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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을 걷다

by 있는그대로

점심을 먹고 남편과 산책을 나섰다. 볕이 부드럽게 내려앉은 오후였다.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 큰길로 접어드니, 눈앞에 펼쳐진 거리는 이미 가을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붉은빛, 노란빛, 주황빛이 서로의 색을 껴안으며 바람에 흔들렸다. 발끝에는 떨어진 낙엽이 수북이 쌓여 있었고, 그 위를 밟을 때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가 왠지 반가웠다. 오래된 추억의 소리 같기도, 지나온 시간의 속삭임 같기도 했다.

나는 낙엽 위를 천천히 걸으며 가을을 느꼈다. 해마다 맞는 계절인데도, 매번 새롭다.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나뭇잎 하나가 가볍게 흔들리다 툭 떨어지고, 그 떨어짐이 어쩐지 애틋하게 느껴졌다.
남편이 말했다.
“가을이구나. 쓸쓸하구나. 벌써 가을이 가는구나.”
그의 목소리에는 아쉬움이 묻어 있었다.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게요. 그래도 오늘은 참 좋네요. 이렇게 걸을 수 있어서요.”

남편은 언제나 계절의 끝자락을 유난히 안타까워한다. 봄이 가면 봄이 아깝고, 여름이 지나면 그 뜨거운 햇살이 그립단다. 가을이 오면 풍요롭다 하면서도, 곧 떨어질 단풍잎을 보며 마음이 쓸쓸해진다.
그는 특히 추운 겨울을 너무나 싫어한다. 여름에도 겨울 추위를 걱정한다. 그래서 더욱 가을이 가는 것을 아쉬워한다.
나무가 앙상해지고, 바람이 차가워지는 계절을 생각하면 마음이 움츠러든다고 한다.
그럴수록 나는 그에게 말한다. “겨울이 있어야 봄이 오죠.”
하지만 그는 여전히 고개를 젓는다. “그래도 난 겨울이 싫어.”

남편은 ‘가는 것들’에 마음을 두지만, 나는 ‘지금 있는 것들’을 바라본다. 떨어지기 전의 단풍, 아직 따뜻한 햇살, 발끝의 낙엽, 손끝에 닿는 바람의 감촉. 세월이 흐르는 것을 막을 수 없으니, 나는 흐르는 동안의 빛을 느끼며 살고 싶다.

우리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벤치에 앉았다. 머리 위로는 단풍잎이 바람에 흔들리고, 그 사이로 햇살이 점점이 떨어졌다. 남편이 나지막이 말했다.
“가을이 지나면 나무엔 아무것도 안 남잖아. 앙상한 가지만 남으면 마음이 허전해.”
나는 그 말을 천천히 되뇌었다. 앙상한 가지.
“그래도 봄이 오면 다시 새 잎이 나잖아요.”
“그건 올해의 잎이 아니잖아.”
“그래도 같은 나무의 잎이에요.”
남편은 말없이 내 손을 잡았다. 바람이 불고, 노랗게 빛나던 잎 하나가 우리 발치에 내려앉았다.

그 순간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인생도 지금 가을에 와 있구나.
뜨거웠던 여름이 지나고, 이제는 조금씩 식어가는 햇살 속을 걷고 있다. 몸도, 마음도 예전보다 느려졌지만, 대신 깊어졌다. 지나온 계절들이 모두 내 안의 색으로 스며들어, 나는 지금의 나를 이룬다. 그래서 나는 이 시절을 ‘쓸쓸하다’고 하기보다 ‘아름답다’고 부르고 싶다. 단풍처럼 곱게 물들어가고 싶다. 서둘러 피지도, 늦게 떨어지지도 않게, 제 빛을 다한 후에야 조용히 흩어지는 잎처럼 그렇게 살고 싶다.

남편은 아직 떨어지는 잎을 바라보며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나는 그 옆에서 바람의 흐름을 느꼈다. 바람은 떨어진 잎을 데리고 길 위를 나른하게 떠돌았다. 떨어지는 잎이 슬픈 건, 그 끝을 알아서가 아니라, 자신이 한때 하늘에 닿았다는 걸 기억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나는 그 떨어짐이 새로운 순환의 시작이라고 믿는다. 낙엽은 땅으로 내려가 썩고, 흙이 되어 다시 뿌리를 살린다. 흙은 봄이 오면 새싹을 밀어 올리고, 여름엔 푸른 잎으로 자라난다. 그리고 또 가을이 오면 단풍으로 물든다. 떨어짐은 끝이 아니라 다음 생의 준비다.

나도 언젠가 그렇게 흙이 되어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그 사라짐이 두렵지 않다. 나는 흙이 되어도 여전히 이 세상의 일부일 것이다. 바람이 되고, 햇살이 되고, 누군가의 숨결로 돌아올지도 모른다. 우주는 모든 것을 순환시킨다. 나무의 잎이 흙으로 돌아가듯, 인간도 언젠가 자신이 왔던 자리로 돌아간다. 그리하여 다시 누군가의 생명으로 이어진다. 그 생각을 하면 오히려 따뜻하다.

짧은 산책길이었지만, 나는 가을을 다른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남편에게는 가을이 ‘끝’으로 보이지만, 내게는 ‘이어짐’으로 보인다.
그의 마음이 쓸쓸함이라면, 내 마음은 고요함이다.
그의 눈에는 떨어지는 잎이 슬프지만, 내 눈에는 그 잎이 살아낸 흔적이 아름답다.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해가 낮게 기울어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바람이 불 때마다 노랗고 빨간 잎들이 하늘에서 눈송이처럼 흩날렸다. 나는 그 잎들 속에서 천천히 걸었다.
삶이란 어쩌면 이런 게 아닐까.
잠시 머물다 흩어지는 찬란한 시간들.
그 시간 속에서 기쁨을 발견하는 일.

남편은 여전히 나무를 바라보며 걸었다. 나는 낙엽을 밟으며 속으로 말했다.
‘그래, 이 순간이 참 좋다.’
오늘의 햇살, 오늘의 바람, 오늘의 낙엽.
이 모든 것이 내 삶의 한 장면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짧은 산책이었지만, 그 길 위에서 나는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삶은 가는 것이 아니라 이어지는 것이다.
계절은 저마다의 이유로 피고 지지만, 그 모든 시간은 한 줄기로 이어져 있다.
그리고 우리 또한 그 시간의 일부로,
조용히, 그러나 아름답게 물들어가고 있다.

“우리도 이렇게 곱게 물들자.”
남편은 미소를 지었다.
우리는 예쁘게 물든 플라타너스 잎과 빨간 감잎, 노란 은행잎을 주워 집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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