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방식대로 내 의견을 표현하기 좋은 장르는 칼럼이다. 칼럼(column)은 열주(列柱)로 시작된 글이다. 신문이나 잡지의 한 면에 고정적으로 실리는 글로 짧은 단평(短評)으로 시작했다. 최근 각 신문사들이 다양한 필진을 섭외하면서 다양한 칼럼을 선보이고 있다. 필자가 그동안 소개한 김누리, 최성수, 김종영의 글 역시 칼럼이다.
칼럼은 사건/이슈/현상/대상에 대한 정보와 함께 분석, 문제점,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나름의 통찰과 시각이 필요하다. 사건/이슈/현상/대상을 조사하고 분석하고 또 나름의 생각을 제시할 수만 있다면 누구나 쓸 수 있다. 자신만의 개성있는 표현이 가능한 글이 바로 칼럼이다.
최근 모 웹진에 실렸던 필자의 칼럼을 소개한다.
혐오는 약한 고리를 찾는다
여성혐오, 남성혐오, 성소수자혐오, 난민혐오 등 혐오가 사회적 이슈로 자리한 지 오래다. 혐오와 차별을 둘러싼 쟁점도 갈수록 뜨겁다. 사전적 의미로 혐오(嫌惡)는 싫어하거나 기피하는 감정으로, 불쾌, 싫어함 등의 감정이 복합적으로 이루어진 강렬한 감정이다.
혐오는 진화론적인 관점에서 생존을 위해 불가피하게 가지게 되는 원초적 감정이지만 끊임없이 특권을 가진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특정 대상을 혐오하게 만들어 왔다. 마사 누스바움은 혐오는 규범적으로 왜곡되기 쉬운 독특한 내적 구조, 실제로 위험하지 않지만, 위험하다 여기게 만드는 비합리적인 사고를 내면화하여 취약한 사람/집단을 차별하게 만드는 감정이라고 했다. 특권을 가진 지배 집단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동물성에 대한 두려움과 역겨움을 느끼게 만드는 특정 집단이나 사람을 혐오하면서 그들을 배제하고 차별해 왔다.
혐오는 사회정치적으로 자기 정체화 과정에서 타자를 나와는 다른 열등한 대상으로 차별화하는 차이의 전략이며 우월의 반대 즉 열등의 의미로 타자를 대상화하는 타자화의 전략이다. 혐오가 만드는 주체와 타자의 경계가 뚜렷하게 역사화된 것이 인종 혹은 여성,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다. 이런 혐오의 감정은 주도권을 가진 자들이 사회를 결속하는 데 필요했던 감정이다.
세상이 복잡해지면서 혐오는 불분명한 가해자와 다수의 피해자를 양산하게 되었다. 누가 가해자인지 누가 피해자인지 알 수 없는 상황이 빈번히 발생한다. <선량한 차별주의자>의 저자 김지혜는 피해자가 양산되는 상황을 사회 구조적인 문제로 보았다. 국가 권력이 혐오를 정당화하는 힘으로 작동한다는 점에도 주목했다. 특정화된 대상을 언표화하여 구분하거나 열등하게 만드는 모욕적 표현이 바로 그 징표라고 말했다.
이 불온한 언표화의 사례는 시집살이 노래와 같은 옛노래에서도 나타난다. 시집살이 노래에는 혐오의 대상이 된 며느리가 처한 억울한 상황을 잘 보여준다.
열다섯에 시접을오니/시접살이 살라하니
나안꺾은 석루야꽃도/날꺾었다꼬 탓이로세
나언건디린 제비새끼/날건디맀다 탓이로세
나안묵은 찰부낌이도/날묵었다꼬 탓이로세
무섭더라 무섭더라 시집아살이가 무섭더라
노랫말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집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건의 범인(?)으로 며느리가 지목된다는 사실이다. 내가 아니라고 변명할 기회도 없이 상황은 정해져 있다. 꺾지 않은 석류꽃도 꺾었다고 하고, 만지지도 않은 제비를 만졌다고 하며 입에도 대지 않은 찰 부꾸미까지 먹었다고 하니 기가 찰 노릇이다.
하늘겉이 높은 집에/암송담송 다섯건구
나할날사 넘이라고/나안먹은 연자절편
날묵었다 하시더니/죽구지라 죽구지라
아앙루 깊은물에/아야퐁당 죽고지라
사랑앞에 화초대는/시누애기 꺽었는걸
날꺽었다 하시더니아양루 깊은 물에
아야퐁당 죽고지라/오늘밤 오경시에
징검이불 피어놓고/자는 듯이 죽어볼까
‘먹지도 않은 연자절편을 먹었다고 누명 씌운다’고 ‘꺽지도 않은 화초대를 꺾었다’ 하는 상황을 마주한 며느리는 차라리 ‘징검 이불 피어놓고 죽어버릴까’라며 절규한다. 노랫말을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가족 내에서 발생한 모든 사건, 사고는 며느리 탓이라는 점이다. 집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불미한 사건은 며느리가 일으킨 것이다. 며느리로 몰아가기다. 며느리 낙인효과다.
부계 혈통의 가족주의가 조선 후기 사회를 다잡는 지배 이데올로기로 자리하면서 이런 일이 가족공동체 내에서는 당연하게 자행되었다. 궁핍했던 평민의 삶을 유추하면 노랫말이 전하는 상황은 직접 보지 않아도 뻔하다. 아직 유보된 가족, 낯선 자에 대한 경계는 혐오를 만들기 좋은 조건이다.
혐오는 약한 고리를 찾는다. 억울한 자가, 약한 자가, 자기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자가 혐오의 대상으로 낙인 되는 사건을 우리는 자주 경험해 왔다. 어느 날 갑자기 영문도 모른 채 자식을 잃은 부모들에게 그랬고, 살기 위해 편견과 싸우는 약자들에게 그랬고, 부당한 처우를 개선해 달라고 애원하는 그들에게 그랬다. 바로 그 약한 고리에 혐오를 부추기는 사악한 언론이 있었다는 점도 뼈 아프다.
우리는 얼마나 더 사악해져야 할까? 나를 보호하기 위해 작동된 혐오의 감정을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차별하고 모질게 여기는 정당화의 도구로 언제까지 휘둘러야 할까? 언제든 역전될 수 있을 그 경계의 감정에서 ‘나’만 예외일 거라고 믿는 건 정말 위험한 일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