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함보다 충만함이 흐르는 발리
내가 설정한 ‘고독’, 그 스트레스 청정지역에서 마주하기 어려웠던 것들을 더 확연히 보기도 했다. 나의 고독은 위로가 두려움이 많이 섞여있었다.
예를 들면 외로운 마음에 들지도 않는 남자가 말을 걸어오면 대화를 계속 이어가는 나. 무슨 일 일어나면 도와 달라고 하려고 게스트하우스 주인과 직원들에게 괜히 친절한 나.
작은 돈에 절절매다가 우울함에 쇼핑을 해버리는 나. 스쿠터 탈 때 앞에 놓인 길에 대한 집중보다 옆에 있는 위험요소들에 더 집중하는 나, 예를 들면 지나가는 차와 부딪히면 얼마나 아플까, 저 길에 움푹 파인 웅덩이 때문에 넘어지지 않을까 와 같은 것.(그런 것들을 안전하게 지나가려면 더 앞을 보려 하고 더 빠르게 속력을 내서 지나가야 넘어지지 않는다.) 서핑할 때 ‘파도 타는 즐거움’보다 ‘파도에 말리면 어떡하지’ 두려움에 더 민감한 나.
만약 이 시기에 주변에 깐깐하고 짜증 내는 사람이 많았다면 내 외로움과 두려움을 끝까지 바라보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나도 짜증내고 불평하면 조금씩 해소가 되니까 말이다. 그런데 너무나도 너그러운 발리 사람들에 둘러싸인 환경에서는 그 외로움과 두려움을 피할 곳도 없었고, 해소할 대상도 없었다. 짜증내면 받아주고 힘들어하면 옆에서 지켜봐 준다. 발리 사람들은 늘 바라보고 기다려주다 도움이 필요하면 흔쾌히 도와준다.
와룽(발리 식당/발리 pub)에서 이상한 외국 남자와의 대화를 마치고 와룽에 멍하니 앉아있으면 “은하 왜 계속 대화했어? 정말 니 스타일이야? “라고 물어봐 준 저스틴, 이 옷 저 옷 다 입어봐도 늘 웃고 있던 옷가게 직원, 내 기분이 좋아 괜히 친절할 때도 있고 아끼는 꿀이 없어졌다고 먹을 걸로 치사하게 짜증 낼 때가 있어도 미소로 다 응대해줘서 나를 반성하게 만든 게스트하우스 스텝 와얀, 아기를 포함한 3명의 가족이 탄 스쿠터를 뒤에서 들이받았는데도 넘어진 나를 일으켜주며 내 스쿠터 시동까지 다시 걸어주던 세 가족의 아빠, 큰 파도 앞에서 망설이는 내게 한 번도 소리지르지거나 재촉하지 않은 우리 서핑 선생님 아욕이 스쳐 지나간다.
다들 투명해서 내 생각과 마음이 앞에 있는 발리 사람들을 통해 저 너머로 흘러 넘어갔다. 비난받지 않고 수용된 기분이었다. 이 발리 사람들 덕분에 나의 마음 곳곳을 끝까지 잘 읽을 수 있었다. 저 남자는 못생겨서 싫다, 미치도록 배고프다, 옷으로 욕망을 해소하고 싶다, 스쿠터를 박아서 너무 미안하고 네가 화낼까 엄청 겁먹었었어’라는 솔직함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외모를 보면 안 돼, 배고픔은 부끄러운 것이야, 욕망하면 안 돼, 쫀 거 티 나면 안 돼’와 같은 제약들이 사라졌다. 처음엔 외로움과 두려움에 점철되어 있던 고독에서 고독만 온전히 남기 시작했다. 내 마음의 소리를 비난하지 않고 다 들어주게 되었다. 발리 사람들은 꼭 엄마 같았다. 우리 엄마는 조금만 잘못해도 ‘털 팔이’라며 나를 혼냈는데 발리 사람들은 괜찮다고 했다. ‘그럴 수 있다’고 늘 말해주었다. 고독하고도 완벽하려 했던 하루는 그렇게 발리 사람들의 도움을 많이 받으며 충만해졌다.
발리에 오기 전 건강한 마음으로 사회적인 성공을 거두고 그 뒤에 오는 편안한 마음을 누려야지 했는데 발리에 있으면서 이미 큰 성공을 한 것 같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말하고 싶을 때 말하고 침묵하고 싶을 때 침묵한다. 춤추고 싶을 때 춤추고 멈추고 싶을 때 멈출 수 있다. 내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게 명확해서 다른 의견도 흘려보낼 수 있다.
나를 안으로도 밖으로도 만나 참으로 편안하다. 나약함을 말할 용기도 있고 하고 싶은 걸 조금씩 해내 갈 수 있는 힘도 있다. 사회적으로 해야 하는 일, 내 것이 아닌 탐나는 일에 가끔 에너지를 쓰긴 하지만 이내 곧 내 마음이 지속적으로 향하는 일에 집중할 수 있다. 감정의 수용은 이렇게 정서적 안정감을 넘어 효용성에도 영향을 끼친다. 이제 고독한 시간을 길게 두지 않아도 나를 만날 수 있다. 잠시 눈을 감거나, 바람을 느끼고, 호흡을 하면 발리에서 모든 경험과 감각들이 깨워 놓은 몸과 마음을 만날 수 있다. 발리 이후의 삶은 여전히 완벽보다 충만함을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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