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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브림 Jul 03. 2024

브로드웨이 퇴장문처럼

발렌시아 3. 예술과 과학의 도시


Oneday more

Another day

and another destiny






뉴욕의 브로드웨이를 찾은 적이 있었다. 그 당시 내가 봤던 공연 티켓을 운동화 상자 가득 모았을 정도로 뮤지컬 덕후였던 나는 뮤지컬의 심장과도 같은 그곳에서 <레미제라블>을 관람했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공연 자체야 이미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내용이었고, 배우들의 기량 역시 뛰어났지만 내가 넋을 놓을 정도로 좋았던 부분은


기가 막히게도

공연이 끝나고 모두가 퇴장할 때였다




브로드웨이의 대다수 뮤지컬 극장들은 우리나라 같이 높은 건물에 넓은 로비가 있지 않았다. 1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곳들이 대부분이기에 입장을 위해 건물 안에서 밖에까지 줄을 서야 하는 경우도 많았다. 내가 <레미제라블>을 관람했던 극장도 우리가 생각하는 지상 1층에 객석 1층이 있었다.


공연이 끝나고 배우들이 인사를 하는 커튼콜에서 1층 중앙쯤에 앉아 있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치고 있었다. 그만큼 공연은 훌륭했다. 그때였다.


갑자기 양쪽 벽면 전체가

밖으로 활짝 열렸다




어두웠던 극장으로 거짓말처럼 뜨거운 여름 햇살이 들어왔다. 내가 서 있던 객석 1층은 단숨에 행인들이 바쁘게 지나다니는 현대 뉴욕의 거리와 연결 됐고, 무대엔 아직 처참한 프랑스혁명의 잔해가 남아 있는, 모든 시대를 초월한 시공간의 중심이었다.


퇴장문 앞에 서서 무대 위 목조 구조물 바리케이드를 힐끗 바라보며 두 시간 남짓 역사적 혁명의 간접 체험이라는 두근거림에서 깨어나 현실의 거리를 내 발로 밟기까지 단 한 걸음이면 족했다. 




겪어본 적 없는

짜릿한 이질감이었다 






Valencia 

chapter. 3



발렌시아에는 저녁이 다 되어서야 도착했다. 에어비앤비 호스트를 만나기 위해 근처 지하철 역으로 갔다. 이 꾸물텅거리는 메트로 사인을 보면서 어쩌면 이 도시는 재밌는 시도를 하고 있는 곳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내가 여길 찾은 이유,

건축물 때문이거나.




그러나 새로움에 대한 기대로 가득찬 도시의 골목길은 어쩐지 걸으면 걸을수록 낡은 예술적 감성들을 폭죽처럼 터트리고 있었다.








지저분함 속에 박제된 묘한 긴장감. 표현의 자유가 있지만 동시에 억압받고 있는 듯한 양면적 기분. 새로움 속에서도 어딘가 많이 낡아버린 것만 같은 이곳은 우리나라로 치면 놀거리가 별로 없는 홍대 같았다.



번쩍거리는 네온사인 하나 없이 슴슴한 맛이 감도는 발렌시아 골목길에서 마주한 벽면들은 MSG처럼 자극적이고 과감한 예술적 흥분으로 가득했다. 어느 간판 없는 을지로 와인바처럼 진정 발렌시아를 즐기는 자들은 어딘가 비밀 아지트에서 몸을 흔들며 자기만의 세계를 가꿔 나가고 있지 않을까 상상했다.




신호등이 초록불로 바뀌고 길을 건넜다

저 멀리 미래 도시를 연상케 하는 건물들이 보였고

이제야 제대로 왔구나 싶었다







2017. 예술과 과학의 도시 - 건축가 산티아고 칼라트라바 (Santiago Calatrava)


마치 힙합 페스티벌을 갔다가 바로 우주여행을 가는 듯한 이 극적 만남에 정신이 아찔했다. 분명 이번 건축 기행을 준비하면서 발렌시아의 명물, 예술과 과학의 도시는 미리 조사했던 바였으나 그곳으로 향하던 길의 예상치 못했던 예술적 분위기와의 매치는 매우 대비적이었다.


건널목을 경계로 짜여진 힙과 우주

그곳에도 브로드웨이 극장의

퇴장문이 열리고 있었다



야트막한 물가 위에 고래의 뼈와 같은 자연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건물들이 지어졌다. 짙은 그라피티의 향수 속에서 빠져나와 한동안 눈앞의 비현실적인 광경을 멍하니 쳐다봤다. 이질적 시공간의 중심, 정확히 내가 브로드웨이에서 느꼈던 감정과 동일했다.








예술과 과학의 도시를 이루고 있는 여러 개의 건물에는 각각 과학 박물관, 수족관, 오페라하우스 등의 시설이 갖춰져 있었다. 나는 건물 안을 들어가 보는 대신 건물 외관을 관찰하고 주변 사람들을 바라보는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길가엔 관광하는 사람들, 자전거를 끌고 나온 사람들, 아이 손을 잡고 신기한 구경거리를 보여주고 싶은 가족들의 소소한 일상들로 가득했다.  




건축가 칼라트라바의 이 수중도시는

그저 '짓는다'는 건축의 개념보다

한 단계 위에 있는 것 같았다


건물의 안과 밖은 물론, 건물과 건물 사이를 연결하는 길에서도 사람들은 저마다의 시간을 보냈다. 그 물리적 연결고리에 불특정 다수의 삶이 고스란히 녹아 있었고, 그런 자잘하고도 일상적인 공간 경험이 모여 새로운 도시를 창조했다.



건축 공간의

확장성이 느껴졌다








도시 전체를 가로지르는 유연하고도 과감한 곡선의 흐름에서 잠시 지하철을 타고 바라봤던 서울의 풍경이 떠올랐다. 그 네모 반듯하고 딱딱한 건물들에서 나는 어떠한 생기도 감동도 느낄 수 없었다. 


생각해 보면 이번 여행으로 스페인을 한 바퀴 돌면서 단 한 번도 천편일률적인 대한민국 아파트 단지 구성과 같은 건물들을 본 적이 없었다. 건축가의 이런 과감한 도전은 단순히 관광객을 불러 모으는 효과를 떠나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무한한 상상의 기회를 만들어준다고 믿는다.




우리가 무엇을 보고 살아가는지는

상당히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발렌시아에서 바르셀로나 대성당의 모습을 기억하며


내가 볼 수 있기에 느낄 수 있고,

느낄 수 있기에 창조할 수 있다



건축이 나에게 영감을 주는 이유는 도면 속 계단 높이를 몇으로 할 것인 지, 지붕의 곡선을 어떻게 창문으로 붙여 낼건지 와 같은 현실적인 계산이 아니라 그저 건물의 끝에서 끝까지를 하나의 창조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제일 아래부터 제일 꼭대기에 이르기까지 무수히 들였을 인간의 노력과 시시각각 변하는 햇빛에 따라 고정되고 변화하는 끝없는 이미지의 출렁임 속에서 생각은 조금 더 유연해지고, 마음은 조금 놀라기도 하며, 감흥이라는 것을 갖기 때문이다.




보고 느끼는 것,

그것이 나에겐 예술의 전초전이었다






감히 우리나라에 조금 더 도전적인 건축가들이 많아지길 바란다. 힙한 감성이 넘치던 길에 갑자기 우주선이 꽝! 하고 들이닥치더라도 그것을 하나의 예술적 시도이자 멋진 이질감으로 받아들여줄 사람들이, 또한 수많은 퇴장문들을 열고 나가면서도 자신의 것으로 기꺼이 재창조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아지길


진심으로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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