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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실남 Feb 08. 2022

#12 선생님, 죄송합니다.

(이전화)


어느새 12월 말이 되었다. 의찬(가명)이와 이 힘든 여정을 시작한 지도 벌써 한 달 반이 지났다. 그동안 의찬이는 많이 변했다. 생애 처음으로 자력으로 수학 문제집 여러 권을 풀어보았고, 숙제도 곧잘 해왔다. 몇 년 동안 하지 않았던 양치질도 꾸준히 했고, 매일 도서관에도 다녀왔다. 이러한 변화로 인해, 의찬이는 반에서 모범학생으로 뽑히기도 했다.



12월 30일.


그날은 의찬이와 공부를 하기로 약속한 마지막 날이었다. 애초에 교감선생님과 약속한 시간이 12월까지 었고, 나도 언제까지 의찬이의 공부만 봐줄 수만은 없었다. 아내의 불만도 극에 달하고 있었다. 매일 칼퇴근하던 남편이 8~9시가 될 때까지 아이 가르친다고 집에를 들어오지를 않으니... 게다가 우리는 2년 차 신혼이다. 아내에게 뻔히 잘못한 걸 알기에, 아내의 기분도 풀어줄 겸 12월 31일부터 7박 8일간 제주도 여행을 가기로 했다.


하지만 제주도에 가있는 동안에도 의찬이의 공부를 포기할 순 없었다. 학원은 9일 뒤부터 가기로 했으니, 내가 없는 동안에는 미션을 통해서 혼자서 공부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선생님, 한 달 반 동안 공부 가르쳐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 너도 고생했다."


"선생님, 그래도 결국 끝까지 했어요. 못 할 줄 알았는데, 끝까지 해냈어요."


"그래, 봐봐. 하면 되잖아? 넌 충분히 할 수 있는 아이야."


의찬이는 자신의 성취에 뿌듯해하는 듯했다. 나도 그런 의찬이가 대견스럽고 자랑스러웠다.


"한 달 반 동안 공부해보니깐 어때? 좀 변한 거 같아? 공부할만하지?"


"저 스스로도 좀 많이 변한 거 같아요. 공부도 계속 꾸준히 하면 늘 거 같고."


"음... 이 기세를 몰아서 선생님이 미션 하나 내줄게. 이번에 선생님 제주도 가는 거 알지? 선생님 제주도 가 있는 동안 네가 매일 선생님한테 양치질한 거, 도서관 간 거, 숙제한 것들을 문자로 인증하는 거야. 일주일 동안 매일 인증하면 선생님도 이제 네가 공부할 의지가 충분히 있다고 판단하고 앞으로도 지금처럼 온 힘을 다해 지원을 해줄 거고, 만약에 인증을 하루라도 빼먹으면 앞으로 선생님의 지원은 없는 걸로. 아니다. 생각해보니 좀 너무하네. 혹시 모르니 쌤이 한 번은 봐줄게. 어때?"


"할만한 거 같은데요? 그렇게 어렵지도 않고. 충분히 할 수 있을 거 같아요."


의찬이 말대로 사실 그렇게 어려운 미션은 아니었다. 양치질은 그냥 하면 되고, 도서관에서는 30분 이상만 있으면 됐다. 숙제도 하루에 1시간 정도만 공부하면 충분히 풀 수 있는 양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하루 50분 만에도 끝낼 수 있었다. 굳이 이 미션을 준 이유는 의찬이가 1달 반 동안 꾸준히 해온 습관을 내가 없는 동안에도 유지하기를 원해서도 있지만, 더 큰 이유는 미션 달성을 통해 성취감을 느꼈으면 하는 바람에서였다. 그래서 일부러 쉽게 내 준 것도 있다.


의찬이가 당연히 미션을 수행할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시간이 날 때마다 다음 계획들을 머릿속에 계속 그려나갔다. 제주도에서 다녀오면, 그다음부터는 바로 지운(가명) 어머니가 운영하시는  수학 학원에 다니기로 했다. 수학 학원에 적응하면 영어 학원도 한 번 알아보기로 했다. 내년부터는 의찬이와 멀리 떨어져 있는 학교로 전근을 가기 때문에 학습은 학원을 통해서 하고 기본 생활습관 체크는 전화 연락을 통해서 하기로 했다.




다음날 배를 타고 가서 늦은 저녁 제주도에 도착했다. 숙소에 도착하니 10시가 넘어 있었다. 10시 반쯤 되자 의찬이에게 인증 문자가 왔다. 양치질, 도서관, 숙제 미션 모두 클리어했다는 내용이었다. 역시! 그동안 고생한 보람이 있어.


다음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의찬이의 인증 문자는 이어졌다.


하지만 4일째 되는 날부터 더 이상 의찬이에게서 문자가 오지 않았다. 한 번 봐주는 기회를 지금 써먹는 건가? 다음날 의찬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의찬아 어제 미션은 왜 빠트렸어?"


"아... 어제는 너무 하기 싫어서... 선생님이 그때 기회 한 번 주신다고 했어서... 오늘은 꼭 할게요."


"그래. 믿는다. 의찬아."


하지만 그날 밤, 의찬이의 문자는 오지 않았다. 이번에는 연락을 하지 않고 그냥 놔둬보기로 했다.


제주도에 머문 남은 기간 동안 의찬이로부터 단 한통의 문자도 오지 않았다.


제주도 여행이 끝난 다음날, 의찬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평소와 다름없는 목소리로 의찬이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의찬아, 선생님이 왜 전화했는지 알지?"


"네..."


"무슨 일 있었어? 어떻게 된 일이야? 선생님한테 설명 좀 해볼래?"


"음... 선생님, 저 못하겠어요... 생각해보니깐 이렇게 계속 공부하면 너무 힘들 거 같아요. 할아버지도 힘들면 그냥 포기하라고 하래요."


"(...) 그럼 지금까지 공부했던 시간들은 뭐가 되어버리니... 너 도와줄 거라고 저녁 시간을 다 할애한 선생님이나 담임 선생님은?"


지겨웠다. 이 반복되는 데자뷰 같은 상황들. 애써 가르쳐도 집에 며칠만 있으면, 다시 원상 복귀되는 마법 같은... 한 달 반 동안의 노력으로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고, 아니 이미 극복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보다.


"죄송합니다..."


"그럼 학원은? 학원은 가야지."


"학원도 안 가고 싶어요. 갑자기 새로운 곳에 가야 하니깐 무서워요. 가기 싫어요."


어떻게 일주일 안 봤다고 애가 이렇게 바뀔 수 있을까. 불과 일주일 전만 했어도 자신감이 넘쳤던 아이였다. 하...


"그래. 학원도 안 가고. 그럼 저번에 사회복지관에 신청한 장학금은? 네가 공부 열심히 할 거라고 해서 장학금 그때 신청했잖아. 왜 그렇게 말을 쉽게 바꾸니? 네가 공부를 안 하면 그 장학금은 그럼 어떻게 쓸 건데? 진짜 필요한 다른 아이들도 있을 텐데."


"그거 취소 안 돼요...?"


"하... 선생님이 알아볼게. 의찬아 선생님이 다시 한번 더 물어볼게. 지금 네가 공부를 안 한다고 하면 선생님은 이제 너를 도와줄 수 없어. 안 한다는 아이를 억지로 끌고 할 수는 없잖아? 서로 시간낭비지. 지금 네가 공부를 안 하게 되면 앞으로 있을 결과에 대해서는 선생님이 수도 없이 설명해줬지? 후회 안 할 자신 있어? 네 인생, 네가 책임질 자신 있어?"


"네. 제 인생, 제가 책임 질게요."


너무나 쉽게 나오는 대답. 의찬이는 자신이 쉽게 내뱉은 말의 무게를 모르는 듯했다. 지금의 선택으로 인해 본인의 인생이 180도 달라질 수도 있다는 것을 전혀 인지하지 못한 듯했다. 오히려 이제는 앞으로 게임을 스트레스 받지 않고 마음껏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들뜬 것 같기도 했다.


"그래... 네 선택 선생님이 존중해줄게. 그리고 학원은 다시 안 간다고 말씀드리고, 장학금 신청도 취소할 수 있는지 선생님이 알아볼게. 담임 선생님이랑도 연락하고. (...) 의찬아, 지금은 네가 쉽게 이렇게 결정을 내렸지만, 분명 나중에 후회하는 때가 올 거란 말이야. 그때 찾아오면 선생님이 딱 한 번은 받아줄게. 하지만 그 뒤에 포기하거나 지금처럼 말 바꾸면 선생님은 다시는 너 안 볼 거야."


"네... 선생님, 죄송합니다. 그리고 그동안 공부 가르쳐주셔서 감사했습니다."


그렇게 한 달 반 동안의 우리의 여정은 허망하게 끝났다.


의찬이와의 전화통화가 끝나고 나는 마저 할 일들을 했다. 지운이 어머니께 학원 못 간다고 말씀드리고(감사하게도 다음에 또 도움이 필요한 제자가 있으면 언제든 연락 달라고 하셨다.) 담임 선생님께도 연락을 드렸다. 사회복지관에 연락을 해보니, 다행히(?) 장학금 신청은 떨어졌다고 했다. 의찬이 집에 보일러가 잘 작동이 안 된다고(온수가 잘 안 나와서 할아버지가 일주일에 한 번만 씻게 함) 말씀드리니, 보일러도 고쳐주신다고 했다.




처음에는 황당했다. 의찬이와 대화를 한 직후에는 허무함이 몰려왔다. 하지만 대화가 끝나고 모든 일을 마무리했을 때는 속이 후련했다. 그동안 최선을 다했기에 후회 따윈 없었다. 오히려 개운했다.


나는 실패했다. 어떻게 보면 한 달 반 동안의 귀중한 저녁 시간과 에너지를 날렸다고 볼 수도 있다. 물론 그동안 의찬이에게도 나름의 변화가 있었기에, 충분히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지만 결과적으로는 의찬이가 공부를 포기했기 때문에 실패가 맞다. 하지만 실패했다고 해서 좌절하지 않는다. 포기하지도 않는다. 실패를 가만 놔두면 그저 실패에 불과하지만, 실패 속에서 무언가 깨달음을 얻거나 배운다면 이 실패는 앞으로의 내 성장에 자양분이 되기 때문이다. 그럼 이번 실패에서 내가 얻은 교훈은 무엇일까?


크게 세 가지 교훈을 얻었다. 첫 번째는 사람마다 다 때가 있다는 것이다. 의찬이에게는 학습 동기가 거의 없었다. 결핍도 없었다. 마음껏 컴퓨터 게임을 할 수 있는 현재가 행복한 아이에게 공부는 자신의 행복의 방해물에 불과했다. 그렇다. 지금은 때가 아니다. 고등학생이 되거나 성인이 되어서 깨지고 또 깨지고 나서야 의찬이는 깨달을 것이다. 그때 공부 좀 할 걸 하고. 그때는 이미 늦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의찬이 인생에서는 그때가 가장 빠른 시기일 수도 있다.


두 번째는 나의 시간은 한정적이고 그 시간을 이성적으로 잘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의찬이가 나에게 그만큼 상징성이 있는 제자이기 때문에 효율이 떨어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동안 의찬이에게 시간투자를 했다. 하지만 그 대가로 13명의 멘토링 아이들에게 할애하는 시간이 확 줄었다. 그 친구들은 내 조언을 듣고 바뀔 준비가 되어 있는 아이들이다. 내가 조언 하나만 해줘도 확 바뀐다. 의찬이에게 투자한 시간의 1/10만 써도 13명이 충분히 케어가 된다. 변화도 드라마틱하다. 수학적으로 계산해보면 의찬이를 도왔던 에너지로 정말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을 도우면 130명을 도울 수 있다. 비교불가다. 다음부터는 정말로 내 도움이 필요한 학생, 변할 준비가 되어있는 학생 위주로 도움을 줄 생각이다.

세 번째는 의지보다 중요한 것이 환경설정이라는 것이다. 환경설정의 중요성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집에만 다녀오면 원상 복귀되는 의찬이를 보고 더욱더 체감을 하게 되었다. 여러 번 이런 상상을 해본 적이 있다. 만약 의찬이가 집에 안 가고 한 달 반 동안 우리 집에서 생활을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물론 아내가 싫어했겠지만ㅎㅎ) 컴퓨터 게임을 할 수 없는 환경, 게다가 보고 배울 수 있는 사람이 있는 환경에서 생활을 했다면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을까? 훗날 의찬이 같은 학생들을 위한 기숙학교를 꼭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이번에 실패했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실패를 디딤돌 삼아 배우고 또 배우면서, 제2의·제3의 의찬이들을 도울 방법을 찾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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