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정'의 사용
부정스러운 안목을 우리는 그동안 그릇된 것으로 비판했다. 무지한 긍정을 참된 것으로 치부하고 기회의 부정을 거짓으로 판단하는 것은 종법 제도적 예법에 어긋난 행동이라는 관념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높은 위치의 사람이 아랫사람을 좋은 말로 평가하는 것이 칭찬으로 받아들여졌으니까. 그런데 그 긍정이라는 평가는 어디서 나오나? 하달된 일들을 반박 없이 처리하는 행위에서 비롯되는 것 아닌가? 물론 이런 예시는 "너는 언제나 밝아서 좋아"라는 말이 나오는 원리를 부분적으로 설명한다. 어려운, 해결하기 쉽지 않은 상황에 처한 이가 그것을 관망하듯 "잘 되겠지!"라고 말하는 사건들, 그리고 그 사건을 보며 "너는 언제나 밝아서 좋아"라고 말하는 우리를 우리는 수 없이 다양한 방향으로 맞이한다.
'긍정적이다'라는 말을 유독 듣고 싶어 하는 사람을 종종 본다. 이런 사람들을 볼 때면 과거의 어떤 영향으로 억눌린 사람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하는데, 긍정의 무지에 눌려 꼭 긍정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자신의 본성에 충실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때때로 화도 내고 반박도 하며 내면을 표현해야 하는데 말이다. 화병이라는 병이 대한민국 국민만 앓는 정신질환이라는 것도 내면에 솔직하지 못한 우리를 설명하기도 한다. 나조차도 나를 표현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는데, 성격이 워낙 까탈스럽기도 하거니와 그런 교육을, 그런 학습의 중요성을 배우지 못한 이유에서다. 그 중요성을 알더라도 이제야 그것을 고치자니 고치려는 행위 때문에 더 까탈스러워지는 것 같다.
창의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 비판적 시선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는데, 그동안 우리가 '긍정적이다'라는 표현을 잘못 사용한 결과로 이런 교육방법이 나왔으리라 생각하기도 한다. 강의를 나갈 때면 학생들에게 자신의 내면에 솔직하라는(정확히는 이런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다. 공대생들에게 이런 어법은 이상한 사람으로 오인하게 할 수 있다) 말을 자주 한다. 그렇지만 종법적 예절을 지닌 우리는 자신 내면의 목소리를 교탁에 선 이에게 전달하는 행동을 무척이나 어려워한다.
강의 중에는 무조건 학생들에게 다가가는데, 어르고 달래 마음의 소리를 들으려는 이유다. 마지못한 학생들은 "선생님 이건 0000 같은데 이건 좀 아닌 것 같아요"라며 불평을 말한다. 내가 주로 강의하는 것은 창의공학(또는 융합) 설계 과목인데, 세부적으로 기업 문제 해결이라는 시간을 갖는다. 실제 기업이 겪고 있는 문제들을 해결하려 시도하는데, 상당히 많은 경우로 기업이 제시한 문제 자체가 잘못 정의된 경우가 많다. 이런 상황에 학생들의 불평이란 건 하달된 문제를 해결해 봐야 본질적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렵사리 공학적 대안을 내 봐도 기업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데 왜 그것을 자신들이 풀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그래 내가 말한 네 마음의 소리라는 거, 네 내면에 솔직하라는 건 지금 네가 말한 그걸 말하는 거야" 분명 학생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간혹 엉뚱한 생각이더라도 자신의 내면을 통해 얻어낸 답변은 학습적 가치가 있다) 오히려 기업 문제 해결이라는 본질에 더 가까이 다가가기도 한다. 대한민국에서 선생과 학생, 기업과 개인, 부모와 자식은 수직적이다. 용감하려는 노력에도 아직 우리의 뇌는 무의식적으로 기억한다. 학생들이 본질에 더 다가가려는 노력은 표현되기도 전에 이러한 무의식 작용으로 사그라들기도 하고, 용감히 언급하더라도 묵살되기 다반사다. 그러니 학생들은 항상 "네!"라는 '무지의 긍정'적 답변으로 상급자를 안심시킨다.
'무지의 긍정'이란 상기와 같이 관찰해 보려는 노력 없이 받아들이는 행위다. 무의식적이든 개인의 의지이든 무지한 자세로 긍정하는 것은 자연스럽지 못하다. "어쩔 수 없으니 받아들이자", "시켰으니 하면 되지"라는 태도는 몸과 마음을 심히 고단하게 하며, 병적 무리를 줄 정도로 거대한 질량이 되기도 한다.
'기회의 긍정'이란 긍정을 내릴 상태나 상황이 올바르지 못하다면 부정이 되려 긍정이라는 것이다. 긍정(Affirmation)이라는 단어 자체는 이와 같이 부정이 긍정이 되기도 하는 의미를 담고 있지만 우리는 왜 존재 방식을 그대로 허용하는 것만 긍정이라 인식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종법적 관습자의 무의식인가 보다.
부정적 태도가 '기회의 긍정'이 되는 것은 그런 것이 관습적 사고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이기에 독창적일 가능성이 높아서다. 독창적, 창조적이라는 것은 새로움의 기회를 내포하기에 부정이 역설적으로 긍정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창의적 행위가 개인의 의지로 가능할 것으로 생각했다. 관습을 깨는 것조차 용기로 가능했다고 생각했지만 최근에야 사회적, 제도적 환경이 중요함을 인식하고 있다. (사회적 약자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푸념으로 정답을 말했었는데 말이다. "학교가...", "회사가...", "사장이...", "팀장이...", "나라가...") '기회의 긍정'이란 것도 우리의 관습이 바뀌어야 가능할 일이다. 무조건 긍정할 것이 아니라 화가 날 때, 궁금할 때, 표현하고 싶을 때 그것을 드러내고 부정하는 일이 긍정이기도 하다는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종법적 태도(잘못된 종법적 태도)에 벗어나는 행위를 건방지고, 예의에 어긋난 것처럼 말하는 사람이 있다. 되려 그러지 않은 사람을 찾기가 매우 어렵다. 나도 학생의 언행에 화날 때가 있다. 불만스러운 언행은 무언가 축적된 잘못을 드러내고 싶음의 표현인 것을 알면서도 학생을 말을 이성적으로 고려하지 못한다. 그러니 '무지의 긍정'을 '기회의 긍정'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나부터 상대방의 내면적 소리에 귀 기울일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한다.
사실 이 글을 쓰기 전 나는 '무지의 긍정'적 사고를 가진 사람을 비판하기 위한 의도가 있었다. 하지만 간혹 교육자이기도 한 사람으로서 학생에게 '기회의 긍정'적 사고를 가지라 강요한다면 바로 내가 '무지의 긍정'적인 사람이 아닌가? '기회의 긍정'이라는 것도 반드시 부정적 사유를 통해 참된 진리를 끌어내야 하는 것이니 말이다. 그러니 내가 말하는 '기회의 긍정'적 사람이라는 조건은 내가 제시하는 '기회의 긍정'이라는 것도 부정해야 한다. 그래야 긍정(Affirmation)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나와 일, 운동을 함께했던 사람이라면 까탈스럽고 괴팍한 완전히 이중적인 모습을 잘 안다. 특히 운동할 때 말로 상대방을 방해하는 사람을 매우 싫어하는데, 한 번 그런 상황에 크게 화를 낸 나를 보며 한 마디 던져준 지인이 있다. "그럴 수 있어, 소리도 한 번 질러보고 해야지" 서예계에서 꾀 유명한 인물인데, 이렇게 간혹 던지는 한마디에 상당한 내공이 실려있다. 몇의 사람들은 내가 그러는 이유를 알기에 내 행동을 묵인했고, 당사자는 나를 비판했다. 하지만 한 마디 던져준 그분의 말은 참지만 말고 너를 한번 드러내 보는 것이 좋겠다는 의도가 담겼다. 그러면서도 풀어 설명하지 않았는데, 그런 설명이 설교가 될걸 알기 때문이었나 보다. 다행히도 의도를 잘 이해했기에 나는 내 내면을 더 정중히 표현하려는 노력을 얻었다.(노력만 얻었다)
'기회의 긍정'이려는 노력,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우리의 자세, 그것이 문화가 되는 우리의 사회가 무지하기만 한 긍정을 발휘하지 않도록 우리를 인도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매우 힘들지 않을 수 없다. "요즘 애들은 자기 마음에 안 들면 무조건 말대꾸부터 해"라며 폄하하는 것 그리고 "나 할 말은 해야 해"라고 용기로 착각하는 행위들을 바로잡기가 보통 쉬운 일이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