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전화는 연결되지 않았다

자살예방상담 전화

by 루비

나는 한동안 꽤 오랫동안 우울감으로 고생한 적이 있다. 명확한 진단명은 모르지만, 아침에 일어나서 머리 감는 것도 겨우 할 정도였다. 신규교사 때, 학교 옆 사택에 살면서 매일 7시에 출근하던 때와는 180도 달라졌다. 지각 안 할 정도만 간신히 세이프하면서 출근하는 내가 점점 미워졌다. 그냥 갈수록 나라는 사람이 혐오스러워졌다.


학교가 너무 힘들어졌다. 주말만 기다리면서 살았다. 이상하게 학교에 있으면 너무 우울하고 죽을 것 같았는데 금요일 오후, 버스를 타고 기차역으로 향하는 길은 숨통이 트일 것만 같았다. 그 기다림으로 매주 평일을 버텼다. 그리고 나는 나의 심리구조를 깨닫기 시작했다.


나는 내 자율성이 심하게 침해당할 때 극심한 우울감에 시달린다는 것을... 학교에서는 모든 일이 힘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움직이고 발언권이 없는 사람은 자질구레한 일을 맡고 시키는 대로만 해야 하는 게 너무 견디기 힘들었다. 게다가 교권침해를 일삼는 일부 학생들 사이에서 교사는 어디서도 보호를 받지 못했다. 학생과 콤보로 학부모에게까지 공격을 받아야 하는 실정이 너무 괴로웠다.


그때 내가 탈출구로 삼은 것이 무언가를 끊임없이 배우고 돌아다니는 것이었다. 나는 그때 그림책을 배웠다. 세계의 여러 고전이 된 그림책을 읽고 느끼고 내가 직접 그림책의 구조를 만들어보았다. 그런 창조의 사유와 창작의 기쁨들이 나에게 숨 쉴 곳을 만들어주었다. 그때 깨달았다. 사람에게 예술적 창조성은 삶을 기쁨으로 채색해 준다고. 이런 이야기를 그때 당시 정신과의사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굉장히 환하게 웃으면서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아마 그때 당시 동학년으로 근무한 선생님들은 내가 우울감이 얼마나 심했는지 몰랐을 것 같다. 그저 내가 일에 치여 허둥대는 교사로만 보였을 것이다. 한 번도 표현한 적 없기 때문이다. 난 그때 네일아트를 정말 많이 했다. 손톱에 색깔이 바뀌는 부분을 보면서 잠시나마 웃을 수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요즘엔 안 한지 몇 년이 지났다. 그건, 비용과 시간이 아깝기도 하지만, 내 마음이 다른 예술과 창조와 감각으로 충만하기 때문이다. 더 이상 우울감이 끼어들 틈이 없다.


다만, 이제 새로운 학교로 옮기는 시점에서 조금은 두렵기도 하다. 과연 잘 적응할 수 있을까? 새로 맡은 학급과 업무는 잘 해낼 수 있을까? 동료 선생님들은 어떤 분들일까? 너무 두렵기만 하다. 또한, 주변에 우울증으로 앓던 사람들을 잘 캐치하지 못하고 도움을 주지 못한 것에 자책을 느끼기도 한다. 겉으로는 밝게 웃어도 사실 내면은 멍들어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조금 더 다정하게 대해고 위로해 주었다면 어땠을까 후회하게 된다.


마음이 아프고 우울증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에게 세상은 자주 꾀병이다라거나 정신질환자라는 이유로 혐오 섞인 시선으로 바라보곤 한다. 나도 그런 시선을 받고 상처를 받고 마음이 더 아파진 경험이 있다. 어쩌면 이 글을 읽는 독자분들도 겉으로는 ‘그래, 편견은 나쁘지, 위험하지’라고 생각해도 막상 주변에 보이면 은근히 소외시키거나 멀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면에서 나는 내가 과거에 우울증을 경험한 건, 마냥 나쁜 경험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머리로 이해하더라도 가슴으로 오기까지 시간이 걸리는 공감의 지평이 그런 경험으로 인해 확대된 것 같기 때문이다.


나는 마음이 아프고 괴로운 사람들이 혼자 외롭지 않도록 위로도 하고 손을 내밀어주고 싶다. 그래서 스레드 같은 곳에서 죽고 싶다는 글을 보면 그냥 지나칠 수 없어서 댓글을 남기곤 한다. 물론 그럴 때 의심 섞인 시선을 받거나 거부나 상처를 받을 수도 있지만, 누군가의 손내밈이 꺼져가는 하나의 생명을 구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의 10대부터 40대까지의 사망률 원인 1위가 모두 자살이라고 한다. 한때 나도 너무 힘들어서 자살예방상담 센터에 전화도 해보았지만 상담사 부족으로 전화연결이 전혀 되지 않았다. 누군가도 나처럼 마지막 희망의 끈마저 놓치고 더 깊은 수렁에 빠져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아직도 이런 현실이 오래도록 가슴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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