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타사르, 예수를 읽다 /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
“그 심판은 이러하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3,19-20) / 본문 32쪽
빛과 어둠, 선과 악. 이 이분법 사이에서 사람들은 스스로 어느 쪽에 더 가깝다고 생각할까? 저마다 스스로 생각하는 자아상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스승님, 누가 죄를 지었기에 저이가 눈먼 사람으로 태어났습니까? 저 사람입니까? 그의 부모입니까?” 제자들이 묻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답하십니다. “저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그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 그리된 것이다.”(요한 9,2-3 참조)
보지 못하는 이들은 하느님을 통해 볼 수 있게 되고, 자신들이 본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눈먼 자가 됩니다(요한 9,39 참조). /본문 47쪽
서로 저 자가 나쁜 자요, 저 자가 죄지은 자요, 저 자가 악이요라고 말할 때, 예수님은 그 모든 걸 뒤집으신다. 예수님께서 간음한 여자를 두고 “너희 가운데에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말이다. 억울한 누명을 쓴 사람도 마찬가지다. 누가 누구를 정죄할 수 있다는 걸까? 하지만 하느님을 믿는다면서, 자신은 신실하다고 말하면서 남에게 손가락을 가리키며 흠결을 잡지 못해 안달 난 사람들이 많다.
예수님이 많은 고통과 아픔으로 우리들의 죄를 대신 짊어진 것이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에게는 감사하면서 죄스러운 일이면서도 한편 나에게는 또한 많은 위로가 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내가 바로 그러한 아픔과 고통을 겪었기 때문이다.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쓰는 일, 손가락질받는 일, 세상의 배반을 겪는 일 등.
그러나 그 모든 어둠 속에서도 결국은 빛을 드러내기 위함이었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부분이 나에게는 큰 위안이 되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환난을 겪을 때마다 위로해 주시어, 우리도 그분에게서 받은 위로로, 온갖 환난을 겪는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게 하십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치듯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내리는 위로도 우리에게 넘칩니다... (그를 통해서) 우리가 겪는 것과 똑같은 고난을 여러분도 견딜 수 있습니다.” (2코린 1,4-6) /본문 141쪽
사실 아직 성경을 통독하지도 못한 나에게 이 책은 어렵고 이해 안 되는 부분도 많다. 그래서 언젠가 성경공부도 다시 더 열심히 하고 읽을 책으로 리스트업 해두어야겠다. 그런데 마지막 작가의 소개, ‘20세기의 위대한 신학자,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 글에서 작가가 문학적 감수성이 풍부했다는 대목이 인상적이었다. 왜냐면 나도 문학에 대한 사랑이 지극하고 재능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직은 신앙생활이 서투르고 모르는 게 많지만, 정말 하느님과 예수님의 말씀을 더 깊이 이해하고 언젠가 하느님이 말씀하시는 빛의 자녀로 남고 싶다. 그리하여 예수님처럼 세상에 널리 선한 이로움을 전하고 싶다.
“발타사르가 원했던 것은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한 말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이 현세의 삶을 사는 동안 우리는 마음의 눈을 치유하여 하느님을 볼 수 있게 해야 합니다.’ 마음의 눈을 치유하여 세상과 우리 인생의 바탕이자 최종 목적인 살아 계신 하느님을 볼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발타사르가 중요하게 여겼던 것입니다.” 요제프 라징거 추기경(베네딕토 16세 교황) /본문 15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