐다. 내가 답이 없자 그가 말을 이어나갔다.

 “하하, 좀 웃긴 이야긴데. 궁금하더라고요. 아버지가 처음부터 없는 기분은 어떨지. 난 차라리 없었으면 했거든. 이건 뭐,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니까 차라리 없든 있든 둘 중에 하나만 했으면 좋겠더라고. 그래서 궁금했거든요. 아버지가 차라리 아예 없는 것도 뭐랄까, 증오? 뭐 그런 게 있는지.”

 맥락 없게도 그 순간 나는 박춘수를 떠올렸다. 지금, 이 순간, 내게 저 말을 하는 이가 권세진이 아니라 박춘수였으면 좋았겠다는 그런 생뚱맞은 생각. 단지 어머니와 둘이 생을 살아왔다는 단 하나의 공통점이 그와 내가 마음을 터 이야기를 나눌 이유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그간 그를 만나왔던 아주 처음부터 권세진 그를 향해 별다른 고민 없이 일관되고 안정적으로 유지해 오던 경멸이 그 순간 연민으로 변해버리는 그 기분이, 나는 싫었다.

 “없어요. 만나봤어야 있죠.”

 없을 리 없었다. 권세진이 원했던 대답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구태여 내 이야기를 더는 하고 싶지 않았다. 복잡하게 밀려드는 생각을 쳐 내려 차갑게 대답을 건넸을 뿐이었다. 이런 내 마음을 권세진이 알든 말든 상관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차마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볼 수는 없었다. 때마침 주문한 육개장이 한 그릇씩 그와 나의 앞에 놓였다.

 “잘 먹겠습니다.”

 나는 육개장 한 숟가락을 크게 떠 후후 불었다. 나는 그를 보지 않았지만 여전히 내 시야 안에 있던 그는 그런 나를 내내 바라보고 있었다.

 “박춘수 위원님하고는 회사 다닐 때 같은 팀이라고 하셨죠?”

 갑자기 뱉어낸 말은 아니었다. 물론 박춘수를 빌어 원치 않는 대화를 피해 보려 한 이유가 없지는 않았으나, 권세진의 입을 빌어 박춘수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은 애초의 목적 때문이었다.

 “네, 왜요?”

 짧게 대답을 마친 권세진도 육개장 그릇에 코를 박고 크게 한 숟가락 떠 입안으로 밀어넣었다.

 “아, 어떤 분이셨는지 궁금해서. 아까 회사 사람들 보니까 생각이 나더라고요.”

 그가 입을 우물거리며 한동안 나를 바라보았다. 꿀꺽 음식을 삼킨 그가 엷게 웃으며 물었다.

 “왜요, 직접 물어보시지?”

 원래 불편할 법한 이야기를 저렇듯 대 놓고 묻는 사람이었던가. 아닐 테다. 저번에 하 사장이나 다른 위원들에게 하는 걸 보니 나름대로 깍듯하고 빈말도 잘했었다. 그렇다면 내가 편해진 건가 아니면 우스운 건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답을 해야할 때를 놓치고 말았다. 굳이 붙잡으려 애쓸 필요는 없어 나는 가볍게 웃고 답하지 않았다.

 “뭐, 쉽지 않죠? 박 과장님이랑 어울리는 거.”

 그는 다시 한번 내 앞에 말을 툭 하고 던져놓았다. 나를 떠보려는 심산이었겠으나 나는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기다리다 보면 그가 알아서 말을 내어놓을 모양새였기 때문이다.

 “회사에서는 일 잘했어요. 그런데 사람이 좀 까탈스러운 데가 있고 뭐랄까, 사교적인 듯 사교적이지를 못해서, 가깝게 지내는 동료는 별로 없었고.”

 “권 과장님은 그래도 같은 팀이면 꽤 가깝게 지내셨던 건 아니에요?”

 스스로 생각해도 이 질문은 능청스러웠다. 누가 봐도 가까운 사이는 아니니까. 권세진도 그걸 아는 모양이었다.

 “그래보여요? 아닐텐데, 하하. 뭐, 같은 팀이었으니까. 그리고 좀 불미스러운 일로 서로 얽혀있다 보니까 개인적으로는 박 과장님 보면 안타깝고 그렇죠.”

 “…불미스러운 일이요?”

 권세진이 부지런히 놀리던 숟가락을 잠시 멈추었다.

 “뭐, 박 과장님이 말했을 것 같지는 않고. 아무래도 개발이네 재개발이네 말이 나면 떴다방이나 유령개발, 그러니까 부동산개발업체들이 생겨나면서 사기 치고 다니거든요. 박 과장님이 홍영 건 맡을 때 그런 업체한테 한번 당했었어요. 그걸로 회사에서 징계도 좀 먹고, 그러다가 승진 명부에 몇 년간 이름도 못 올리게 되버려서 고민 끝에 결국 회사 그만뒀죠.”

 대수롭지 않다는 듯 표정을 꾸며가며 하는 말이었지만 그의 말에는 박춘수를 향한 날 선 말들이 가득했다.

 “그럼 박 위원님이 사기를 당하셨어요?”

 권세진은 무표정하게 다음 말을 이었다.

 “글쎄요. 애매하긴한데. 화영개발이라고 유령업체가 있었는데 거기가 투자자 모아서 그 돈 들고 튀었죠. 그런데 거기 피해자라는 사람이 우리 공사 감사과에 민원을 넣은 거예요. 화영개발에 자기가 투자한 이유가 박춘수라는 도시계획공사 과장이 화영개발쪽에 홍영개발 정보를 넘겼다고 해서 그거 보고 투자했다고.”

 “그 사람이 거짓말했을 수도 있잖아요.”

 “그렇죠. 그런데 이게 증거가 나왔거든. 화영개발쪽에 박 과장님이 메일을 보냈었더라고. 내부 심의자료를.”

 나는 이용선이 건넨 박춘수의 아이디와 비번이 떠올라 이를 어떻게 물을지 고민하다 돌려 물었다.

 “회사메일로 그런 걸 보냈다는 게 너무 허술하지 않아요? 박 위원님이 나쁜 짓을 할 거였으면 그렇게 엉성하게 하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내 말에 권세진 과장의 눈이 깊어졌다. 무언가를 깨달은 눈빛인지 옴니암니 유불리를 계산해 보는 눈빛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기묘한 표정이었다.

 “그러게요. 그런데 지웠더라구요. 보냈던 메일을. 휴지통에서도 지우고 다 지웠는데 디지털 포렌식까지 할 거라고는 생각 못 했겠죠. 그런 민원인이 나올 거라는 생각도 못 했을 것이고, 아무리 철두철미한 박 과장님이라고 해도. 안 그래요?”

 나는 슬며시 고개만 두어 번 끄덕였다.

 “그리고.”

 권세진은 할 말이 남아있었는지 나를 향해 몸을 숙여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박 과장님도 화영개발 쪽에 투자했었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본인 돈은 물론이고 약혼자 돈까지 끌어다가 투자했는데 날아간 거라고. 아마 그래서 그 화영개발 잡겠다고 여기 홍영에 내려온 게 아닌가 싶은데. 억울하겠죠. 억울하겠지. 파혼까지 됐으니까 왜 아니겠어. 이렇게 정보 빼 주는 일이 생각 외로 우리 공사에서 흔하거든요. 뭐, 정도의 차이지, 알게 모르게 조금씩들 정보는 빼 주고 그러니까. 박 과장님은 통이 커서 그런가, 도를 넘은거고. 육개장 어때요? 이 집 맛있죠?”


 “밥은?”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자 엄마가 식탁에 앉아있었다. 엄마도 나처럼 표정이 영 밝아 보이지는 않았다. 나는 방으로 들어가려다 말고 식탁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여느 때 같으면 평소와 다른 내 모습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왜 이래, 무슨 일 있어?’라고 물었겠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엄마는 나를 잠깐 보더니 다시 고개를 숙여 앞에 놓여있던 물을 한 모금 들이켰다. 어렵게 말을 건 것은 내 쪽이었다.

 “왜, 무슨 일 있어?”

 엄마는 내 물음에도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나는 그저 엄마를 기다리기로 했다. 엄마는 나를 보았다가, 식탁 위를 보았다가 창밖을 보았다가 냉장고를 보았다가, 나를 보고 싱긋 웃었다가 눈시울이 잠시 붉어졌다가 다시 웃기를 반복하다 마침내 말문을 열었다.

 “그 군민위원회에서 들은 말 없냐?”

 “무슨 말?”

 “김 회장이 상인들 몇이랑 하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운곡시장 근처로 큰 쇼핑몰 하나가 들어설 거라고 그러던데. 거기 상가임대를 받아야 하는 것 아니냐고 뭐, 그런 말들을 하길래. 너는 혹시 뭐 들은 말이 있나 싶어서.”

 “아, 위치가 근처이긴 한 것 같은데 아주 가까운 건 아니고 한 블록 정도 떨어진 것 같던데.”

 엄마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왜?”

 “참, 이상들하네.”

 엄마의 코 끝이 빨개졌다. 북받치는 울음을 참을 수 없었는지 엄마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고는 한숨인지 눈물인지 모를 숨들을 한꺼번에 토해내기 시작했다. 나는 당황했지만, 마땅히 엄마에게 해 줄 말을 몰라 가만히 앉아있었다. 스스로가 그렇게 한심하게 느껴진 건 참으로 오랜만의 일이었다. 나의 별다른 도움 없이도 스스로 감정을 추스른 엄마는 옷소매로 얼굴을 아무렇게나 쓱쓱 닦아내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내게 애써 한번 웃어보이며 말을 이었다.

 “아니, 그렇잖냐. 그거 나랏돈으로 하는 일이라며. 그 돈으로 운곡시장 길 좀 정리도 해 주고 간판도 싹 갈아주고 어두운 조명도 좀 밝게 해 주고 여기저기 전단도 좀 뿌려주고 가판대도 깨끗하게 정리도 좀 해 주면 새 건물 세우는 것보다 돈이 적게 들지 않겠냐. 그런데 왜 굳이 그 땅을 다 사들여서 쇼핑몰을 짓고 마트를 짓는다는 건지. 그것도 아주 애매한 곳에다가. 아예 멀든가, 아니면 쇼핑몰 빼고 바로 시장 옆에 짓든가. 아니, 내가 무식쟁이라서 이렇게 생각하는 거냐? 왜 나도 하는 생각을 그 똑똑한 냥반들은 못하느냐 이거야. 내가 너무 억울해서 그런다. 지금껏 잘 버텼는데 나라에서도 이렇게 잘 버틴 나를 좀 도와주면 안되느냐 이거야. 안 된다 싶으면 싹 버려버리고, 새로 짓고 말이야. 살려보려고 애를 써야지, 헌 것 버리는 걸 아주 우습게 알아. 헐었다는 게 죽었다는 건 아니잖아, 안 그러냐.”

 근래 들어 엄마가 말을 그렇게 많이 하는 것을 나는 처음 들었다. 방향을 잃은 억울함이 이리저리 휘청대다 내 앞에서 푹하고 고꾸라지는 것 같았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하나 뿐이었다.

 “엄마, 다 잘 될거야. 엄마 말대로 나랏돈으로 하는 일이니까, 사람들이 싫다는 걸 자기들이 마음대로 하겠어? 좀 지켜보자. 나도 알게 되는 것 있으면 바로 알려줄게.”

 엄마는 조용히 웃으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고 식탁을 두 손바닥으로 가볍게 탁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오늘 저녁은 된장찌개를 하려는지 냉장고에서 재료를 하나씩 꺼내어 씻어내기 시작했다. 평소 같으면 ‘너가 사람이 다 됐다’면서 핀잔 한 번 주고 웃으며 말을 마쳤을 엄마가 오늘은 고요했다. 난 그 고요함이 가엾어서 코 끝이 시큰해지는 바람에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으로 향했다.

 “어디 가? 저녁 먹을 건데.”

 “아니, 현관 앞에. 바람 좀 쐬려고.”          

 엄마를 뒤로 하고 현관문을 여니 저녁 공기가 제법 쌀쌀했다. 이러다 정말 겨울이 오려나 보다. 나는 계절 그 자체보다 계절이 바뀐다는 사실이 더 좋다. 어느새 새로워져 가는 계절을 마주하며 ‘와 벌써’라는 생각에 기대, 잠시나마 머리를 무겁게 했던 생각들을 내려놓을 수 있다는 건 분명 선물같은 일이기 때문이다. 제법 쌀쌀해진 날씨에 놀이터에서 놀던 아이들의 옷도 긴 팔이 되었고 벤치에 조르륵 앉아있던 할머니들도 오늘은 보이지 않았다. 엄마가 두꺼운 외투가 있었던가. 작년 겨울에 입고 다니던 것은 얇아 보였는데….


 “덕구.”

 엘리베이터에서 방금 내렸는지 복도 저편에서 박춘수가 걸어오며 나를 불렀다. 왜 나는 그가 으레 집에 있을 거라 생각했을까. 당황한 나머지 바로 응수를 못하다가 그가 내 앞에 멈춰서서야 나는 그에게 대답했다.

 “아, 어디 다녀오세요?”

 내 물음에 박춘수가 개구진 표정을 지어보이며 어깨동무를 했다.

 “왜, 어디 다녀오십니까라고 묻지. 왜 이렇게 표정이며 말투가 깍듯해, 서운하게.”

 “제가 뭘요, 똑같은데.”

 내 대답에 박춘수는 어깨동무를 하던 팔을 내려놓으며 가볍게 내 등을 툭툭 두드렸다.

 “그래, 이 대리님, 오늘 하루는 잘 보내셨고?”

 그의 물음에 권세진 얼굴이 떠올랐다. 나는 그를 만났었다는 이야기를 하려다 대충 얼버무렸다.

 “뭐, 그럭저럭.”

 “그때 군민위원회 끝까지 못 들었었지? 못 들은 이야기마저 해 줄까 싶은데 지금 시간 괜찮아?”

 “아뇨, 엄마가 지금 저녁 준비하시는데 바람만 쐬고 들어간다고 했어요.”

 “아, 그래?”

 심드렁한 내 태도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의 말처럼 내가 너무 깍듯해서였을까 박춘수는 다소 무안해진 표정으로 오른손으로 뒷목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내일 퇴근하고 들를게요. 시간 괜찮으시면.”

 나는 그런 그의 모습에 마음이 약해져 그에게 그렇게 말했다. 마침 내가 미처 듣지 못한 분과회의 결과가 궁금하기도 했다. 나의 말에 그가 다시 밝게 웃으려 애쓰며 말했다.

 “그래, 그럼 내일 퇴근하면 연락해라. 난 집에 있을 것 같으니까. 저녁 잘 먹고. 먼저 들어간다!”

 평소 같으면 ‘들어갈 때까지 이야기나 하지 뭐’라며 내 곁을 지키고 섰을 그는 그 말을 뒤로 하고 집으로 들어가 버렸다. 현관문을 닫기까지 그는 한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좋아하는 마음과 달리 멀어진 마음은 말하지 않아도 상대에게 고스란히 전달되는 모양이었다.

참으로 애꿎게도.      


(금요일, 33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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