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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하 Oct 30. 2022

요가와 서핑, 그 사이의 발란스

쾌락과 선 모두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몸과 마음의 이야기.

나는 요가를 먼저 시작했지만, 취미가 필요한 순간이 왔다. 그리고 서핑을 시작했는데 요가와 다른 서핑이 매력적이었다. 우선 요가원에 가면 여자가 바글바글했다. 아무래도 엄마와 관계가 좋지 않아 여자를 별로 안 좋아하는 습이 있는데 서핑을 가면 남자가 많아서 좋았다. 여자와 남자가 섞이는 게 아무렇지도 않아서 좋았다. 다 같이 몸에 쫙 붙는 옷을 입고 물개처럼 놀아도 야하지 않아서 좋았다. 연애도 빈번이 일어나는 곳 같았다. 요가원에는 남자 선생님이나 남자 학생이 적어서 요가원 안에서 커플이 되면 그렇게 뒷말들이 많은데, 이곳은 연애가 너무 자주 일어나서 아무렇지도 않은 곳이었다. 자연스러워 보였다.


요가원에서는 깨달음에 관한 것, 앎에 관한 것, 평정심에 관한 것, 어른스러움에 관해서 자주 얘기들 하셨다. 나의 첫 요가원 분위기가 그렇게 딱딱했다. 두 원장님은 마음의 소리를 따르는 분들 같았는데, 학생들은 요가를 시작하면 굳어있는 균형에 대해 자주 얘기하는 것 같다. 실패하지 않기 위해서, 실수하지 않기 위해서, 많이 알고, 평정해지고, 어른스러워지는 일들이 멋진 일들이라 생각하는 분위기였다. 그때의 내가 그래서 그런 에너지를 만난 걸까? 26년 동안 그렇게 살아서 그런 에너지를 만난 걸까? 숨 쉬려고 시작했던 요가에서까지 답답함을 느끼니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그런 에너지에 질리라고 이 요가원으로 나를 누군가 보낸 것 같았다. 질리도록 있으면서 다른 에너지로 넘어가라고 누군가 보낸 것 같았다.


질리는 3년의 시간이 흐른 후 나는 요가를 하면서 나를 숨기는 일, 내 몸을 부정하는 일은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았다. 나를 더 들여다보고, 원하는 걸 더 정확히 보고 싶었다. 그러고 나서야 나를 숨길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요가를 공부하다 보면 에고라는 말을 많이 듣고 에고를 내려놓으라 하는데, 에고가 뭔지도 모르면서 내려놓을 수는 없다는 말이 있다. 집착도 끝까지 가봐야 내려놓을 수 있다는 말처럼 내가 잡고 있는 에고가 무엇인지 두 눈으로 끝까지 주시해야 한다. 사실 요가에도 ‘drishiti’, ‘시선’의 중요성을 늘 얘기한다. 하지만 안내가 가득한 수업 안에서는 늘 성취해야 하는 아사나의 정렬과 부상의 위험을 방지하고자 제한되는 아사나의 정렬이 가득하다. 난 이게 참 싫다. 몸은 다양한데 이론은 늘 제한적이다. 다양한 몸을 설명하는 이론을 늘 찾아 헤매고 찾아내고 있긴 하다. 무튼 나는 몸을 쓸 때는 머리보다 감각에 집중, 몸이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여 보는 것이 좋다. 욕심이 이끄는 움직임인지 숨과 몸이 이끄는 움직임인지 누구나 알 수 있다. 그래서 제한을 풀고 긴장을 풀 때 몸을 더 잘 쓸 수 있다. 그런 바탕이 되어주는 선생님이고 싶다. 무튼 나는 요가에서 부족한 자유에 대한 갈망을 서핑 을로 풀기 시작했다.


서핑을 할 때에는 아무리 이론을 바삭하게 알아도 변화하는 물의 흐름에 몸을 맡기는 것이 가장 우선이었다. 그래서 머리보다 감각에 더 집중해야만 했다. 그리고 시선을 조금만 다르게 두어도 고꾸라지거나 파도의 힘의 중심에서 멀어져 버렸다. 탈 수 있는 파도인지 아닌지, 도망가야 하는 파도인지 아닌지 대충 말고 정확히 보는 연습을 해야 한다. 선생님이 가르쳐주는 것에 의존하다가는 절대로 혼자 서핑할 수가 없다. 그렇게 서퍼는 본능적으로 시선을 연습한다. 에너지를 보는 연습을 한다. 파도의 크기, 길이, 간격, 바람이 부는 방향, 바람의 세기, 조류의 흐름 같은 것들. 착하게 순하게만 멍하니 앉아있다가는 그냥 죽는 거다. 나는 그 점이 참 좋다. 우리는 가만히 있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오래 관찰하고 있다. 서핑을 하기 전에 송정 바닷가에 앉아서 서퍼들을 보며 ‘서퍼들은 해녀복을 입고 왜 물 위에 앉아서 뭐 하고 있는 거지?’라는 생각을 자주 했는데,


그렇다고 요가는 솔직하지 않은 것, 서핑은 섬세하지 않은 것이라 구분 지을 수 없다. 정말 고수가 되면 그 상태 자체일 테니까. 비어있으면서도 꽉 차 있는 에너지일 테니까.강하면서도 부드럽고, 부드러우면서도 강할 테니까. 직관적이면서도 섬세하고, 섬세하면서도 직관적일 테니까. 본능적이면서도 이성적이고, 이성적이면서도 본능적일 테니까. 양적이면서도 음적이고, 음적이면서도 양일 테니까.






나는 주변의 영향을 많이 받는 사람이라 요 가인들의 차분함과 섬세함에 영향을 받기도 하고 받고 싶기도 하고, 서핑 신의 솔직함과 자유분방함을 배우고 싶기도 했다. 그래서 둘 다 한꺼번에 하고 싶었다. 선택적 고독을 택한 3개월 동안 새벽에는 아쉬탕가 마이솔 요가 수련을 하고 오후에는 서핑을 했다. 누구와 길게 말하지 않아도 에너지가 잘 돌아가는 하루였다.


새벽 요가 수련을 하고 나면 오늘 내 에너지가 얼마만큼인지 대면할 수 있었다. 오후 서핑을 하고 나면 자연과 하나가 된 기분에 아무 걱정 없이 잠들 수 있었다. 요가를 하면 내 근육이 어디서 어떻게 움직이는지 하나하나 느낄 수 있었다. 인지할 수 있었다. 파도를 기다리며 보드에 앉아있을 때는 물결들이 몸에 아직 굳어있는 근육들을 살살 달래어 풀어주었다. 처음 입문할 때 쓰는 스펀지 보드와 달리 얇은 하드보드에 앉았을 때 나는 자주 뒤뚱뒤뚱거렸다. 균형 잡기 위해서 골반이 계속 움직여 준 것이다. 그때 몸 스스로 잡는 균형과 회복이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알았다. 인지하지 못했던 부분들이 연결되기 시작했다. 참 고맙다, 우리의 몸.


그러다 체력이 고갈되는 느낌이 왔다. 그리고 서핑이 너무 재미있어졌다. 마침 마이솔 담당 선생님인 데미안도 유럽으로 워크숍을 떠났고 다시 적응하기 귀찮은 터라 오전 요가를 그만두고 서핑만 하기 시작했다. 새벽 서핑을 시작했다. 더 큰 파도가 있는 곳으로 포인트도 옮겼다. 나는 진짜 서퍼가 된 기분이었다. 매일 아침 보드를 들고 바다로 향했다. 새벽 5시 30분쯤이면 깜깜했던 밤이 지나고 푸르스름한 새벽이 온다. 새벽 6시에는 해가 뜨고 가끔은 달과 마주해 있다. 다들 어찌나 일찍 일어나는지 새벽 6시면 바다에는 이미 10-15명 정도의 서퍼가 파도를 타고 있다. 새벽 마이솔 풍경이 생각난다. 새벽 7시 깜깜한 타우 요가에 그렉 선생님과 수련했던 장면. 장소만 옮겼지 아침의 기운은 늘 신비롭다.





매일 새벽 서핑을 하는 사람이 되면서 나의 본능에 대해 더 솔직해졌다. 미소 가득한 요가원에서 빠져나온 바다에는 무뚝뚝한 표정 반, 미소 반이었다. 미소 짓지 않아도 되는 사실에 마음이 편했다. 위험할 때나 짜증 날 때 소리 지르는 풍경도 좋았다. 나도 소리 낼 수 있으니까. 나도 짜증 낼 수 있으니까. 경쟁하다 잡은 파도는 너무너무 신이 났고, 길게 탄 라이딩을 보고 소리 질러주는 로컬들 때문에 으쓱할 때도 많았다. 파도 경쟁하다 자꾸 나를 이기는 서퍼에게는 ‘그래 너 인정!’하는 쿨함도 내비쳤다가 또 너무 자기 혼자 다 잡아타면 ‘매너가 없네’라는 평가를 주며 나를 위로했다. 매번 내가 타고 싶은 파도를 멋지게 타는 잘생긴 서퍼를 보면서 ‘쟤는 나랑 좀 잘 맞겠네’ 하는 착각도 하며 눈을 자주 마주쳤다. 그리고 우린 친해졌고, 썸을 타던 1달 동안 서핑을 자주 같이했으며 혼자였으면 못탈파도를 함께 타며 정말 즐거운 서핑을 했다. 그 썸은 한국인 여자 친구에게 차여 유령처럼 한국 여자애만 보면 곁을 떠도는 한 남자의 질척거림으로 끝났지만 말이다.


우연히 알게 된 한국인 서퍼 사장님은 만난 지 얼마 안 되었는데도 참 편했다. 종종 서핑을 같이 갔는데, 나는 서핑을 할 때 머리를 쓰고 싶지 않다고 서핑에 아무런 말도 하지 말아 달라 부탁했고 사장님은 정말로 그랬다. 직업병으로 지적을 참기 참 어려웠을 텐데 말이다.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사장님은 불금에 같이 놀다가도 피곤하면 먼저 집에 간다고 편하게 말해주어서 나도 피곤하면 집에 가는 법을 배웠다. 사장님은 서핑 강습 후 늘 낮잠, 그리고 짐에 가서 근육 챙기기를 반복하는 삶을 살았는데, 스님 같았다. 절제된 삶. 사장님은 체력이 안 좋아서 그렇다 했다. 내가 본 사람 중에 가장 깨끗하고 솔직한 사장님은 만나면 참 편안해지는 제주가 있는 사람이다.  


가끔 본능과 욕망을 따르다 보면 시간을 잊는다. 쾌락과 몰입 중 쾌락에 빠졌던 날의 서핑은 5시간까지 이어진다. 그렇게 파도가 좋은 날엔 5시간씩이나 떠있다가 눈알까지 화상을 입곤 했다. 정말 새까맣게 탔고 피부도 눈도 햇빛에 민감해지기 시작했다. 인도네시아 말로 말을 거는 발리 사람들이 늘어났다. 나는 아주 긴긴 휴가여서 즐거운 파티가 있다는 게스트하우스 친구의 얘기를 들으면 곧장 따라나가곤 했다. 물 위에서도 춤추고 땅에서도 춤추고, 한없이 춤췄다. 알다시피 잘 췄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이런 말까지 붙여야 하는 것이 난 좀 불편하다. 춤췄다. 춤은 춤이다. 잘 추고 못 추고 분명 존재하지만 춤은 춤일 때 가장 아름답다. 그렇게 끊임없이 몰입하고 흥에 겹고 흘러 다니던 어느 날 나랑 굉장히 비슷하게 생긴 일본풍의 남자 서퍼가 눈에 들어왔다. 깔끔하게 딱 2시간 정도 타고 나갔다. 발리 첫 숙소 주인 샌디는 나 이전의 게스트가 일본 남자인데 나처럼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고 서핑을 좋아하는 친구였다며 나와 비슷하다 말해주었다. 다음 숙소에서 지낼 때 잠시 놀러 온 첫 숙소 주인 샌디는 그 친구도 이 숙소로 옮겼다 말해주었다. 며칠 뒤 숙소에서 우연히 마주쳤고 이름을 나눴다. 라이언. 우리는 그 동네를 좋아하는 것 같았다. 모든 숙소가 여기였으니. 바투 볼롱 메인에서 조금 멀지만 우붓을 가는 길이라 산의 기운도 느껴지는 곳이었다. 라이언은 길에서 마주치면 젠틀하게 내 이름을 부르며 다가와 간단한 안부를 물었다. 목소리가 참 안정적이었다. 라이언도 예전에 아쉬탕가를 했고, 종종 인도를 가는 것 같았다. 늘 절제되어 있으면서도 ‘나를 기분 좋게 하는 옷을 입으면 잘 어울리지’라는 말을 하며 마음의 소리를 늘 따르는 라이언은 엉망진창 발리에서 중심이 서있는 몇 안 되는 사람 같았다. 너무 괜찮아 보였다. 친해지고 싶었는데 다가가기 어려웠다. 그래도 좋았다. 문득 만나 잠시 나누는 대화에 내 마음이 편안해졌다. 욕망의 전차를 타면 멈출 수 없는 발리에서 중심이 선 라이언을 보니 나도 그러고 싶어졌다. 그리고 나도 서핑에다가 절제와 만족이란 단어를 붙여보기 시작했다. 내  몸이 상하지 않을 만큼의 서핑, 내 마음이 상하지 않을 만큼의 관계를 떠올리기 시작했다. 라이언이랑 친해지지 못한 마음 밭에는 ‘나는 파혼도 했고 엉망진창이니 저렇게 멋지고 소중한 사람과 친구가 될 수 없어. 게다가 사심도 있으니 안돼’라는 생각이 있었다.


그러다 라이언은 발리를 먼저 떠났다. 가기 며칠 전 숙소 계단에서 만나 내일 미국으로 돌아간다며 “I hope your everything is going well “이라는 말을 전해주었다. 영어가 짧기도 하고 갑자기 너무 속상했던 나는 똑같이 “I hope your everything is going well”이라고 했다. 그리고 꼭 안아줬다. 절제와 만족이라는 바통을 넘겨받은 것 같았다. 나는 늘 라이언이 궁금하다. 라이언이 또 발리에 온다면 좋겠다.





수행이라는 틀 안에서 딱딱해지는 나를 발견하고 자연스럽게 움직이고 싶어 온 발리에서 그 정도가 지나쳐 보니 저절로 절제가 하고 싶어진 것이 참 신기하다. ‘절제’는 다이어트처럼 무엇이 되고 싶고, 성취하고 싶어 하는 마음의 시작점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나의 몸과 마음이 소중해 시작하게 되는 ‘절제’도 존재했다. 나를 풀어주니 절제라는 마음이 떠오른 것이다. 자연스럽게 마음을 흐르게 하면 마음을 편하게하려는 움직임이 이내 곧 따라온다. 몸을 쓸 때도 마찬가지다. 움직여지지 않는 부분으로 힘을 주면 다친다. 몸이 움직여지는 방향으로 충분히 움직였을 때 그 공간이 살아나고 반대로 수축하거나 뻗어낼 여유를 가진다. 그렇게 몸과 마음에는 제 생명력이 있다. 요가에서 배운 이론들은 학습 또는 성취의 대상이 아니라 몸과 마음을 풀면 내 안에서 떠오르는 단어들이었던 것이다.  서핑의 끝에서 다시 요가매트를 그리워하고 ‘선함’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지만 무엇보다 크게 얻은 것은 서핑을 통해 내 몸과 마음에 대한 신뢰가 깊어졌다. 파괴도 내 마음 안에서 일어나고 선함도 내 마음 안에서 일어난다. 모두 필요에 의해 일어난다. 일어나는 것을 보고 있으면 달라질 것도 없다.





pratyahara 프라티 야하라
마음이 무엇인가를 갈망하고, 슬퍼하고, 어떤 것에 대해 불쾌해한다면 거기에는 속박이 따른다. 요기는 쾌락보다는 선을 선호한다. 그들의 욕망을 따르는 사람들은 선보다 오히려 쾌락을 추구하여 인생의 가장 중요한 목표를 놓치게 된다. 요기는 현재의 그 상태에서 기쁨을 느낀다. 그는 언제, 어떻게 멈추어야 하는지를 알기에 평온 속에서 사는 것이다.

<요가 디피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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