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시작하지 않고 있는 일
'보고싶다'는 말을 김범수의 노래 제목으로만 떠올리게 된 지 꽤 됐다. 누군가를 보고싶다는 마음이 점점 흐릿해진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리움이라는 마음의 포션이 몇 년 새에 너무 쪼그라 들었다. 상대방에게 당신이 보고 싶어요. 라고 연락하기가 망설여진다. 쑥스럽고 겸연쩍다. 그럼에도 모든 이에게 한 두 사람쯤은 있겠지. 연락을 미뤄놨지만 저 마음 속에서 늘 보고 싶은 존재가.
그 사람 이야기를 하려면 대학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야한다. 대학에 입학했지만, 그 대학이 싫어서 재수 학원도 알아보고 편입 학원도 쫓아다녔다. 지금 생각하면 바보같은 짓인데 내가 그 대학에 다니는 사람들보다 더 낫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이곳에 속할 사람이 아니라고 굳게 믿었다.
새내기들이 어정쩡하게 어떻게든 친분을 만들어보려고 분주할 때, 나는 외로웠다. 당장 과제를 같이 할 사람조차 찾기가 어려웠다. 그저 교수가 팀을 짜주면 너무나 마음이 편했다. 그래서 조원들에게 넘치도록 충성스러운 결과물을 가져다 주었다. 기본적으로 사람에 대한 경계가 높은데다가 학교마저 싫었으니! 친구를 사귀고 싶은 마음이 있을리가!
꾸역꾸역, 정말로 질질 끌려다니는 심정으로 1학년을 다녔다. 다행스럽게도 봄에서 여름이 되는 동안 과제를 하고 친분을 쌓으며 동기가 생겼다. 나와 J, 그리고 몇 살 많은 언니 두 명(O,Y). 이렇게 우리는 같이 과제도 하고 점심도 먹으면서 재밌게 지냈다. 더이상 학교를 벗어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고, 대신에 공부를 열심히 하는 동기들을 따라 교직이수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걱정했던 것보다 꽤 괜찮았던 스무살의 첫 학기였다. 그런 줄로 알았다. 여름 방학이 지나고 다시 학교에 가기까지는....
2학기가 되니, 더 팀플이 많아졌다. 원래 친했던 사람들이 뭔가 나를 멀리하는 느낌을 받았다. 방학동안
한 번도 만나지 않았고 그저 어색해서 그런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너무 순진했다. 팀을 짜야 하는 수업 모두, 이미 팀을 다 짰으니 나는 낄 수 없다고 했다. 방학동안 서울에 사는 그녀들끼리 만나서 이야기가 된 거라 어쩔 수 없다고 했다.
나는 빠르게 나의 행동을 되돌아봤다. 같이 팀을 하지 못하고 오늘 점심 한끼도 하지 못할 정도로 실수한 건 뭐였을까? 딱히 험담을 한 것도 아니었고, 실례가 될 만한 행동을 한 것도 아니었다. 학기는 흘러갔고 나는
다른 팀에 억지로 껴서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면서 지내야했다. 외향적이고 사람을 좋아하는 이들에게 이런
것쯤은 아무것도 아닐 수 있지만, 나처럼 인간관계에 예민한 부류에게 이건 새로운 형벌이었다.
그렇게 눈만 마주쳐도 웃고 떠들던 사람들이 싸늘한 공기를 내뿜는 걸 정통으로 맞으며 가을과 겨울을 보냈다. 1년이 다 지나도록 이유를 알지 못했다. 몇 년이 지나 나중에서야 알았다. 나와 더 친했던 Y 언니가 나에게 했던 나머지 두 사람의 험담을 마치 내가 했던 것처럼 이야기를 전달했다는 걸. 우스운 건, 공부를 너무도 하기 싫어하던 Y언니는 사이를 다 갈라놓고 어느 날 사라져서 학교를 그만뒀다. 살아보겠다고 나는 새 친구들을 사귀어 학교에 적응했다. 그리고 3학년이 될 때까지 제대로 가벼운 인사조차 하지 못하고 J와 O언니를 피해다녔다. 잘못을 해서가 아니라, 그저 마음의 골이 너무 깊어져서 마주할 수 없었다.
3학년 2학기 어느 날, 햇살도 따사롭던 가을에 우연히 마주친 O언니가 아무일 없다는 듯이 안부를 물었다.
겉으로는 밝게 인사하며 그동안의 간극이 없던 것처럼 그녀를 대했지만, 학교 수업을 마치고 돌아와서 나는 많이 울었다.
내 진심을 알아줘서, 오해가 풀려서...그리고 내가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라는 걸 받아들여줘서...
학교를 졸업하고 시간이 지나 나는 O언니의 결혼식에도 갔다. 동기들과 축하를 해줬다. 얼마 후에는 언니가 아들을 둘이나 낳고 외국을 옮겨 다니며 산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목소리 톤이 잔잔하고 마음이 단단한 사람이었다. 언니가 없던 내게 정말로 '언니'삼고 싶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마음 다해 축하를 하고 행복을 바라며 멀리서 그녀를 응원했다. 다시 연락이 닿은 것은 내 결혼식때였다. 나는 코로나 4단계에 결혼을 해서 초대할 수 있는 식장 수용 인원이 매우 적었다. 정말로 코로나가 걸릴 위험을 무릅쓰고 와 줄 사람들, 그만큼 가까운 사람들이 아니라면 결혼 소식조차 알리지 않았다. 유일한 동기인 'R'이 와줬고 O언니에게서 문자와 함께 축의금을 받았다. (R에게 소식을 들었다며...)
언니는 늘 내 마음 속에 있었지만 내 결혼 소식을 알리기엔 미안했다. 언니가 아이들을 키우고 힘들게 지내는 동안, 나는 나 살기가 바빠 제대로 연락하지 못했으니까. 그저 외국에 있으니 더 성가실 거라고 나 편한대로 생각하며 내 무관심을 합리화 시켰으니까.
내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언니의 소식을 R을 통해 들었다. 언니는 다른 선택을 하고 가장이 되어 아이들을 키우고 있었다. 친구는 언니의 이야기를 알리며 눈물을 보였다. 친구가 흘린 찰나의 눈물에서 언니가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을지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언니에게 오랜만에 연락을 했다.
종종 언니에게 연락을 남겼었다. 잘 살고 있다고 아기도 잘 크고 있다고 소식을 전했다. 그때도 언니는 자기 이야기는 꾹 삼켰다. 늘 나를 다독여주기만 했다.
그러다가 작년 여름, 언니는 그간의 일들을 아주 담백하게 말해줬다. 혼자서 아이들을 키우고 있고, 힌동안 건강관리도 잘 못해서 수술도 했고, 지금은 열심히 살고 있는 중이라고. 아주 큰 파도를 온 몸으로 맞으면서도 "나는 잔잔한 강위에서 노를 젓고 있어~"라고 말하는 듯해서 카톡창을 몇 번이나 더 들여다보며 나도 울었다.
언니는 여전히 언니였다. 너는 나와 같은 길을 가지 말고 알콩달콩 살면서 아이를 잘 키우라고 덕담을 했다. 나같은 인간이라면 내가 가장 힘드니까 아무도 축복해 줄 수 없고, 내 삶이 가장 중요하니까 다른 건 모두다 후순위야! 라고 마음 먹고 그대로 살았을텐데... 언니는 달랐다. 내 생일에는 밥하지 말고 배달해서 먹고 싶은 것을 먹으라며 쿠폰을 보내주었다. 아이를 키워본 언니는 말하지 않아도 알았다. 내 밥조차 챙기기 싫을 정도로 소진되는 날도 가끔 있다는 것을.
몇 달 뒤에 언니의 생일도 아니던 평범한 날, 나는 언니에게 긴 카톡을 보냈다. 응원한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언니가 혼자서 시간을 보내도록 커피 쿠폰을 보냈다. 살다보면, 그게 얼마나 한다고 하면서 턱 하고 돈을 쓰는 날도 있지만, 너무 아까워서 차마 달콤한 시간을 아껴야만 하는 날도 있으니까. 커피나 케이크가 사치가 되는 날들도 있으니까.
지난 해에 마지막 안부를 나누며 언니에게 조만간 연락을 한다고 해 놓고, 약속을 잡아서 만나자고 해 놓고, 남편이 방학을 한 지 2주가 되어가는 지금에도 나는 망설이고 있다. 언니가 나를 만나주지 않을까봐서가 아니다. 언니가 쪼개어 쓰는 시간이 너무 귀해서 그 틈에 내가 끼어들어가도 될까 싶어서 말이다.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까, 나와 같지만 또 한편으로 달라진 언니를 생각하며 아직도 서성인다. 당장은 연락을 하기가 어려울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니, 조만간 마음 속에 고운 말들을 모아봐야겠다.
너무 오버하지 않으면서 상대가 거절해도 민망치 않을 말.
나는 따스한 계획을 세운다. 우선 메시지의 시작은 '보고 싶다'로 해야지. 그리고 그 다음에는 가볍고 푹신한 말을 써야지. 오래도록 수많은 사람과 카톡을 주고 받았는데도 막상 말을 고르려니 어렵다.
어떤 말을 써야 하는 걸까? 보고 싶다는 말 다음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