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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실남 Jan 15. 2022

#2 학생과 계약한 선생

(이전화)


한창 옛 기억을 떠올리는 와중.


똑똑


조심스럽게 체육전담실 문이 열렸다. 의찬(가명)이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깜짝 놀람) 와... 오랜만이다. 의찬아. 근데 그동안 뭘 먹었길래 이렇게 큰 거야? 지금 키는 얼마야?"

"잘은 모르겠는데 160cm 후반 정도일 걸요?"


불과 10개월 전만 했어도 키가 160cm도 안 됐었던 것 같은데 아이들의 성장은 정말 경이롭다. 훌쩍 커버린 큰 키에 교복까지 입으니, 확 중학생 티가 났다.


키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학교 생활은 잘하고 있는지, 친구 관계는 어떤지 등 그동안 너무나도 궁금했던 것들에 대해서 물었다. 사실 교우관계가 제일 걱정이었다. 혹여나 옷에서 냄새난다고 공부 못한다고 같은 반 아이들이 괴롭히지는 않는지, 나쁜 친구를 사귀고 있는 건 아닌지 우려되었다.


"친구들이랑 잘 지내고 있어요! 반 친구들도 다 착하고. 좀 사고를 많이 치기는 하지만... (웃음)"

"(반색하며) 오, 그래? 초등학교랑 비교해서는 어때?"

"음... 저는 중학교가 좀 더 좋은 거 같아요. 일단 남중이라서 편한 것도 있고... 아, 그리고 이제는 도움반에 안 가도 되니깐 친구들이랑 더 빨리 친해질 수 있는 거 같아요. 초등학교 때는 도움반에 가는 시간이 많아서 반 친구들이랑 친해지기가 좀 힘들었거든요."


그렇다. 의찬이는 6학년 말 학습장애가 아니라는 판정을 받아, 도움반에서 나오게 되었다. 많은 걱정과 우려와는 달리 의찬이는 도움반에서 나와 의젓하게 학교생활을 잘하고 있었다.


"학교 성적은 어때? 공부는 따라갈만해?"

"음... 수학 빼고는 할 만한 거 같아요. 자유학기제여서 내신이 안 들어가서 시험 성적은 안 나오거든요. 가끔씩 쪽지 시험은 치는데, 저번에 국어 쪽지 시험에서 평균 이상 점수받았어요."

"진짜?"

"네, 담임 선생님이 국어 선생님이신데 제가 반에서 국어가 중상 정도는 된다고 하더라고요. 아, 그리고 선생님 저 독서토론 동아리도 해요. 그 전에는 시 쓰기 동아리도 했어요."


이게 꿈이냐 생시냐. 의찬이의 말은 충격이었다. 난독증 판정까지 받았던, 불과 3년 전까지만 했어도 일기조차 한 번 안 써본 아이가 반에서 평균 이상의 국어 성적을 내는 것도 모자라, 책을 읽고 독서토론까지 한다고? 게다가 시도 쓰고 발표도 한다고? 믿을 수가 없었다.


"와... 실화냐? 너 지금 선생님한테 거짓말하는 거 아니지?"

"아니에요~ 쌤. 진짜 실화예요. (웃음)"

"와... 정말 독서 토론이 가능하다고?"

"네, 진짜라니깐요~ 선생님이 책이랑 토론 주제 정해주시면 해당 부분 읽고 친구들이랑 같이 의견 나눠요."

"와..."


정말 감탄사밖에 나오지 않았다. 내가 알던 그 학생이 맞는가 의심이 될 정도로. 만약에 도움반에서 나오지 않았다면, 그때 내가 의찬이가 난독증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도움반 선생님과 함께 집중적으로 케어를 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다시 한번 교육의 효과와 위대함을 느꼈다.


"의찬아, 도움반 선생님한테도 한 번 전화해보자. 아마 엄청 좋아하실 거야."


도움반 선생님도 나와 마찬가지로 의찬이의 훌쩍 자란 키에 한 번 놀라고, 학교 생활 이야기에 두 번 놀랐다. 때마침 치킨이 도착했다.


치킨을 먹으면서 갑자기 의찬이가 내게 질문을 했다.

"선생님, 00고등학교 들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


의찬이의 질문에 또 한 번 놀랐다. 이 아이가 정말 공부든 학교든 다 필요 없고 평생 게임만 하다가 죽을 거라고 말하던 그 아이가 맞나? 00고등학교면 그래도 내신이 어느 정도 이상 되어야 갈 수 있는 학교인데, 의찬이가 이런 질문도 할 정도로 성장한 건가? 뿌듯하고 대견스러웠다.


"일단 네가 내신성적을 잘 받아야지. 갑자기 00고등학교는 왜?"

"아... 지금처럼 친구들이랑 재미있게 놀려면 공부를 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적어도 고등학교는 나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또 한 번의 감격...


"그러게, 5학년 때 쌤이 공부하자고 도와준다고 했을 때, 그때부터 공부 시작했으면 얼마나 좋아. 솔직히 그때부터 안 한 거 좀 후회되지?"

"네... 좀 후회돼요."

"학원은 다니고 있어?"

"6학년 2학기 때 다니다가 그만뒀어요. 계속 피곤해하니깐 할아버지가 그만두라고 해서 그만뒀어요. 그리고 집안 형편도 좀 그래서."

"(한참 고민하다) 흠... 진짜 공부할 마음이 있어?"

"네!"

"그때처럼 쌤한테 한다고 하고 중간에 도망치거나 그러진 않겠지? 만약에 선생님이 도와주면 열심히 할 자신 있어?"

"네, 할 수 있을 거 같아요."

"(또 한참 고민하다) 네가 정말 열심히 할 마음과 의지가 있다면, 선생님이 도와줄게. 금전적인 부분이든, 학습이든, 생활적인 거든 뭐든 간에. 만약에 학원을 다니고 싶다면, 학원도 선생님이 보내줄게."

"감사합니다."

"근데 뭔가 느낌이 쎄한 게 도저히 못 믿겠단 말이지. 선생님이 예전에 너한테 좀 당한 게 있어서 말이야. 말로만 하지 말고 쌤이랑 계약서 하나 쓰자."

 

혹여나 5학년 때처럼, 중간에 의찬이가 공부를 못하겠다고 포기할까 봐, 또 도망칠까 봐 걱정이 되었다. 우리의 다짐을 계속 상기시켜줄 확실한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래서 탄생한 교사와 학생의 계약서.


나의 꿈은 의찬이처럼 재능은 있으나 주변환경이 어려운 아이들을 위한 무료 기숙형 대안학교를 세우는 것이다. 의찬이의 꿈은 자신처럼 어려운 학생들을 도와주는 선생님이 되는 것이다.


"음... 그럼 만약에 네가 대학교 과정까지 무사히 마친다면 나중에 선생님이 만든 학교에서 일하는 건 어때?"

"오... 괜찮은데요?"

"근데 10년 이상 의무로 근무해야 해. 솔직히 대학까지 지원해주는데 그 정도는 해야 하진 않겠어? 대신 월급은 많이 줄게."

"(웃음) 네, 괜찮은 거 같아요."


사실 10년 이상 근무라는 조항을 넣은 건, 의찬이에게 빚을 갚으라는 의미가 아니었다. 너무 받기만 해서 혹여나 의찬이가 부담스러워하지는 않을까 해서 넣은 조항이었다. 의찬이의 꿈과 연계해서 끈기 있게 지금의 마음과 의지를 이어나갔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다.


"진짜 앞으로 잘할 수 있지?"

"네!"

"정말이지?"

"네!"

"지금 하는 말들 다 녹음해둔다?"

"(웃음)"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내일 다시 의논하자. 먼저 지금 현재 학습상태를 점검하고 앞으로 어떻게 공부를 해나 갈 건지 선생님이랑 같이 구체적으로 계획을 짜 보자. 앞으로 잘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렇게 우리의 계약은 성립이 되었다.



다음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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