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복과 변주

플래너

by 우즈

애 로드맵을 짜다가 내 로드맵을 잃었다. 스케줄과 루틴을 무너뜨린 채 아이만 챙기는 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와 같다. 나부터 제대로 살아야 가정이 바로 선다. 내 삶과 아이 교육에 대한 힘 조절이 어렵지만 한 번 삐걱거릴 때마다, 내가 먼저 똑바로 서려고 정신을 차리는 수밖에 없다.


안 되겠다. 이럴 땐 문방구를 간다. 신중하게 물건을 하나 골라 결제하려 카운터로 가서 물건을 올려두는데 사장님이 나를 보며 재차 확인하는 뉘앙스가 어쩐지 이상하다.


"이거 일반 노트 아니고, 스터디 플래너라는 건데, 사는 거 맞아요?"


어리둥절한 건 나도 마찬가지다. 스터디 플래너라는 아이템을 내가 모르게 생겼나. 나는 이 물건의 쓰임새를 정확하게 알고 있다. 스터디 플래너란, 보통 수험생들이 쓰는 것으로서, 공부에 대한 목표를 잡고, 그것을 한 달, 한 주, 하루 분량으로 쪼갠 뒤, 오늘 하루 어떤 과목을 몇 페이지씩 공부할 건지, 그것을 달성했는지를 기록하는 노트 아니던가. 수험생이 아니지만 사기로 한 게 확실하다. 그러나 짧은 순간 문방구 사장님의 눈빛과 태도에서 작은 깨달음이 내 속으로 흘렀다. 내 취향이 흔치 않구나. 아줌마가 도톰한 스터디 플래너를 사는 일은 드물구나. 게다가 연회색 플래너와 파스텔 느낌의 연둣빛 플래너가 둘 다 예뻐서 두 개나 산다고 올려놓았으니. 고시생도 이렇게 작정하고 플래너를 두 개나 사진 않겠지. 그러나 플래너를 쟁여놓는 일은 내게 놀라운 일이 아니다. 왜 그런지 적어보자면 아래와 같다.




아줌마에게 스터디 플래너가 필요한 이유

첫째, 내가 버텨야 한다. 내 체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그 어떤 창대한 목표도 이룰 수가 없다. 내가 바로 서야 남도 도울 수가 있다. 식상한 말이지만 운동이 중요하고 외모는 곧 자존감이 된다고 믿는다. 매일 사십 분은 무조건 걸어서 땀을 뺀다. 그걸 기록하는 용도로 쓴다.


둘째, 요즘 같은 세상에 집밥을 굳이 안 해도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엄마, 과자 말고 뭐 좀 먹고 싶어.’라는 아이에게 뚝딱뚝딱 요리해 줄 능력이 안 되는 내 모습이 정말 부끄러웠다. 마음만 먹으면 정보가 쏟아지는 세상에서 이것도 안 하면 직무유기다. 가족의 건강은 적어도 우리 집에서는 내 손에 달렸다. 건강 집밥 레시피를 연구한다. 냉장고를 활짝 열어 사진을 찍는다. 집에 어떤 재료가 있는지 식자재를 파악하고 있는 것이 핵심이다. 상하기 전에 어떤 재료를 처리해야 하는지에 따라 찾아볼 레시피가 정해진다. 분명 그 요리를 하기 위해 한 두 가지 당장 사야 하는 재료도 있을 것이다. 그 행위를 계속 반복하려면 플래너에 적으면 된다.


셋째, 밥 값보다 싼 게 책 값이다. 요즘 같은 세상에 가성비가 이만큼 좋기도 어렵다. 한 끼 밥은 치우면 그만이지만, 책은 읽고 또 읽을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그러나 읽기만 해서는 금방 휘발된다. 읽고 그것에 대해 몇 줄이라도 글을 쓰면 생각하게 된다. 내 생각을 하고 내 삶에서 그 생각을 실천해 보는 데 독서의 궁극적인 목적이 있다고 본다. 간단한 그림책이라도 독서록을 플래너에 쓰는 것이다.


넷째, 쉰다. 루틴에 쉬는 것을 포함해야 한다. 운동 후 쉬고, 글쓰기 후에 쉰다. 쉬어야 다음 행위를 무리 없이 할 수 있다. 쉬는 것도 계획적으로 적는다.


다섯째, 이 네 가지를 반복한다. 똑같은 반복은 없다. 변주가 일어나기 마련이다. 그걸 계속해서 하는 게 인생이라 생각한다. 유지하려면 적는 수밖에 없다.


잘 짜인 루틴을 스터디 플래너에 기록하면 어느새 불안은 저 멀리 가 있다. 오늘도 습관처럼 플래너를 펴두고 보잘것없는 사소한 일도 적어둔다. 깨알같이 적힌 단어와 구절 사이의 빈틈에서 영감의 씨앗을 발견하는 재미는 영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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