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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자마카롱 Sep 04. 2020

금요일의 행복, 묵은지 꽁치찜

때는 2015년. 저는 모 갤러리에 서류 심사를 거친 뒤, 인터뷰를 보러 갔어요.

3명의 인터뷰어와 1명의 인터뷰이(저)로 진행되었던 인터뷰는 한 20분간 커피 한 잔씩을 앞에 두고 갤러리의 카페에서 분위기가 꽤 좋게 진행되었어요. 그곳 총괄 매니저였던 L이 인터뷰를 마무리 지으며 악수를 청하면서 저에게 말합니다.

총괄 매니저 : 참, 너(유자마카롱)가 프랑스어를 할 줄 안다고 들었어. (오른쪽에 있는 사람을 가리키며) 여기는 우리 팀 E이고, E는 프랑스인 이야. E, 앞으로 지나가다 유자 마카롱 보면 프랑스어로 수다 떨면 되겠다! 
E :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응. 그럴게.(정적)

저에게 손을 흔들며 활달하며 즐거운 기운이 느껴지는 L의 옆에는 조금은 뚱하다 못해 인상을 팍 쓴, 심각한 표정의 커다랗고 하얀 곰같이 생긴 E라는 남자가 서류를 유심히 보고 있었어요. 저야 ' 아니…. 내가 뭐 잘못했나…? 어쨌든 인터뷰가 화기애애하게 잘 진행되었으니 다행이다' 하며 적당히 웃는 얼굴로 인사를 하며 자리를 떠났죠. '백곰같이 생긴 E라는 남자' 때문인지 아니면 그냥 인터뷰 후에 좀 긴장이 풀리면서 나온 저의 엉뚱함 때문인지, 제 머릿속에선 한동안 잊고 지내던 한국산 백곰 표 밀가루 패키지가 생각나서 혼자 깔깔대며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어요. 그리고 몇 년 뒤, 그 E라는 인상파 백곰은 지금 오늘 저녁 메뉴인 묵은지 꽁치찜을 기다리며 한국어 공부를 하는 저희 집 고랑이가 됩니다.

묵은지꽁치찜이 끓여지는 동안 한국어 공부 중인 고랑이와 저희 집 고양이 맥주.
묵은지 꽁치찜


조금 넉넉히 씻어둔 쌀뜨물에 작은 크기의 다시마 서너 장을 넣어 다시마 물을 만들어 줍니다. 무를 납작납작하게 썰어서 냄비 바닥에 깔아준 뒤, 통조림 꽁치를 묵은지로 이불 덮어주듯이 넣어줍니다. 남은 김칫국물과 다시마 물을 자작하게 부어주고, 냄비 뚜껑을 닫고 중불에서 묵은지 간이 밸 정도로 졸여줍니다. 한 번 묵은지 찜이 식으면 파를 넣고 먹기 전 한 번 더 끓여주면 무 끝이 뭉뚝해지면서, 무 안쪽까지 간이 정말 쏙쏙 배어들면서 밥에 올려 먹으면 정말 딱 좋은 묵은지 꽁치찜이 완성됩니다. 어릴 적에는 단맛을 좋아하는 동생과 생선 비린 맛에 유난히 민감한 저 때문에 어머니가 유자청 한 스푼을 넣어 주시곤 했는데, 저는 집에 있던 레몬즙을 내어 쪼르륵 뿌려주었어요.


첫 번째로 보글보글 끓이고 있는 묵은지 꽁치 찜.


한 번 더 끓여서 완성입니다.

묵은지도 좋아하고, 돼지고기를 도톰하게 썰어서 들기름을 두르고 푹 끓인 묵은지 찜도 워낙 좋아하는 고랑이.

묵은지 꽁치찜 냄새에 신이 나서 수저를 꺼내고, 맥주를 한 병 집어 들어서 잔을 채웁니다. 묵은지를 올린 꽁치 한 입, 맥주 한 입을 번갈아 먹더니 그릇 밑바닥까지 싹싹 밥을 비벼 먹네요. 다시 찜을 가지러 간다더니, 김칫국물이 쏙 밴 무를 숟가락으로 잘라 밥 한술과 함께 떠서 아주 행복한 표정을 짓습니다. 다른 반찬이 더 필요 하나고 고랑이에게 물었더니, 김 한 팩만 더 있으면 딱이겠다고 합니다. 사실 이거 하나에 밥 한 그릇이면 더 필요한 게 없죠. 행복이 별게 있나요. 금요일 밤, 묵은지 꽁치찜에 밥 한 그릇이면 그게 행복인 것을요. 저녁을 먹고, 배 한 쪽을 잘라서 먹으면서 고랑이에게 물어봅니다.


"그나저나, 처음에 나 인터뷰하는 날, 왜 그렇게 인상썼던 거야?"



한국에서 나왔다던 곰표 밀맥주도 언젠가는 먹고 싶네요. 왠지 묵은지 꽁치찜이랑 잘 어울릴꺼 같은데....(이미지 출처: 옥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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