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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아이 이지샘 Mar 07. 2024

익숙함이 가져다준 나쁜 버릇-1

이해 대신 속단을 선택한다는 것



인생을 살다 보면 자기 자신이 활활 불타오르는 시간이 있는 것 같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지금까지 살면서 마음껏 불타오르던 시기가 있었을지?


어떤 이는 아직 그 불꽃을 만난 적이 없을 수도 있고

또 어떤 이는 그 불꽃을 여러 번 만난 적이 있을 수도 있다.

누군가는 인생 대부분의 시간을 불꽃 속에서 보내고 있다고 할지도.


그 불꽃이라는 것도 여러 의미가 담길 수 있다.


어떤 불꽃은

인생에서 단 한번 아주 강렬하게,

마치 건조한 날 들붙은 산불처럼

옆 동네에서까지 보일 정도로 크게 일었을 수도 있고


어떤 불꽃은 캠프파이어를 하고 난 뒤 남은 장작의 잔열처럼 따뜻한 정도로 길게 유지되고 있을 수도 있다.


어떤 불꽃은 나나 타인에게 따듯함과 반짝임을 선물할 수도 있고


어떤 불꽃은 때로, 시야를 가려버려 그 너머를 못 보게 되기도 한다.


이십 대 후반의 무렵, 나는 잘 몰랐지만 매일 불타고 있었다.






그 무렵, 나는 언어치료사로의 매일이 뜨거웠다.

몸에는 에너지와 활력이 있었고

센터의 전반적인 업무에 모두 능숙함이 자리했다.

치료를 하는 것도, 상담을 하는 것도 보다 유연해졌다. 익숙해졌다.

내가 지금까지 배우고 익혔던 것을 바탕으로 내 목소리는 날로 커져가고 있었다. 들불이 번지듯이.

내 말이 맞다는 생각으로 나는 뜨거웠다.






다양한 아이들을 치료하면서 진전을 보이는 아이들이 꽤나 많아졌고 친밀감이 형성된 어머님들도 많아졌다. 내게 있어 1순위 목표는 당연히 아이의 의사소통능력이 증진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언어치료를 진행함에 있어 내 1순위 목표는 절대 나 혼자만의 힘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절대적으로 아이의 '어머니'의 도움이 필요했다. 예를 들어 내가 치료실에서 아이에게 여태껏 하지 못했던 말 하나를 가르쳐 주고 아이가 그것을 성공적으로 표현했다면, 그것을 잦은 경험으로 만들어 주는 것은 어머님의 도움이 필요한 부분이었다. '한 번 했다'와 '능숙하게 할 수 있다'는 다른 것이기에 어머님을 통한 가정지도가 너무너무 중요했다.



그동안 미처 느끼지 못했던 아이에 대한 부분을 느낄 수 있었어요.
감사해요 선생님.

어떤 어머님께서는 아이의 언어발달증진을 위해 내가 부탁한 가정지도를 잘 따라 주셨다. 쉽지 않은 것을 부탁드릴 때에도, 본인의 습관을 고치고자 노력해 주셨다. 어머님은 열의가 있었고, 아이에게 노력을 기울이며 아이에 대해 보다 잘 알게 되었다는 감사인사를 전하기도 하셨다. 상담시간마다 어머님과 나는 한 손씩 내밀었고, 매번 박수소리가 잘 났다. 신이 났다.



너무 정신이 없어서 못했어요.
집에서 같이 공부를 하려고 하면 애가 너무 싫어하고 떼쓰고..
너무 답답해요 선생님.  


어떤 어머님께서는 가정지도에 협조적이지 않으셨다. 아이를 키우는 일이 너무 힘들고 바쁘다고 하셨다.


아이가 의사소통능력을 키워나간다는 것은 학원에 가서 '수학'이나 '영어'과목을 배워오는 것과는 조금 다르다. 언어치료사가 아이가 현재 미숙한 부분을 끌어올려주기 위한 일련의 활동들을 진행하면, 이가 아이에게 명확히 자리 잡을 수 있도록 가정에서 반복적으로 연습해야 하는 것도 있고, 일상생활에서 자연스럽게 배운 것들을 사용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 주어야 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아이에게 '주스'라는 단어와 의미를 치료사가 알려주었다면 가정에서는 아이가 '주스'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주고 아이 입에서 그 말이 자발적으로, 스스로 먼저 나올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 /ㄹ/발음이 부정확한 아이에게 /ㄹ/소리를 정확하게 내는 방법을 치료사가 알려주었다면, 가정에서 이게 잘 습관화되도록 연습시간을 가져야 할 수도 있다.  


그렇기에 상담시간마다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며 어머님에게 권고사항을 말씀드렸지만, 어떤 어머님과는 이가 잘 지켜지지 않았다. 상담시간에 내미는 내 손은 갈 곳을 잃은 채 허공에서 혼자 흔들거리다 이내 내려왔다.






하루를 끝내고 퇴근길.

오늘 한 치료와 상담내용들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다. 오늘 만난 아이들과 어머님들을 한 명 한 명 떠올리면 내 얼굴에는 웃음과 답답함이 번갈아 나타났다 사라졌다.


그 시기 가장 상담이 어려운 어머님이 한 분 계셨다. 이 어머님은 자녀가 셋이었다. 첫째 아들, 둘째 아들, 셋째 딸. 세명의 아이 모두가 우리 기관에서 치료를 받고 있었다. 첫째와 둘째는 언어발달지연으로 언어치료를 받고 있었고 셋째는 놀이심리치료를 받고 있었다. 첫째 아이가 내 담당이었다.  


이 어머님과의 상담이 힘들었던 이유는 어머님께선 나와의 상담시간에 딱 세 가지 문장만 말씀하셨기 때문이었다.


"네. 해야죠."

"죄송해요 선생님."

"그죠. 맞아요."


내가 오늘 치료한 내용과 더불어 가정에서 해 주셨으면 하는 부분들에 대한 상담을 진행하면, 어머님께선 늘 저 세 문장만 말씀하셨다. 목소리도 작고 조곤조곤 말씀하시던 어머님. 어머님은 검은색 티셔츠를 자주 입고 다니셨다. 검은색 티셔츠와 후드가 달린 집업, 그리고 청바지. 늘 그렇게 입고 다니셨다. 머리가 많이 기셨는데 매번 검은 티셔츠를 입으셔서 옷에 떨어진 비듬이 잘 보였다. 얼굴이 되게 고우셨는데 그 얼굴과는 다르게 항상 남루한 모습으로 기관에 오셨다.


반면에 세 아이들은 항상 빛이 났다. 내가 언어치료를 진행하는 첫째의 언어치료 일정은 아침 9시였다. 출근을 하고 조금 있으면 세 아이들이 기관에 왔는데 아이들은 이슬을 맞아 반짝이는 딸기꽃 같았다. 새하얀 피부에 새까맣고 윤기 나는 머리칼, 빨간 입술로 재잘거리며 센터에 왔다. 올 때마다 세 남매는 스포츠 브랜드의  남매룩을 입고 있어서 그 모습이 너무 사랑스럽고 귀여웠다.






이렇게 귀여운 아이들이 언어발달이 느리다는 이유로 자신의 속내를 잘 표현하지 못하고, 또래관계에서 어려움을 겪는다니. 내가 엄마라면 너무너무 속이 상할 것 같았다. 게다가 나는 첫째를 담당하고 있었고, 첫째가 보다 많은 진전을 보여야 둘째와 셋째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보다 나이도 훨씬 많은 어머님께 모진 말을 많이 했다.


"집에서 이런 부분을 해 주세요"

"오늘 제가 프린트한 거 꼭 저녁에 첫째랑 한번 연습하고 주무세요"

"어머님 단어리스트 몇 개 안 되는데 안 해오시면 어떻게 해요"

"어머님, TV 트는 시간 조금만 줄여주셔야 해요, 좋지 않아요"

"어머님, 이제 OO이 곧 일곱 살이에요. 지금 더 빨리 따라잡아야 하지, 안 그러면 어린이집에서 사회관계가 어더 어려워질 수 있어요"

 

그럴 때마다 어머님의 대답은 똑같았다.


"네. 해야죠."

"죄송해요 선생님."

"그죠. 맞아요."






나는 답답했다.

그리고 나는 속단했다.


답답했던 나는 이 어머님을 '이해하기'에 앞서 속단하기를 선택했다.

 

계산기를 두드리듯 탁탁거린 뒤 어머님께 속사포를 쏟아내었다.

아이들이 어린이집을 간 시간 동안 시간적 여유가 있으니 이런저런 일과 휴식을 취하시고 아이들이 오면 발달에 도움이 되도록 가정환경을 조성하고 가정지도를 할 수 있도록 당부를 드렸다.  

내 우주에서는 첫째의 발달이 너무 중요했기에 다른 것을 들여다볼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아이가 또래보다 발달이 느리다면.

다른 모든 것을 다 제쳐두고 지금 '우리 아이의 발달'이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나는 '언어치료사'였기에. 그리고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게 정답이라고 믿었다.


그렇게 나는 언어치료사로 활활 불타고 있었다. 차갑게 식어있는 어머님은 미처 보지 못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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