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 보겠습니다.”
“그래, 이 대리. 오늘도 수고했다!”
내 퇴근 인사에 김 실장이 유난히 밝게 웃으며 답했다. 돌아보니 손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눈썹을 다듬고 있다. 아까 점심때 듣기로는 오늘 약속이 있다 했었다. 이게 얼마만의 저녁 약속인지 모르겠다며 온종일 소풍 가는 아이처럼 들떠있었더랬다. 그녀가 오늘 두르고 온 스카프도 멋졌다. 하얀색, 초록색, 빨간색, 금색이 한데 섞인 실크 스카프였는데 김 실장이 그토록 되고 싶다 노래를 부르던 ‘사모님’처럼 보였다. 나는 이 말을 그녀에게 하려다가 ‘오늘 예쁘세요’라는 말로 대신했다. 다행히 김 실장은 그 말로도 충분했는지 방긋 웃었었다.
사무실을 나오니 이제는 얇은 외투라도 챙겨야 하는가 싶다. 엄마 가게에 있는 난로와 전기장판도 미리미리 확인해 두어야겠다. 작년 이맘땐 서울에서 내려오기 직전이라 신경을 못 썼는데 알고 보니 엄마 가게 전기장판이 고장 났었다. 엄마는 마땅히 고치지도 못하고 새로 사지도 못하여 난로 하나만 의지한 채 그 추운 겨울을 다 보냈었다. 올해는 절대 그러는 일이 없어야 한다. 준비를 잘해야 한다.
“이 대리야!”
고보영이었다. 내가 나오는 걸 보고 헐레벌떡 뒤따라 나왔는지, 품에는 채 닫지도 못한 핸드백과 핸드폰, 외투를 아무렇게나 뭉뚱그려 끌어안은 채 내쪽으로 뛰듯 걸어오고 있었다. 나는 그녀가 서두르지 않도록 가던 걸음을 멈추고 그 자리에 서서 기다려 주었다.
“내 메시지 못 봤어? 같이 가자니깐.”
마감 때문에 핸드폰 신경을 못 쓰고 있었다. 그녀의 말에 나는 그제야 바지 주머니 속 핸드폰을 꺼내어 메시지를 확인했다.
‘이따 춘수 삼촌 집 같이 가자, 나도 바로 가려고. 사무실 밖에서 기다려.’
박춘수의 집에 같이 가자니 그건 무슨 말인가. 내가 오늘 간다는 말을 했던가. 그런 말을 한 기억은커녕 종일 그녀와 말조차 섞지 않았다. 심지어 오늘 박춘수 집에 가는 일이나 그곳에서 들었던 이야기를 그녀에게 할 생각일랑 전혀 없었다. 어리둥절한 내 표정에 그녀 역시 당황한 듯 했다.
“뭐야, 혹시 오늘 나도 가는 거 못 들은거야? 춘수 삼촌이 연락했었어. 오늘 저녁에 너 와서 저번 분과회의 결론이 어떻게 났었는지 이야기하려는데 혹시 같이 오려느냐고. 당연히 간다고 했지.”
‘당연히’라는 단어가 내게로 날아들어와 목에 가시처럼 박혔다.
“당연히?”
되묻는 나의 말에 방긋 웃던 고보영의 얼굴이 빛을 잃었다. 이런 표정으로 말하려던 것이 아니었는데, 이런 목소리로 말하려던 것이 아니었는데 나는 생각과 달리 그렇게 차갑게 말을 뱉고 말았다.
“외투 입어. 춥다.”
추위 때문인지 내 말 때문인지 발갛게 달아오르는 그녀의 코끝을 보며 나는 건조하게 말했다. 그녀는 내 말에 고개를 떨구고 목에 핸드백을 걸더니 서둘러 외투를 입고 앞을 여몄다. 목에 걸려있던 핸드백 줄 사이로 오른팔을 쑥 빼내어 옷매무시를 가다듬은 그녀는 나를 향해 다시 밝게 웃으며 말했다.
“가자, 날이 꽤 쌀쌀하네.”
버스정류장이 바로 앞에 있었지만 우리가 함께 퇴근하는 날이면 한 정거장을 걸어가 버스를 타곤 했다. 고보영은 걷는 것이 좋아서 그런거라 했지만, 사실 고만덕의 눈을 피하고자 하는 이유가 제일 크다는 걸 알고 있었다.
우리는 걷는 동안 말하지 않았다. 나는 차라리 그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요 며칠 마음에 작은 유리 조각들이 잔뜩 박힌 것처럼 조금 불편하고 조금 아팠다. 그래서였을까, 박춘수에게도 고보영에게도 엄마에게도 나는 요 근래 곱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내 마음은 온전히 나의 것이 아닌지, 마음 속 말을 꺼내놓으려 할 때마다 박혀있던 그 작은 유리 조각이 하나둘씩 함께 날아가 상대에게 박히곤 하는 것이었다. 그러려던 것이 아니었는데, 그런 뜻이 아니었는데’ 라고 생각을 하면 할수록 나는 모나고 거칠고 못된 사람이 되었다. 생각이 깊어갈 무렵 어디선가 삑삑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드니 골목길에서 엄마와 아이가 걸어 나와 우리를 앞서 걷기 시작했다. 아이는 걸을 때마다 삑삑 소리가 나는 신발을 신고 있었다. 아이는 몇 발자국 걷다가 멈춰서 바닥을 바라보았는데 자세히 그 모습을 살펴보니 아무래도 제가 걸을 때마다 나는 소리가 어디에서 나는지 찾고 있는 것 같았다. 한 두 발자국 가서 멈춰 놀란 눈으로 땅을 살펴보는데 그게 제 신발이라는 추측은 하는 모양이었다. 아이는 그렇게 얼마를 걷다가 이번에는 양발을 그 자그마한 어깨너비로 엉거주춤하게 벌리더니 아래로 고개를 푹 숙였고 벌린 다리 사이로 거꾸로 선 볼이 통통한 귀여운 얼굴이 드러났다. 그리고 동그랗게 뜬 아이의 눈이 나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크핫, 하하하하”
그렇게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줄곧 바닥만 보며 내내 내 곁을 말없이 걷고 있던 고보영이 놀란 눈으로 나를 돌아봤다. 나는 쉬이 웃음을 멈추지 못하고 한참을 깔깔대다가 숨을 고르고 그녀에게 아이를 가리켰다. 아이는 이미 몸을 일으킨 뒤였지만 내가 웃는 모습에 자기도 기분이 좋아졌는지 우리를 자그맣고 통통한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활짝 웃었고, 그 아이의 엄마는 내가 웃는 이유를 눈치챘는지 함께 환히 웃고 있었다.
“아니, 신발에서 나는 소리를 자꾸 찾는데 진짜 귀엽다, 하하하하.”
말을 건네고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입가에는 살며시 미소를, 두 눈에는 그렁그렁한 눈물을 머금고 있는, 그 찰나에 마주한 그녀의 표정은 뭐라 말로 표현하기 힘들었다. 동정도, 안도도, 연민도 아닌 다른 무엇이었는데 굳이 말하자면 그것은, 사랑이었다. 그 외에는 달리 적당한 단어가 없었다. 그 단어가 그녀로부터 내게 온 것인지, 나로부터 그녀에게 향한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녀의 그 표정을 설명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단어는 그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말했다.
“그동안 좀 힘들었어. 사실은 지금도 좀 그래. 이유를 모르겠어.”
고보영은 여전히 그 표정으로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를 굴려 나온 말이 아니었다. 참았던 숨처럼 뿜어져 나온 말이었다. 그덕에 나는 마음이 한결 가볍고 시원해졌다. 고보영이 나의 말을 생뚱맞게 들으면 어쩌나하는 걱정 따위는 애초에 없었다. 나의 그 말은 그녀 덕분으로 나온 고백이었기 때문이다.
길을 다시 돌아보니 엄마는 아이를 번쩍 안아들고 저만치 멀어지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아이가 걷던 그 속도로는 오늘밤 안으로 어디로도 가지 못하리라. 버스정류장을 조금 남겨두고 우리 뒤쪽에서 버스가 불빛을 반짝이며 달려오고 있었다. 고보영과 나는 함께 남은 길을 전속력으로 달렸고, 간신히 버스에 올라탔다. 오랜만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참 좋았다.
“어서 와.”
박춘수가 문을 열며 우리를 맞이했다. 집에 들어서자 고소하고 칼칼한 김치찌개 냄새가 났다. 배고프다는 생각을 못했는데 냄새를 맞자 허기가 밀려왔다. 생각해 보니 그의 주방이 제대로 쓰이는 걸 본 건 이번이 처음이다. 주방도구야 잘 갖추어져 있지만 마치 모델하우스인 양 한번도 제 쓰임을 다하지 못한 듯 했는데 오늘은 어쩐 일인지 그가 요리에 나선 것이다.
“우와, 김치찌개 진짜 맛있겠다!”
고보영이 손을 씻고 바로 주방으로 향하더니 냄비 뚜껑을 열며 말했다. 박춘수는 멋쩍은 듯 웃어보이며 고보영에게 수저를 쥐어주고 식탁으로 내몰았다. 주광색 따뜻한 불빛과 김이 오르는 흰 밥, 그리고 보글보글거리는 김치찌개와 어느 반찬가게에서 샀는지 모를 멸치볶음, 연근조림, 시금치나물까지 한상이 차려졌다. 모두 식탁에 둘러앉았고 박춘수가 각자의 국그릇에 김치찌개를 크게 한 국자씩 떠 주었다. 고소한 돼지고기 냄새, 잘 익은 김치냄새, 칼칼한 청양고추 냄새까지 말 그대로 맛있는 냄새가 한꺼번에 달겨들었다. 박춘수는 힐끗 내 표정을 살폈다. 내 한 마디를 기다리는 눈치였다.
“진작 좀 해 주지. 요리 할 줄 알면서 그 동안 콜라 아니면 배달음식만 먹인 거예요?”
고보영이 ‘풉’하고 웃음을 터뜨린 덕에 박춘수도 나도 덩달아 함께 웃었다. 마치 아주 오랜만인 듯 우리는 그렇게 웃고 떠들며 저녁을 함께 먹었다. 저녁을 먹는동안 그녀와의 오늘 퇴근길이 내내 떠올랐다. 수많은 이야기가 오갔지만 삑삑 소리가 나는 신발을 신은 그 아이를 보았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오늘 하루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었지만 나는 말하지 않았다. 다행히 그녀도 몇 가지의 시시콜콜한 이야기 속에 그 이야기를 넣진 않았다. 대신 우리가 나눈 이야기는 이를테면 이런 것들이었다. 박춘수가 시내버스를 탔다가 할머니들에 둘러싸여 한바탕 청문회를 당했다는 이야기, 고보영이 입으려고 사둔 블라우스를 엄마가 외출할 때 몰래 입으려다가 걸렸다는 이야기, 김 실장님의 오늘 저녁약속이 남편과의 결혼기념일 약속이었다는 이야기, 구태영 군수가 얼마 전 라디오쇼에 나갔었는데 실시간 댓글반응이 정말 좋지 않았다는 이야기, 그리고 운곡시장 주변으로 쇼핑몰이 들어서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엄마가 걱정한다는 이야기까지.
“그러네, 어머니께서 걱정이 크시겠네.”
박춘수가 다 비운 밥그릇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한창 웃고 떠들다 결국 내 이야기에서 분위기가 가라앉고 말았다. 순간 내게는 이런 이야기 밖에 없다는 것이 속상했다.
“다른 이야기 하죠.”
내가 말을 돌리자 박춘수가 막아섰다.
“아냐, 안 그래도 저번 분과회의 때 그 이야기가 메인이었어. 마침 말 잘 나왔다.”
“뭐였는데요?”
고보영이 박춘수에게 묻고 나를 돌아봤다.
“그게 위치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박춘수는 말이 길어질 듯한 폼새로 다시 한번 목을 가다듬더니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우선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어. 이 군민위원회라는 건 의사결정기구가 아니야. 권한이 없어. 쉽게 말해서 군청 입장에서만 좋은거야. 주민들 의견을 들었다, 됐지? 뭐, 이 정도 수준으로, 구색 맞추려고 만들어 놓은 기구고, 지역에서 말빨 좀 있다는 사람들끼리 사교하는 수준으로 생각하면 될 것 같다. 현재까지 내 파악은 그래. 다음 회의는 내가 진행하게 될테니까 두고 봐야하겠지만 아주 중요한 사항이 이미 전제된 상황에서 분과회의에서의 내 발언이 얼마나 유효할지 나는 사실 회의적이야. 그래서 내가 퇴사하는 과정에서 있었던 일이 이 상황을 반전시키는데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걸 어떻게 활용해야하나 싶은데, 일단 그건 나중에 이야기하기로 하고.”
“아까, 아주 중요한 상황이 전제되어있다는 건 무슨 뜻이에요?”
고보영이 박춘수에게 물었다.
“그 복합문화시설인지 뭔지하는, 그 건물이 들어서게 될 위치하고 용도말이야. 사실 원안으로 국비까지 받은 마당에 이제 와서 3기 위원회에서 나 같은 위원 하나가 뭐라고 몇 마디 했다고 위치와 용도를 바꿀 이유도 명분도 없다는 거지. 심지어 2기 때 용도나 위치를 이미 이야기했었더라고. 물론 1안, 2안, 3안으로 해서 마치 확정이 아닌 것처럼 하기는 했지만, 국비를 따내는 순간 1안이 확정안이 되는거지. 다시 말하면, 위치와 용도를 바꾸자고 지금에 와서 아무리 내가 말한들 그건 바뀌지 않을 거란 이야기야.”
“위치하고 용도가 어떻게 되는데요? 저번에 위치 이야기는 대략 들었는데 정확히는 몰라요.”
이번에는 내가 그에게 물었다. 그는 테이블 위에 있던 그의 핸드폰을 들어 몇 번의 터치를 거친 후 나와 고보영에게 내밀어 보여주었다. 핸드폰 화면에는 지도가 있었고 별표로 표시된 곳이 건물이 들어서게 되는 지점인 듯 했다. 작년에 들어선 신축 아파트 바로 옆이었고, 시장에서 버스로 1정거장 떨어진 곳이었다.
“생각보다 꽤 큰 규모로 들어서는 것 같아. 뭐 서울이나 경기도에 지어지는 그런 수준은 아니지만 홍영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지금까지는 없었던 상가규모이긴 해. 입찰공고를 띄웠던데 그걸 보니까 대지면적이 3,400평이고 지하 1층, 지상 5층 1개동 건물이야. 각 층을 테마별로 꾸민다고 하는데, 뭐 노인문화, 메디컬, 오피스 등등 말은 그럴 듯 한데, 문화센터 들어서고 병원 들어서고 학원이나 사무실 임대한다는 뜻이지, 다른 말이 아니야. 그런데 진짜 문제는 1층인데…”
무엇을 망설이는지 박춘수는 한동안 턱을 괴고 말을 멈췄다. 그리고 무엇이 생각났는지 몸을 일으켜 주방으로 향했다.
“저번에 그 쿠키 산 데서 사왔는데 먹을래? 당 떨어져서 안되겠다. 보충 좀 하면서 이야기하자.”
그가 우리 앞에 저번에 권세진 때문에 제대로 먹지 못한 그 쿠키와 탄산수를 내 주었다.
“김치찌개 다음 쿠키라니. 역시 단짠의 조합은 진리죠.”
고보영이 웃으며 쿠키를 한 입 베어물었다.
“1층에 마트 들어선데요?”
나는 박춘수가 앉기도 전에 물었다. 그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놈들이 머리를 나름 잘 썼어. 나도 공사에 있을 때 이 부분을 반박하는 게 쉽지는 않았는데, 남들이 이게 상생모델이라고 하나같이 추켜세우는 바람에. 그런데 자세히 보면 그게 아닌거야. 이게 뭐냐면.”
그가 큼지막한 초코렛 덩어리가 여기저기 잔뜩 박힌 쿠키 하나 들어 크게 베어물더니 몇 번 오물거린 후에 말을 이었다.
“1층에 수퍼 수준의 마트를 하나 집어넣고, 청과, 야채, 수산, 정육, 떡집, 분식 이렇게 테마를 정해서 홍영 지역 상인들에게 우선 분양기회 같은 걸 주더라고. 여기 들어와서 장사하라 이거지. 그리고 입찰공고문상에 제안요청서를 보니까, 군청에서는 이 1층을 지역상생경제모델로 제시하는 업체한테 가점을 준다, 뭐 이런 식으로 되어있어. 뭐, 초기 정착 지원한다는 명분 하에 이런저런 착안들이 나오겠지.”
새로운 정보였다. 시장 상인들이 분양권이네 뭐네 말했다던 엄마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게 이것이었나보다.
“대형마트 그냥 집어넣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가 보네요. 그럼, 그게 구체적으로 어떤 문제가 생기는데요.”
박춘수의 얼굴을 바라보며 내가 물었다. 그렇게 묻는 내 모습이 이상하리만치 고요하게 느껴져 나조차도 낯설었다. 무슨 말을 듣게 될 것인지 알 것 같기도 하고 몰라야 할 것 같기도 했다.
“사실상 지역에서 제일 큰 상가건물이고, 신축 아파트는 물론이고 주변에 아파트가 많아서 입지도 좋으니, 기존에 영업 중인 상인들에게 우선 분양기회가 간다고 하면 아마도 꽤 몰릴거야. 문제는 모두가 그 상가 건물 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한다는 거지. 내 생각엔 운곡시장 상인들도 동요가 생기기 시작했을 거고, 그렇게 되면 상인들이 힘을 모아서 대처하는 것도 어려워져. 군청 입장에선 상인들이 힘을 합쳐서 반대한다, 재고해라 이렇게 말을 하면 마냥 몰아붙이는 게 부담스러울 수 있는데 이건 상인들끼리 내부분열이 있을 모양새라, 나는 그게 걱정이야.”
박춘수가 시장 상인들이 한데 힘을 모으지 못하면 어쩌나를 걱정하는 사이, 내 머릿 속에선 그 상가가 청과상인도 받는다는 사실만이 선명해져갔다. 우선 분양기회라면 금전적 혜택도 있는 것인지, 대출은 되는 것인지, 새로운 가게를 꾸린다고 한다면 어떻게 꾸밀 것인지까지 차례로 상상해 보았다. 손님이야 어쩌다가 한 번씩 있고, 식당이나 근처 카페에 과일을 납품하는 지금의 불안정한 구조를 타계할 수만 있다면 나는 그 상가에 들어가는 것이 엄마와 내겐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이, 자꾸만 자꾸만 들었다.
“만약 이 건물이 계획했던대로 꾸려지고 나면, 운곡시장은 사실상 유령시장처럼 되지 않을까 싶다. 아, 그러니까,... 미안하다. 내가 적당한 표현을 못 찾았네. 내 말은 그만큼 활기를 잃게 될거라는 뜻인데, 그간 다른 곳 개발되는 사례를 봐도 그렇고.”
“유령시장 맞죠, 지금도 뭐.”
나의 건조한 한 마디에 박춘수와 고보영 두 사람이 짐짓 놀라는 척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더 말을 이으려다 말았다. 숨어있던 마음의 유리조각들이 다시 삐죽삐죽 돋아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박춘수는 내 눈치를 살피며 계속 말을 해 나갔다.
“그래서 나는 다음 분과회의까지 한번 지켜보고 필요하다면 운곡시장 상인들을 좀 만나볼까 해. 김원재 회장님 도움도 좀 받아서.”
“그 사람은 안 도와줄거예요.”
나는 또 다시 삐죽 말을 뱉었다. 지금 내 표정이 어떤 모습일지 몰라 나는 박춘수를 바라볼 수 없었다. 대신 아직 맛도 보지 않은 그 커다란 쿠키를 바라보며 말했다.
“지역 유지잖아요. 저번에 회의 때 보니까 하 사장 말에 이렇다 할 대거리도 못하던데. 상인회 회장이라는 사람이 한 마디도 제대로 못하잖아요.”
그러려던 것은 아닌데 말을 뱉다보니 볼멘소리처럼 되어버렸고, 박춘수의 말투도 어르는 듯한 모양새로 바뀌었다.
“그래도 상인회 회장이잖아. 잘은 모르겠지만 그 사람도 그 안에서 권력이라는 게 있을텐데 쉽게 놓치려고 하겠나 싶다. 나는 김 회장도 마음이 복잡하고 또 이게 아니다 싶으니까 그래도 그 회의자리에서 말을 꺼냈던 게 아닌가 싶은데. 시장은 지켜야지.”
“이미 망해가는데 지키긴 뭘 지켜요! 김 회장이야 나중에 상가번영회 회장, 그런 거 하겠죠! 아니예요?”
나는 박춘수를 똑바로 바라보며 잔뜩 날이 선 얼굴로 그렇게 유리 조각 하나를 박춘수를 향해 날렸다. 그는 나의 말에 눈도 손도 표정도 모두 멈춘 채 한동안 멍하니 날 바라보았다. 즐거운 저녁시간을 망쳐버렸다는 자책과 알 수 없는 원망과 짜증, 분노가 한꺼번에 밀려와 그 자리를 벗어나야한다는 생각 밖에는 들지 않았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고 그런 나의 손을 잡으려 고보영이 팔을 뻗었지만, 그녀가 나를 잡기 전, 나는 재빨리 현관으로 도망치듯 향했고 인사도 없이 그대로 박춘수의 집을 나왔다.
“이제는 낮에도 쌀쌀하네. 이러다 금방 겨울 오겄다. 나, 다녀왔다.”
편집장이 사무실을 들어서며 말했다. 군청 교육체육청소년과에서 홍영군 가을 체육행사 취재를 와 달라는 요청으로 나도 막 사무실을 나서려던 참이었다. 편집장은 내게 무슨 할 말이 있는지 사무실에 들어서지마자 한참동안이나 나를 힐끗거렸으나 내가 바빠보였는지 결국 아무 말도 않고 자기 자리로 향했다. 들으나마나 어디 가느냐고 묻고, 거기 가면 아무개한테 안부 좀 전하라는 식의 당부였을 것이다.
“다녀오겠습니다.”
내가 사무실 문을 향해 걸어가며 인사를 하자 김 실장이 고개를 끄덕였고 편집장은 달리 말이 없다가 갑자기 박차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나를 다급하게 붙잡았다.
“잠깐, 잠깐, 잠깐! 이 대리야, 너 지금 어디 가냐?”
“군청이요. 교육체육청소년과요. 안부 전하실 분 계세요?”
편집장이 어떤 이름을 말할 것이라는 나의 예상과는 전혀 다르게, 그가 말했다.
“그거 오늘은 이 대리가 가지 말고, 고 주임이 다녀와라.”
“네?”
나의 반문에 편집장은 양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둔 채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단호한 얼굴로 다시 말했다.
“그래, 그거 고 주임이 다녀와.”
그러자 이번에는 고보영이 나섰다.
“네? 그건 이 대리 일인데 왜 제가 가요? 저는 무슨 건인지 알지도 못해요."
기분이 좋지 않았다. 내내 내가 맡았던 건인데 갑자기 하지 말라니, 남은 6개월 계약기간이 떠올랐다. 혹시 이렇게 서서히 내 일을 줄여나가려는 것일까. 한번도 가졌다고 생각해 본 적 없는 불안이 편집장 한 마디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내가 이 대리 생각해서 하는 말이니까 내 말대로 해. 고 주임이 다녀와.”
“저도 지금 해야할 일이 있어요.”
고보영은 물러서지 않았다. 이번에는 김 실장도 나섰다.
“편집장님, 무슨 걱정이신지 모르겠지만 군청에서도 당황스럽죠. 지금껏 연락한 사람이 이 대리인데 갑자기 왜 그러세요.”
김 실장까지 나서자 편집장도 망설여지는지 머리를 두어 번 벅벅 긁었다. 그리고는 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내게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그래, 다녀와. 조심히 잘 다녀와. 그냥 내가 시킬 일이 있어서 그랬는데, 다녀와서 하지, 뭐. 조심히 잘 다녀와.”
나름의 우여곡절을 거쳐 사무실을 나왔다. 정오를 향하는 볕은 따스했지만 공기는 겨울을 품고 있었다. 편집장의 말대로 이러다 금방 겨울이 올 모양이었다. 가을을 어떻게 보내는지도 모르고 보내버렸는데 겨울도 그렇게 지나쳐 가려나.
군청으로 가까워올수록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렸다. 군청 앞마당에서 오늘 행사가 있었던가, 바자회도 다음 주라고 그랬었는데 뭘 놓친거지 싶어 군청 울타리쪽으로 난 길을 따라 천천히 차를 몰며 앞마당을 살폈다.
삼치를 좋아하는 나를 위해 물 좋은 삼치가 들어온 날이면 꼭 한 마리 따로 떼어두었다가 학교 끝나고 엄마가게로 향하는 나를 붙잡아 세우며, 오늘 저녁 엄마랑 같이 구워먹으라 쥐어주던 청일수산 수영 아줌마가 피켓을 들고 있었다.
‘100년 전통 운곡시장 이대로는 안 망한다.’
매주 토요일이면 어른을 따라 장을 보러 나온 아이들에게 200원씩 쥐어주던 운곡시장 동전부자 명주상회 권일이네 아저씨도 피켓을 들고 있었다.
‘행복군민위원회는 해체하라, 밀실행정 규탄한다.’
나는야 운곡시장 냄새 담당이라며 가게에 있는 시간보다 시장을 돌아다니며 여기저기 참견하는 시간이 더 많은, 그러다 누군가 구박이라도 하면 눈 한번 흘겼다가 돌아설 땐 늘 웃던 참기름집 용주 아저씨도 피켓을 들고 있었다.
‘구태영 군수는 운곡시장 목소리 외면말고 응답하라.’
손님들이 젓갈을 손으로 가리키면 손목을 몇 번 휘휘 돌려 봉지마다 새빨간 젓갈을 담아내던 마술손 속초젓갈 유미네 아줌마도 피켓을 들고 있었다.
‘제 살길만 생각하는 김원재는 각성하라.’
건어물집 찬용 아저씨도, 떡과 약과 그리고 가을이면 알밤을 파는 은희네 아저씨도, 해가 바뀔 때마다 엄마가 늘 내 신발을 사 주던 영광신발 영광이네 아저씨도, 통마늘을 쟁여놓고 심술궂은 얼굴로 늘 꾸벅꾸벅 졸던 방코 할아버지네 아저씨 부부도 군청 앞마당에 하나같이 머리띠를 두르고 앉아 누구를 향한 외침인지 목이 터져라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맨 앞에 재래시장에서 시금치 한단 사 본 적 없을 것 같은 박춘수가, 가을 내내 어디로 나가는지 늘 집을 비워두던 박춘수가 함께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매일홍영 차를 몰고 서서히 군청에 들어선 나는 그들의 맞은편 주차장에 가만히 차를 댔다. 낯익은 얼굴들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훑어가며 차에서 내리려는 순간, 그들 무리의 가장 오른쪽 뒤편에서 마지막 낯익은 얼굴이 눈에 들어와 박혔다.
순미청과의 순미 씨.
뉴질랜드에서보다 맛있는 뉴질랜드 키위를 팔고, 겨울이면 팔기도 아깝다는 달큰한 향의 예쁜 딸기도 팔고, 과일은 계절마다 달라서 사계절을 제일 잘 아는 사람이 나라며 시장 상인들에게 뻐기기도 잘 뻐기고, 운곡시장 악바리에 똑순이, 덕구어매 순미 씨가 추위에 떠는지, 불안에 떠는지, 분노에 떠는지 입술을 파르르 떨어가며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뉴스에서 집회하는 소식을 알려올 때마다 ‘먹고 사느라 바빠죽겠는데 팔자들도 좋네’라며 혀를 차던 나의 순미 씨가 먹고 살기 위해 해 본 적 없는 군청 앞마당 점거 농성을 하고 있었다. 엄마가 걸친 누빔외투는 내가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얇았다. 그리고 나는 운전대에 얼굴을 파묻으며 조용히 외쳤다.
“씨발.”
(다음 주 월요일, 34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