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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인애 Aug 05. 2023

즉흥으로 어디까지 출 수 있을까

첫 해외 댄스 이벤트


아시아 오픈에서 가장 재미있던 행사 중 하나는 챔피언들의 춤을 구경하는 것이었다. 잘 추는 사람들의 춤은 보기만 해도 감탄이 절로 나와 넋을 놓고 바라보게 되기 때문이다. 


이벤트에서는 챔피언들끼리 대회를 진행해서 대놓고 구경할 수 있는 시간이 있다. 가장 춤을 잘 추는 사람들인 만큼, 대회를 위해 DJ가 준비한 음악은 다른 레벨의 댄서들을 위한 음악과는 달랐다. 평소에 자주 추는 음악은 팝송인데, 대회를 위해 준비한 음악은 애니메이션이나 영화에 나오는 뮤지컬 음악이었다.


웨스트 코스트 스윙은 이론상으로는 어느 박자에도 춤출 수 있다. 너무 느리거나 너무 빠른 음악에도 출 수 있지만 조금 힘들 뿐이다. 소셜 댄스 때는 DJ에 따라 한 번씩 새로운 음악이 나오면 아이스크림 맛보기 하듯 한 곡 정도는 춘다. 그 음악이 춤추기 적절하거나 맘에 들면 나중에 DJ를 찾아가서 무슨 음악이었는지 물어보기도 한다. 


문제는 듣기는 좋은데 춤추기에는 어려운 음악이다. 가사를 알긴 하지만 춤으로 표현하기가 어려운 음악도 있고 표현할 수 있는 부분이 너무 많은 음악도 있다. 아시아 오픈은 매해 챔피언들의 대회에서는 일부러 독특한 장르의 음악을 준비한다. 



내가 봤던 챔피언 잭앤질(Jack & Jill)에서는 두 곡 중 한 곡이 뮤지컬 음악이었다. 사람들에게 이런 음악에는 어떻게 웨스트 코스트 스윙을 출 수 있는지 보여주기 위해 음악을 선정한 것이다.


뮤지컬 음악은 고전 영화나 유명한 애니메이션 등에서 나오기에 많은 사람이 스토리를 기억한다. 

게다가 관중들이 모두 댄서들이라 음악의 포인트나 가사도 알고 있기 때문에 더 잘 춰야 한다는 부담이 있다.

 그래서인지 모르는 음악이 나올 때는 챔피언도 처음 듣는 음악이라거나 자신 없는 표정이 앞섰다. 하지만 챔피언들은 막상 시작하면 하나같이 대회를 멋있는 무대로 승화시켰다. 





가장 처음 나온 뮤지컬 음악은 <Summer Night>이었다. 이 음악은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이 각자의 여름방학에 대해 친구들에게 이야기하고 친구들이 

“그래서 어땠는데? 더 말해줘”

하고 독촉하면 이어 경험담과 함께 느낌을 말한다. 


영화로 볼 때는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이 같은 경험을 하고 다르게 묘사하는 부분에 시선이 갔었다. 춤에서는 춤추는 사람들이 주인공이니 당연히 주인공에게 시선이 갈 거로 생각했다. 


그런데 무대 뒤에서 차례를 기다리며 음악을 즐기는 챔피언들에게 점점 시선이 가기 시작했다. 음악이 신나서인지 관객이 되어 박자를 타며 다 같이 몸을 좌우로 움직이는 모습이 너무 귀여웠다. 


그 뒤로 이어진 가사는 친구들이 더 들려달라고 말한(Tell me more, Tell me more) 부분이다. 이 부분에서 댄서 둘이 음악에 맞게 앉아있는 챔피언들을 손으로 가리키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친구들이 된 것처럼 더 말해달라는 듯 손을 까딱이며 몸을 기울여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를 들었다. 준비한 것처럼 나오는 동작에 시선을 빼앗길 수밖에 없었다. 춤추는 두 사람만 음악을 표현한 것이 아니라 뒤에 서 있던 사람들 모두가 참여한 무대 같았다. 처음엔 짜고 치는 것 아닌가 했지만, 나중에 영상을 찾아보니 음악을 들으며 눈치껏 참여한 것이었다. 




뒤이어 춤춘 챔피언들 중 가장 음악을 잘 표현해서 기억에 남는 커플이 있었다.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The sound of music)>에 나오는 <도레미 송(DoReMi)>에 춘 Brad와 Alyssa였다. 도레미 송은 도레미파솔라시에 해당하는 단어와 음계를 엮어서 도레미를 설명한다. 어릴 때 음악 수업 시간에는 빼먹지 않고 나와 전 세계적으로도 모르는 사람이 없다. 영화에서는 선생님이 도레미를 가르치기 위해 말로 설명했는데 춤으로는 처음부터 몸으로 표현을 시작했다.


미(Me)에 뛰며 자기 자신을 가리키고, 파(Fa)는 멀다(Far)와 발음이 비슷해서 무대를 가로지르며 뛰었고 

시(Ti)는 티(Tea)와 발음이 비슷해서 마시는 동작을 취했다. 몸으로 가사를 표현하는 것 외에도 ‘도’‘레’‘미’와 같은 부분에서는 제자리에서 뛰거나 관객을 가리키며 포인트를 강조했다. 대부분의 음계를 몸으로 말해요 같은 느낌으로 설명한 덕분에 이제 <도레미 송>을 들으면 이 춤이 먼저 떠오른다. 




챔피언 잭앤질의 하이라이트는 마지막에 춘 Diego와 Tze였다. 

보통 남녀 댄서로 남자 리더와 여자 팔로워인 커플들과는 다르게 둘 다 남자였는데 뮤지컬 음악 전인 첫 번째 음악을 시작할 때부터 심상치 않았다. 


왜 이렇게 추게 되었는지부터 알아야 전체적인 맥락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전날 치러진 대회에서 인상적인 춤을 춘 커플이 있었다. 리더가 양손을 모아들고 있을 때 Dalena라는 팔로워가 그 주변을 요염하게 돌며 섹시한 자세를 취했다. 리더가 뜬금없는 동작을 했음에도 팔로워가 알아서 이해하고 표현한 모습에 창의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춤이 끝난 이후 다른 사람들도 비슷하게 생각했는지 진행자가 이 동작을 다시 언급했고, 다음 순서로 나오는 커플이 비슷한 시도를 하기도 했다. 춤을 추다 한 명이 두 손을 모아 번쩍 들고 서있으면 다른 파트너가 그 주위를 돌며 음악에 어울리는 춤을 춰야 했기에 창의력을 시험하는 듯했다. 스윙 댄스에서 쉽게 나오기 어려운 동작이었는데도 당황하지 않고 이어지는 음악에 춤을 잘 살려서 기억에 남았다.




이를 기억한 Diego는 Dalena의 영혼을 뽑아 Tze에게 이식하는 퍼포먼스로 첫 번째 음악을 시작했다. 

게다가 Dalena의 옷까지 Tze에게 입혔다. 그리고 음악이 시작되기도 전에 의자를 가져와서 양손을 모아들고 가만히 앉았다. 그 모습에 어제의 Dalena의 춤이 연상되어 Tze가 어떤 어떤 섹시한 동작을 할지 기대됐다. 


여자 옷을 입은 Tze는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하는 생각에 고민이 많은 표정이었지만 음악이 시작되자 Diego를 당황하게 할 정도로 요염한 춤을 보여줬다. Diego의 뒤에서 허리를 잡으며 쓸어내리는 동작으로 Diego가 겁을 먹을 정도였다. 이 춤을 지켜보던 다른 챔피언들은 급기야 너희가 다 해 먹으라는 듯 돈을 던졌고, Diego는 바닥에 떨어진 돈을 주워 주머니에 넣는 퍼포먼스로 깨알 같은 웃음을 주기도 했다. 그 누구보다 진지한 얼굴로 섹시한 춤을 선보였지만 다른 어느 춤보다 웃음소리를 많이 들을 수 있었다. 




두 번째 음악은 영화 <위대한 쇼맨(The Greatest Showman)>의 <This is me>였다. 

이 음악은 기승전결이 있는데, ‘This is me’를 외치는 부분이 가장 인상적이다. 영화에서 이 음악은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천대받는 서커스의 직원들이 

“그래도 이게 나야”

라고 하며 스스로를 인정하는 곡이다. 


이 가사는 중간 정도에 나오는데 이 가사가 처음 나오는 순간 Diego가 파트너의 옷을 찢었고, 뒤에 앉아있던 모든 챔피언이 갑자기 의자 위로 일어나서 겉옷을 벗고 함께 춤을 추기 시작했다. 이 부분은 순발력이 아니라 모든 챔피언이 미리 무대를 준비한 것 같았다. 뮤지컬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모두 같은 동작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리더 한 명은 복근이 그려진 티셔츠를 미리 안에 입고 와서 진짜 근육인 것처럼 자랑하기도 했다. 





분명 대회로 시작했지만, 마지막은 공연처럼 끝나서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즉흥이고 어디를 준비한 건지 알기 어려웠다. 전부 다 미리 준비했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만큼 신나고 감탄이 끊이지 않는 무대였기 때문이다. 


아시아 오픈에서는 해마다 발레, 디즈니, 뮤지컬 음악 등 독특한 콘셉트의 음악을 준비해서 챔피언들이 추게 한다. 놀라운 것은 잘 추는 사람들의 춤은 매해 발전해서 점점 더 멋있어진다는 점이다. 운동으로 근육을 키우고 기술을 발전시키는 챔피언들도 있지만 예전의 경험을 통해 발전해 나가는 챔피언들도 있다. 


실수에서 비롯된 동작이 새로운 패턴이 되고 누군가 춤추면서 멋진 표현을 했다면 그 표현을 차용하거나 더 발전시키는 것이다. 전날 즉흥적으로 췄던 Dalena의 동작을 다음날 잭앤질에서 다른 프로들이 활용하거나, Diego가 옷을 찢는 퍼포먼스를 전년도에 이어한 것처럼 말이다. 


이처럼 이전에 했던 특별한 동작을 기억한다면 같은 기억을 공유하는 사람과 춤출 때, 그 동작에 조그만 차이만 더해도 달라진 느낌이 든다. 워크숍에서 배운 동작도 마찬가지다. 다른 사람이 시도한 동작도 괜찮아 보이면 연습하면서 내 것으로 익히려는 시도도 자주 한다. 그뿐 아니라 아예 새로운 동작을 시도하기도 하고, 다른 춤을 배워서 접목하기도 한다. 


모두가 함께 다양한 동작들을 추가하고 조금 더 잘 추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기에 춤 자체가 발전하고 유행도 생긴다. 각자의 취향이 다르기에 같은 방향으로만 흘러가지는 않지만 다양한 취향이 부딪히고 섞이며 새로운 길로 가고 있다. 




Asia WCS Open Invitational 2018 전체 영상에는 글에서 설명한 것 외에도 여러 커플이 

각자 뮤지컬을 자기들의 해석으로 선보인 춤을 볼 수 있다. 




이 글은 "여행에 춤 한 스푼"이라는 책으로 출간되어 일부 글을 삭제하였습니다.

책에 모두 수록하기 어려웠던 사진과 자료, 영상과 관련된 내용은 남겨두었습니다. 

남아있는 글로도 이해할 수 있도록 일부만 삭제하였지만 전체 글을 읽고 싶으시다면 책은 아래 링크를 통해 구입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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