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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실남 Jan 09. 2021

그녀를 처음 만난 날

2019년 3월 30일 오전, 난 교육 뮤지컬단 오디션 대기실에서 내 이름이 불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잘할 수 있을까? 심사위원들이 나를 이상하게 생각하면 어떡하지...'


당시 난 이제 막 슬럼프에서 벗어난 상태였다. 2018년 한 해는 내 인생의 최악의 시기였다. 인생을 왜 살아야 되는지에 대한 고민, 직장 내 왕따, 인간관계에 대한 회의감, 게임 중독, 술 중독 등 많은 고난과 시련이 있었던 시기였다. 허구한 날 방구석에 처박혀, 세상과 나 자신을 저주했다. 하지만 모든 원인은 나 자신에게 있음을, 그리고 세상을 즐겁게 살아갈 수 있는 선택권도 나에게 있음을 깨닫고 나자, 난 다시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었다.


나 스스로를 바꾸기 위해서, 그동안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것에 도전해보기로 했다. 뮤지컬 오디션도 새로운 도전의 일환이었다.


"00씨, 들어오세요."


오디션을 안내하는 선생님이 나의 이름을 호명했다. 소강당 안으로 들어가니, 여자 둘, 남자 둘, 총 4명의 심사위원이 앉아 있었다. 그중에 나의 시선을 사로잡는 한 여성 심사위원이 한 분 있었다. 긴 웨이브 머리에 빨간색 가디건, 크고 매력적인 눈동자, 빛나는 물광피부! 딱 봐도 초등학교 선생님은 아닌 것 같았다. 베테랑 뮤지컬 배우 느낌이랄까. 뭔가 연예인 포스도 났다.


'와... 예쁘다... 저런 사람이란 연애하면 어떤 기분일까? 아니다.. 아니지... 지금 오디션 중에 무슨 생각하는 거야!'


"00씨! 00씨!"

나의 망상을 뚫고 한 남성 심사위원이 나에게 말했다.


"준비하신 노래 한 번 들어볼게요."


뮤지컬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성시경의 '두 사람'을 불렀다. 노래를 부르면서도 계속 뮤지컬 배우 삘 나는 심사위원에게 계속 눈길이 갔다. 시크한 표정이 매력적이었다. 노래가 끝났다. 제 실력을 못 보여줘서 아쉬웠다.


'아... 이럴 줄 알았으면, 좀 제대로 준비해올 걸.'



바로 심층면접이 시작되었다. 남성 심사위원 한 분이 나에게 질문을 했다.

"00씨는 왜 뮤지컬단에 지원을 하셨나요?"


솔직하게 얘기하기로 했다.

"새로운 도전을 하기 위해서 지원을 했습니다. 사실 저는 지난 1년 간 큰 슬럼프를 겪었습니다. (중략) 새롭게 제 인생을 바꾸고 싶습니다."


"만약에 슬럼프가 다시 오면 어떻게 할 건가요? 뮤지컬단은 주말, 평일 상관없이 참여를 해야 되는데, 혹여나 슬럼프로 인해 빠지는 경우가 생기지 않을까요?"


"누구나 인생에서 슬럼프는 한 번씩 겪죠. 저는 이미 한 번 겪어봤기 때문에, 슬럼프가 다시 오더라도 잘 대처할 수 있습니다. 슬럼프에 빠지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최근에는 술, 게임도 다 끊었습니다. 앞으로 뮤지컬단에만 집중할 예정입니다. 믿어주십시오. 열심히 하겠습니다."


"1년이 넘는 기간 동안, 사람들과 교류를 잘하지 않으셨다고 했는데, 뮤지컬단에 잘 적응을 할 수 있을까요? 특히나 여기는 성인들보다 대부분 중, 고등학생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친구들과 잘 어울릴 수 있을까요?"


"음... 충분히 잘 어울릴 수 있습니다. 지난 1년은 '인생을 왜 살아야 하나?'라는 고민으로 제가 스스로 사람을 피했을 뿐, 원래는 사람들이랑 어울리는 거 좋아합니다. 대학교 다닐 때는 학회장도 했었고... 믿어주십시오."


"네. 알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심사결과는 내일 저녁 발표될 예정입니다."


심사위원들의 표정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뮤지컬 배우 삘의 심사위원의 표정은 여전히 차가웠다. 슬럼프를 겪었다는 것을 괜히 말했나 싶기도 했다. 내가 너무 솔직했나... 하... 떨어지겠구나...



후회와 아쉬움이 가득한 채로 집에 돌아왔다. 근데 이상하게 뮤지컬 배우 삘 여성 심사위원의 얼굴이 계속 떠올랐다. 이 기분은 뭘까...


(다음 날)


뮤지컬단에 합격했다는 문자가 왔다. 번호를 저장하고 슬쩍 카톡 프사를 보니, 그 여성 심사위원분이었다! 이것은 Destiny? 그녀에게 문자를 보냈다. 합격의 기쁨을 문자로 남겼지만, 그녀에게 답장은 오지 않았다.


이것이 나와 아내의 첫 만남이었다.




(최근)


"자기야, 우리 첫 만남 기억나?"


"어. 기억나지. ㅎㅎ"


"넌 어땠어? 난 너 처음에 보자마자 반했는데..."


"난 솔직히 별로... 네가 계속 방구석에 처박혀 있던 얘기 해서, 난 무슨 사회 부적응자인 줄 알았어. 그때 사람들이 되게 걱정했잖아. 네가 혹시나 뮤지컬단에 문제 일으킬까 봐. 너 잘못하면 떨어질 수도 있었어. 사실 나도 네가 들어오는 걸 반대했어... ㅎㅎ"


"(충격) 헐~~~ 뭐야... 내가 그 정도로 이미지가 안 좋았다고? 와... 아, 맞다. 그때 문자 보냈을 때, 왜 답장 안 했어?"


"별 필요성을 못 느껴서? 사실.. 그때는 너한테 전혀 관심 없었어. (웃음)"


"(삐짐) 와... 진짜 너무하다..."


"에이~~ 그때는 네가 이렇게 성격 좋고 매력적인 사람인 줄 몰랐지..."


"와... 뭔가 불공평한데? 그럼 나도 첫눈에 반했다는 거 취소할래!"


"야아아아~~ 왜 그래? 난 지금 자기를 사랑하는 걸? 사랑해. 자기야!"



상반된 첫인상으로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결혼을 했다. 처음 만났을 때 우리가 지금 이런 사이가 되어 있을 줄 상상도 하지 못했는데... 그때 내가 슬럼프에 빠져 오디션장을 가지 않았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혹은 아내가 나의 사회 부적응자 같은 모습에 나를 탈락시켰다면?


어후. 상상만 해도 싫다.



#첫만남 #첫인상 #아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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