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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자마카롱 Jun 28. 2020

와인이 먹고 싶어서 라면을 끓인 날


라면 좋아하시나요?


하긴, 라면 안 좋아하는 사람은 없겠죠. 각자 자기가 좋아하는 라면의 종류나 조리법이 다를 뿐.

파송송계란탁 스타일이어도, 계란을 넣을지 말지, 계란을 불어넣을지 반숙으로 할지 혹은 완전히 익힐지.

심지어, 라면 수프를 먼저 넣을지 건더기 수프를 먼저 넣을지. 깊은 맛을 위해 다진 마늘 한 숟갈을 집어넣을지.

면을 꼬들꼬들하게 먹는 사람부터 면이 죽이 되도록 푹 퍼지게 먹는 스타일도 있고요. 혹은, 우유나 치즈를 넣은 부들부들한 라면, 청양고추를 송송 썰어서 알싸한 입맛이 돌게 하는 라면까지. 우리가 모두 미슐랭 스타 셰프는 아니어도 나만의 끝내주는 라면 레시피 하나쯤은 있는 민족이 바로 우리 한국인들인 것 같아요. 특히나, 직장생활을 하다 보면 속 풀어주는 해장라면 하나쯤은 특별한 레시피가 추가되죠.



저의 해장라면 레시피

저는 파와 고추를 약불에 달달 볶아서 파 고추기름을 내어 끓인 후 마지막 1분을 남기고 집에 있는 액젓을 두어 번 휘휘 둘러주고 토마토 하나 정도를 썰어 넣어요. ‘진짜 속 풀리게 먹고 싶은 날’은 이렇게 끓인 후, 불을 끄고 숙주나 양배추 잘게 채 썬 것을 한 움큼 넣어주고 뚜껑을 닫아서 30초 정도 두어요. 아삭아삭한 식감이 고대로 살아있으면서 라면과 어우러지는데... 진짜 죽음이죠. 쌀국수 국물에 숙주를 추가해서 폭 담가 먹는 기분이랄까요.

집에 남은 토마토와 액젓을 추가해서 끓은 라면. 채 썰은 양배추는 바닥에 숨어있어요!


아침에 그걸 먹을 수 있다고?


술 먹고 다음 날, 제가 아침에 늦잠을 자고 일어나 슬렁슬렁 이렇게 해장 라면을 끓여 먹으면 “아침에 그걸 먹을 수 있다고?" 하며 신기해하던 저희 집 프랑스 남자는 저에게 이렇게 라면 먹는 법을 배워서, 비가 오는 쌀쌀한 날이면 아침부터 라면을 찾아요. 이젠 비 오면 비가 와서, 추우면 추워서 라면을 찾는 고랑이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가끔 귀여워서 웃게 돼요. 라면이 떨어져 갈 때쯤이면 알아서 종류별로 본인이 장바구니에 라면을 담아오는 센스도 생겼고, 나름 본인의 '고랑이 평점 시스템'까지 만들어서 새로운 한국 라면을 소개해주면, 본인 마음속 점수와 등수까지 매기곤 하더라고요. (프랑스 남자가 가장 좋아하는 라면은 '참깨라면'과 '나가사끼 짬뽕' 그리고 '신라면' 이 예요.) 아, 냉장고에 김치가 떨어지지 않게 항상 체크하는 것도 프랑스 남자의 몫이에요.




어제오늘, 이틀 동안 800km 정도 운전을 하고 집에 돌아오니 좀 피곤하더라고요. 오는 길에 비도 꽤 오고 날도 추워져서 집에 오니 으슬으슬한 한기가 바닥에서 올라오는 게 느껴져서 뜨끈한 국물 생각이 간절했어요. 저녁을 먹어야 하는데 요리를 하기는 좀 귀찮고, 와인도 한잔하고 싶어서 라면 한 봉지를 탁탁 꺼내어 냄비에 끓이면서 얼마 전에 사 왔던 와인을 한잔 따랐어요. 엄마가 이 모습은 보시면, '밥을 먹어야지! 라면이 밥이 되니?'라고 하시겠지만, 오늘 하루쯤은 이해하실 거예요.



제가 선택한 와인은 호주의 좋은 쉬라즈(Shiraz)를 화이트 와인으로도 만나볼 수 있는 비오니에(viognier)와 함께 숙성시킨 레드와인이었어요. 산지오베제종 와인 중에서는 한식과 잘 어울리는 와인이 많고,  제가 사 온 와인 중에서도 산지오베제 와인이 두 병 정도 있었지만, 테스팅했던 기억을 더듬어서 조금 다른 선택을 해보기로 했어요. 오크향과 탄닌이 강하지 않고, 쉬라즈의 특유 체리 향이 어리지만 화사함도 있고(정말 가벼운 쉬라예요), 살짝 후추 향이 올라오면서 입이 깔끔해지는 느낌이 있었거든요.


라면과 와인. 어떤 조합일지 손 모으고 기대하는 프랑스 남자.

왜 라면들은 하나 끓이면 부족하고, 두 개 끓이면 많은 걸까요. 라면 두 개로는 무언가 저녁 식사로 부족한 것 같아서, 와인 한잔을 마시며 라면을 끓이면서 찬밥이 있나 찾아보는데, 찬밥도 없네요. 문득 어릴 때, 엄마가 라면을 끓이시면 찬밥이 없으면, 냉동실에 남은 떡국 떡이나 명절에 전 남은 것을 라면에 넣어 주시곤 했는데 그래서였나 봅니다. 저의 요리조수 고랑이에게 냉장고에 남은 볶음국수로 김말이를 같이 해 먹자고 부탁해보았어요. 저는 라면을 끓이고, 고랑이는 집에 남아있던 라이스페이퍼에 물을 묻혀서 볶음국수와 조미김 한 장을 넣고 월남쌈을 싸듯이 말아서 프라이팬에 구워줍니다. 친한 친구들에게 이 방법을 소개해주니, 다들 에어프라이어를 사용해서 조리하거나 남은 잡채에 매운 소스를 넣어서 만드는 등 응용을 참 다양하게 잘하더라고요.


라면과 함께 먹었던 김말이. 집에 잠자고 있는 라이스페이퍼에 남은 잡채와 김을 돌돌 말아서 프라이팬이나 에어프라이어에 구워주시면 돼요.

얼큰한 라면 국물에 쫄깃쫄깃 바삭한 김말이. 그리고 좋아하는 와인 한 모금을 좋아하는 사람과 나누는 행복에 따뜻한 국물에 와인을 마시면서 몸 아래서부터 올라오는 뜨뜻함이 집을 가득 채웁니다. 누군가는 그러더라고요.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안주는 '사람' 이라고요. 라면은 자취하면서 늘 혼자 참 쉽게 끓여 먹고 자주 먹는 메뉴였는데 누군가와 함께 이렇게 먹을 때면 아직도 기분이 몽글몽글해지기도 하고, '내가 누군가와 함께 밥을 먹으며 살고 있구나!'를 새삼 깨닫게 됩니다. 아직은 혼자 마신 와인병과 혼자 끓여 먹던 라면 봉지 수가 월등히 많은 제 인생이지만요. 물론 가끔 저 혼자 집에 있을 때 고랑이는 매워서 입도 못 대는 라면을 끓여 먹으며 눈물 콧물 다 빼는 일탈은 가끔 하고 있어요.


와인과 음식을 매칭하는 도전들은 참 신기한 것 같아요. 책이나 신문 기사로 만나는 와인 지식이 주는 해박함과 머리로 하는 페어링도 좋지만, 가끔 제가 맛보고 느낀 감각을 살려서 음식과 함께 와인 한잔을 할 때 기대 반 걱정 반 하면서도 시도하는 그 느낌이 좋더라고요. 항상 이런 페어링이 완벽하지도 성공적이지도 않고, 개인의 취향은 늘 다르기 때문에 더 재미있는 것 같아요.


참, 라면은 물론, 잔치국수나 쌀국수와 먹는 게 무겁지 않은 레드와인은 (보졸레 피노 누아, 산지오베제 등등) 제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조합이에요. 국수류와 와인을 조합하는 게 흔한 매칭은 아니고, 사실 국수류들은 음식 자체의 텍스쳐나 단백질이 풍부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저는 가끔 와인도 뜨뜻한 국물의 면류가 당기는 날이 있더라고요. 그리고 이렇게 좀 모험이다 싶은 매칭들은 처음 마셔보는 와인보다는 테스팅이나 이미 한 번쯤은 한 병을 마셔본 와인들로 해보시는 것을 권장해드려요. 그 와인에 대한 애정이 좀 더 샘솟는 것을 느끼실 수 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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