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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시콜콜 Jul 24. 2018

모성의 굴레

#028_굴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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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길게 생각하고 싶다.


"안 자! 애들끼리 놀아, 어른 괴롭히는 거 아냐"


남편은 아이와 잘 놀다가도 중간중간 툭툭 건드린다. 무표정한 내 모습을 화난 것으로 착각하는 모양이다. 


겨우 한 명이지만 아이를 키우다 보니 감정이 한정적이게 됐다. 신기로움으로 시작된 육아는 얼마 지나지 않아 나라는 존재를 완벽히 지워낸다. 어린이집에 보낼 시기가 오고서야 겨우 나를 찾을 기회가 오지만 지친다. 아이를 돌보는 와중엔 하고 싶은 것도, 가고 싶은 곳도, 먹고 싶은 것도 많지만 막상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나면 널브러진다. 힘듦의 보상을 받고 싶기라도 하듯 같은 처지의 엄마들과 푸념 나누는 게 일상이 된다. 극도로 집중했던 신경이 풀리며 스스로를 여유 속에 두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집안일에 끝이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심장을 엄습하는 우울감, 죄는 듯 한 심정은 어느새 엄마로서 당연한 감정이 된다. 마치 그렇게 생각해야만 하는 가두리에 갇힌 듯하다. 아이는, 내 아이는 내 사랑을, 내 애정을 받아 마땅한 아이일까? 모성은 당연한 걸까? 혹시 나로부터 출발된 생명체에 대한 의무감은 아닐까? 의무의 압박이 사랑으로 변모한 건 아닐까? 


다시 노인의 말이 떠오른다. 아무도 없는 나만 존재하는 방이라니. 모성 조차 단절된 그런 공간이 가능하긴 할까? 아무리 떼어내려 해도 그림자처럼, 생각하지 않아도 생각나는, 무의식이게 생각나는 그것들을 쉽사리 배제할 수 있을까?


엄마라는 형태가 구체화된 것처럼 일관적이게 말했던 나의 엄마. 세상은 그런 것이라 말했던 엄마의 강요가 내게도 이어지고 있는 걸까? 어쩌면 아들과의 관계를 벗는 일은 내가 엄마로부터 그리고 지금은 돌아가신 엄마가 그 엄마로부터 뛰쳐나가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모든 단절, 육체적이지 않으면서 정신적인 단절이 나를 오롯이 나로 만드는 건지 모르겠다.


노인은 자식과 연을 끊고도 태연하고, 흘겨보는 눈길에도 동요하지 않는다. 동요가 없다는 건 그만큼 그녀의 정신이 굳건하다는 증거 아닌가? 비록 몸은 늙었지만 정신만은 튼튼한 것 아닌가. 노인의 정신적 안정은 어쩌면 그 단절로부터, 그러니까 단절이 노인을 한 인간으로, 속박을 벗어난 하나의 주체로 만들지 않았을까?


오랫동안 물속에 앉아있었더니 더 배고파졌다. 마무리짓지 못한 생각은 내일 일찍 나가 노인과 더 대화를 나눠봐야겠다. 


"밖에 큰아들, 고기 좀 데워 놓으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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