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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탐구와여정 Oct 15. 2024

노년의 통찰을 담다 (2)

[노년의 화가는 무엇을 그렸나] - 마크 샤갈

샤갈의 그림은 화사하게 아름답고 동화처럼 환상적이며 햇살처럼 따스하다. 화면을 채우고 있는 색은 특정 형태에 따라 구분되어 채색되는 것이 아니고 빨강, 노랑, 초록, 파랑, 하양의 색들이 특정 영역을 차지하며 듬성듬성 발라져 있 마치 오로라를 보는 듯하다. 형태는 둥글둥글 길쭉하게 그려져 있고 원근법을 무시한 크기나 심지어 중력을 거스르고 공중을 부양하는 것은 기본이다. 남녀 또는 동물과 인간이 함께 껴안고 있는 모습이 유난히 많이 등장하는데 그토록 행복해 보일 수 없다. 

어린 시절 러시아 고향 마을에서의 평화로운 기억을 평생 동안의 영감으로 활용한 샤갈에게 고향 마을은 신성한 곳이었다. 노년이 된 훗날 오랜 시간이 흘러 러시아에 금의환향했을 때 고향 마을에 다시 갈 기회가 있었음에도 샤갈은 한사코 그곳에 가기를 거부했다. 그가 고향 마을을 떠날 때 이미 자신의 마음 속에 모든 기억을 다 품고 떠나 왔기 때문이었다. 만약 다시 간다면 자신의 환상이 깨질까 두려웠던 것이다.

샤갈의 그림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장면들과 동물들,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유년 시절의 기억에서 온 것이다. 안식일에 기도하는 아버지, 토라 (유대교 율법)를 들고 가는 랍비, 지붕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던 삼촌, 유대교 절차에 따라 짐승을 도축했던 할아버지는 물론이고 마을에서 열린 유대교 축제들에 대한 기억, 가축상인 삼촌과 함께 수레를 타고 가던 기억, 강어귀에서 바라본 마을의 모습 등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사실 샤갈의 초기 그림 ‘The Kermesse’(1908)에서부터 이러한 유년의 기억은 확고히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화려한 색채와 동화적인 형태의 왜곡은 아직 그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는데 샤갈이 색을 발견한 것은 프랑스 파리에서였다. 1910년 파리에 도착한 샤갈은 도시의 모습과 자유로운 분위기에 매료되었다. 당시 파리에서 몰아치던 자유로운 화풍의 움직임은 어김없이 샤갈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비록 어느 하나의 움직임에 깊이 매몰되지는 않았지만 야수파의 그림과 초기 단계의 입체파 그림들을 보면서 색깔과 생기, 자유로운 형태의 변형을 받아들이게 된다. 샤갈의 대표작 중 하나인 ‘I and the Village’(1911)에서 비로소 샤갈의 개성이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경계를 허물고 규칙을 무너뜨린 형태와 색의 조화는 어디에서도 보지 못한 동화적이고 환상적인 분위기가 드러난다. 동물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사람과 교감이 완벽히 이루어지고 있는 듯한 눈동자와 표정, 화면을 채우는 동네의 모습과 빈 공간을 찾아 자유롭게 그려넣은 사람들의 형상, 선명히 구분하지 않고 은은하게 채워넣은 화려한 색상들은 오로지 샤갈의 마음 속에서만 살아있는 기억인 것이다.

[I and the Village](1911)

파리로 오기 전 페테르부르크에서 무대 디자이너인 스승에게 배웠을 때 그가 했던 말이 샤갈의 개성과 재능을 그대로 전해준다. 그는 “샤갈은 내가 좋아하는 학생이다. 내가 특히 좋아하는 점은 내가 가르치는 것을 열심히 듣고나서는 물감과 붓으로 내가 말해준 것과는 전혀 다른 무엇을 만들어낼 때다. 완벽한 개성의 표현이고 지금까지 거의 보지 못한 기질과 능력이 아닐 수 없다”고 말했는데 샤갈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그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샤갈은 또한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그림으로 그리는 화가였다. 그의 그림에는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대상들이 어김없이 등장하고 이를 즐거워하는 자신의 모습도 함께 표현했다. 그에게 그림은 마음으로 그리는 것이었다. 자신의 아내 벨라와의 행복한 한 때를 표현한 ‘Over the Town’(1924)이나 프랑스에서의 근심없는 생활을 담은 ‘Peasant Life’(1925)는 그의 애정이 유감없이 발휘된 아름다운 그림들이다.

샤갈의 정체성을 이루는 것은 러시아 고향 마을이나 제2의 고향이나 다름없는 파리만이 아니었다. 유대인이었던 샤갈에게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은 앞의 두 가지에 비해 크지는 않았지만 분명 자리하고 있었다. 화상이자 출판업자였던 볼라르는 La Fontaine (라퐁텐)의 우화집을 삽화 버전으로 출판하면서 샤갈에게 삽화를 부탁했다. 불라르는 당시 샤갈을 선택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많은 사람들이 프랑스를 대표하는 작가의 책을 그림으로 해석하는 일에 러시아 화가를 선택한 것에 의문을 제기했다. 하지만 라퐁텐이 동양의 환상적인 이야기들을 기반으로 책을 썼기 때문에 바로 그러한 이유로 샤갈을 선택한 것이었다. 내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고 샤갈은 수백개의 아름다운 그림을 그렸다. 같은 이유로 고골의 ‘Dead Souls’의 삽화도 샤갈에게 부탁했다. 당시 러시아의 특징인 비더마이어 양식의 진수를 가장 잘 살려낼 수 있는 화가이기 때문이다." 볼라르는 이에서 더 나아가 성경의 삽화도 샤갈에게 부탁했다. 유대인으로서의 샤갈을 간파했던 것이다. 이후 성경은 샤갈의 기념비적인 작품인 Musee national Message Biblique Marc Chagall in Nice의 기원이 되었다. 

샤갈 자신은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성경에는 크게 영향을 받았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성경에 매료되었다. 성경이야말로 모든 시대의 시적 근원이라 생각한다. 나는 성경에서 삶과 예술을 발견했다. 성경은 자연의 메아리와 같은 것이고 나는 이러한 비밀을 전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즉, 샤갈은 특정 민족의 종교 서적으로서의 성경이 아닌 인간의 삶 전체에 드리우는 성경의 보편적인 메시지를 부각시키는 데 자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샤갈이 작업한 ‘성경의 메시지’는 성당이나 박물관에 그려진 성경의 이야기와 같은 방식으로 니스에 개관한 국립샤갈박물관에 꾸며진 성화 작품 시리즈로 탄생하였다. 건물을 짓는 벽돌에서부터 박물관의 벽을 세우는 일까지 최대한 예루살렘을 재현한 것과 같은 고결함을 주기 위해 노력했다. 메인 홀에는 성경의 위대한 순간들을 묘사한 12개의 거대한 그림이 걸려있다: 인간의 창조, 낙원, 낙원에서 쫓겨나는 아담과 이브, 비둘기를 날리는 노아, 노아와 무지개, 아브라함과 세 천사, 이삭의 제물, 야곱의 꿈, 천사와 씨름하는 야곱, 불타는 나무 앞의 모세, 바위를 치는 모세, 십계를 받아든 모세.

성화라고 해서 샤갈의 그림이 자신의 기존 그림들과 크게 다를 건 없다. 여전히 아름다운 색채와 동화적인 요소가 가득하다. 단지 이야기가 있으므로 그림을 보면서 각각이 무엇을 나타낸 것인지 보다 더 쉽게 짐작이 가능하다는 것 뿐 그 마저도 여전히 신비롭고 오묘한 느낌이 가득하다. 애초에 인간의 삶이란 신비스러운 것이고 그것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모든 것이 정형화된 의미를 갖거나 어느 하나로 해석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이러한 보편적이면서도 신비로운 느낌은 특히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표현한 그림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양 팔을 벌린 채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모습은 분명 유대교의 율법에는 어긋나는 것이지만 이보다 더 인간애와 영혼, 순수를 대변하는 것은 없다는 사실을 샤갈도 잘 알고 있었다. 예수의 가녀린 몸과 축 쳐진 두 팔, 한쪽으로 치우친 고개는 나약한 패배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에 대한 포용과 사랑, 역설적이게도 위대한 승리를 나타낸다는 사실을 샤갈은 물론 그의 그림을 보는 모든 이들은 알고 있다. 이는 설명도 필요없고 수식도 필요없는 명백한 메시지다. 예수가 인간으로서 겪는 고통과 죽음을 통해 희생과 사랑, 부활을 보는 것은 신비로운 인생의 양면과도 같다고 할 수 있다. 샤갈의 성화가 특정 종교로의 개종이나 엄숙하고 무거운 메시지를 전하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삶과 영혼에 대한 성찰을 불러온다는 면에서 종교적인 성화라기 보다는 영적인 성화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후로 성경 이야기에 대한 의뢰는 샤갈에게 꾸준히 이어졌고 그림에만 머물지 않고 스테인드글라스 작업으로 그 영역을 확장했다. Metz 성당에 있는 Cathedrale Saint-Ettienne의 스테인드글라스는 기존의 ‘성경의 메시지’에서 모티브를 가져와 작업을 했는데 그림과는 또 다른 매력으로 경이로움을 선사한다. 보통의 스테인드글라스처럼 화려한 색을 자랑하지만 그 방식에 있어서는 훨씬 더 자유로운 면의 분할과 훨씬 더 정교한 대상의 표현이 두드러진다. 마치 캔버스를 그대로 옮겨온 것과 같은 아름다움에 강렬하고 신비로운 매력은 덤이다. 

프랑스 메츠 생테티엔 성당에 있는 샤갈의 스테인드 글라스 

당연하게도 이 뒤를 이어 프랑스의 다른 지역은 물론 스위스, 영국의 교회와 성당의 수많은 창문들이 샤갈의 스테인드글라스로 물들어갔다. 급기야는 이스라엘에서도 예루살렘의 하다사 대학 메디컬센터의 예배당을 위한 스테인드글라스 의뢰가 들어왔다. 이에는 물론 한 가지 제약이 있었는데 바로 인간의 형상을 표현해서는 안 된다는 율법에 따른 것이었다. 이스라엘 부족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샤갈은 단 하나도 동일하지 않은 수많은 형태 (동물의 형상은 마음껏 활용했다)와 언제나처럼 예상을 뛰어넘는 자유로운 색의 조합으로 이 업무를 훌륭히 수행해냈다. 

자기만의 색깔과 철학으로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그림을 그린 화가 샤갈은 1985년 97세의 나이로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그 누구보다도 왕성하게 활동했다. 그의 그림은 젊은 시절과 노년을 가리지 않고 한결되게 아름답고 신비로웠는데 그의 그림은 특정한 주제도, 특정한 대상도, 특정한 내용도 다루지 않았다. 언제나 보편적이고 진실되고 아름다운 것을 보여주고자 했는데 그것이 샤갈 자신에게 잘 맞고 또 그것이 바로 샤갈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Life](1964)

그의 그림 ‘Life ’(1964)가 보여주듯이 그의 그림에는 오락이 있고 음악이 있으며 광대가 있고 춤이 있다. 아름다운 파리의 모습과 단풍이 예쁜 나무, 붓과 물감을 들고 엄마 옆에 서 있는 자신인 듯한 소년, 역시 자신인 듯한 남자가 신부와 아이와 오붓이 있는 광경,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친숙하면서도 낯선 동물의 모습까지, 그에게 인생은 다른 듯 같은 모습이고 같은 듯 다른 모습을 한 한 편의 평화롭고 아름다운 드라마인 셈이다. 물론 그 드라마에 빠져서는 안 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매직이 아니겠는가. 인생은 신명나게 놀다 가는 하나의 축제인 셈이고 결국 나중에 되돌아보면 모든 것이 신비롭고 경이롭다는 사실을 샤갈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그의 천재성은 그의 분신과도 같은 그의 그림을 통해 눈부시게 빛을 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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