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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나무가 자라는 시간 : 정신과 진료 일기

마음의 성장 일기

by 루비


맨 처음 정신과를 방문한 것은 스물아홉 살 때였다. 스물일곱 살 때부터 여러 가지 힘든 일을 많이 겪었었다. 오래도록 따돌림과 같은 인간관계에 문제가 있었고, 직장에서도 어려움이 있었고, 연애도 제대로 되지 않아 힘들었다. 그때 나는 정신과 진료를 보면 여러 불이익이 많다는 이야기를 얼핏 알고 있어서 계속 상담센터나 상담카페 같은 데만 갔었다. 그렇게 2년 여를 방황하다가 스물아홉 살이 된 해, 도저히 견디기 힘들다고 생각해서 가게 된 것이었다.


그렇게 지금까지 다니고 있다. 나는 정신과를 오래 다닌 것에 비해 다른 환자들보다 정신의학에 대한 이해도가 부족한 것 같다. 그것은 내가 적극적으로 찾아서 공부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때 프로이트에 관한 책을 사서 읽어보고 싶었지만, 이내 덮어버렸다. 융 심리학을 공부한 분께 정신분석도 몇 달 받다가 그만두었다. 한때 우리나라 베스트셀러가 된 아들러 심리학을 기반으로 한 <미움받을 용기>는 아주 재미있게 읽었다. 정신과를 본격적으로 다닌 서른 살 때 만나게 된 책이었다.


나는 몇 권의 책을 낸 작가이면서 현재 브런치 작가로 활동하고 있지만, 작가들에 관심을 가지면서 어렴풋이 알게 된 사실이 있다. 그건 작가들이 정신적인 고통을 많이 겪었다는 사실이다. 버지니아 울프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고, 미국의 시인 실비아 플라스도 남편의 외도로 전기오븐에 머리를 처박아 목숨을 끊었고 어네스트 허밍웨이도 권총자살을 했고, 로맹 가리도 권총 자살로 목숨을 끊었다. 얼마든지 성공한 작가들인데 개인의 삶은 왜 이리 그토록 힘들었을까? 음악가, 화가, 작가와 같은 예술가들이 정신적 고통을 많이 겪는 건, 아마도 섬세한 감수성과 예민한 감각 때문이 아닐까? 그러한 것들이 장점이 될 땐, 뛰어난 예술세계를 창조하지만, 단점으로 작용할 땐, 스스로에게 가혹해지는 것 같다. 스스로의 내면을 끝없이 탐구해 내지만, 세상과 불화를 일으킬 때 어마어마한 고통이 되는 것 같다.


나는 대학생 시절 공지영 작가님의 책을 즐겨 읽었는데 공지영 작가의 <빗방울처럼 나는 혼자였다>라는 에세이가 참 좋았다. 제목부터가 딱 내 취향 저격이었다. 그 책에서 유난히 마음에 남았던 문장은, 공지영 작가님의 마음이 피아노 음계처럼 폭이 넓고 섬세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내가 남들보다 예민하고 내가 남들보다 감정의 폭이 격렬하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데 오랜 세월이 걸렸습니다. 말하자면 세상에는 남들이 잘 안 쓰는 피아노 건반의 가장 낮은 옥타브부터 높은 옥타브까지 모두 두드리며 사는 부류들이 있는데, 제가 그 부류에 속한다는 말이지요. / 빗방울처럼 나는 혼자였다(공지영), p.113

내가 이 문장을 기록해 놓은 건, 나 또한 바로 그러한 부류라는 생각이 들어 공감이 갔기 때문이다. 무던한 사람들은 이해하기 힘들지만, 그래서 나 같은 섬세한 사람에게 무심하고 곧잘 상처를 주지만, 나와 같은 사람이 나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하게 된 것 같다.


어떤 사람들은 나를 칭찬하는 건지, 비하하는 건지, ‘넌 너무 순수해’라며 얄궂게 말하지만, 그건 일종의 치기 어린 질투가 아닐까? 피아노 건반을 한 옥타브만 쓰면 동요밖에 연주하지 못하지만, 피아노의 낮은 옥타브부터 높은 옥타브까지 88개의 건반을 모두 쓰면 베토벤의 비창과 같은 피아노 소나타도 연주할 수 있으니깐 말이다. 물론 그 대가는 쉽게 상처받는 마음, 자주 우울해지고 예민한 기질을 받아들여야 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정신과 환자가 자주 슬퍼지고 외로워지고 쓰러질 것 같은 순간에 의사 선생님이 계셔서 버틸 수 있다. 의사 선생님은 나에게 포도나무 덩굴을 세우는 지지대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의사 선생님이라는 지지대를 타고 나만의 포도송이를 탐스럽게 만들어 나간다. 내가 쓰러지지 않게 잡아주셔서 감사하다. 앞으로는 내 진료 일기를 꾸준히 써보려고 한다. 이 기록이 나뿐만 아니라 다른 누군가에게도 작은 위로가 되길 바라며.



스마트폰으로 그린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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