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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시콜콜 Feb 13. 2020

두 번째 나

#099_갈망

딱딱한 책상에 앉아 휘어질 리 없는 모니터를 바라보며 중얼거린다.


"화면이 춤을 추네, 화면이 춤을 추네"


직장생활 9년째, 대학원을 마치고 27살에 취직한 연구소는 딱 내가 바라던 곳이었다. 하고 싶던 일이었고, 딱히 상사가 존재하지 않는 수직적 구조다. 더욱이 대외적인 명예까지도.


염증이 시작된 건 2년 전쯤일까? 더 이상 보람되지 않았다. 내 연구결과가 누구를 위한 연구가 아닌, 단지 연구를 위한 연구였다고 생각하니 더 이상 일이 잡히지 않았다. 연구노트를 몽땅 꺼내 한 장 한 장 되짚어 보니, 눈 앞의 욕심만 부리는 장사꾼이란 생각까지 들었다.


"업적 내자는 게 겨우 이따위였나"


자신의 연구결과가 위대한 업적인 냥 떠들어 대는 사람들, 고개 빳빳이 들고 손님맞이하는 사람들, 한심하다는 말투로 직업 폄하하는 사람들... 더 이상 그들의 대화에 끼고 싶지 않다. 누구보다 중심에 있었건만, 그런 지난 모습이 부끄럽다. 최근에는 직업상 의무적으로 채워야 하는 할당만큼만 한다. 직장에 대한 충실함도 사라진 지 오래다.


30분 전부터 퇴근 준비를 마치고, 핸드폰 시계의 초침까지 봐가며 6시 동시에 밖으로 튀어나왔다. 퇴근길을 도심은 언제나 소란스럽다. 7시 전후가 가장 혼란스럽지만, 지금도 충분히 복잡하다. 집에서 직장까지는 1시간, 차가 있으면 30분 정도다. 사람들은 왜 차를 안 사냐고 묻는데, 사실 운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부모님 두 분 모두 운전을 오랫동안 하셨던 분들이라 그랬을까? 그러면 더 빨리 운전을 시작하지 않냐고 물어보는 이도 있는데, 지겹다며 푸념 뱉던 부모님 모습이 어려서부터 각인되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그냥 집에 들어가기 아쉬워 집 근처 바에 들렸다. 테이블 6개쯤 되는 작은 홀에 사장님 한 분만 계신데, 160 정도의 키에 동글동글한 인상을 가졌다. 마스코트인 커다란 삽살개는 매번 취한 듯 엎어져 있다. 겨우 눈썹 들추는 모양새로 나를 반긴다는 걸 안다. 양팔을 꽤 크게 벌린 정도 크기라 처음엔 삽살개라는 생각을 못했다. 토종 삽살개가 그렇게 크다는 건 여기서 처음 알게 된 사실이다.


"안녕하세요. 지난번 남은 보드카랑 오렌지 주스 한병이요. 그리고 저녁 안 먹었는데 오늘 가능한 요리 하나 주세요."


"오늘은 식사될만한 게 없는데, 계란 간장밥 어떠세요?"


"최고죠."


간혹 지난밤 안부를 묻는 친구에게 바에서 술 한잔 했어라고 하면 '거기서 아가씨랑 시시덕 대지 말고 여자를 좀 만나'라며 대답이 돌아올 때가 있다. 그런 곳 아니라며 설명하기도 하고, '네가 다니는 바는 다 그런 곳이냐'라며 공격하기도 한다.


"식사 여기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일찍 와서 그런가? 사람이 없어서 조용하네요."


"요즘은 철이 아닌가 봐요. 이번 주 내내 그랬어요. 음... 사람 대신 다른걸 좀 채워야겠군요."


장식처럼 보관된 통기타를 꺼내 들고, 칵테일 만드는 공간을 빠져나왔다. 손님이 앉는 높은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줄을 몇 번 튕기더니 튜닝이 잘 됐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30초 정도다. 스피커를 끈 후 지금까지 흐른 시간이. 조용하고 어둑한 분위기, 작은 바람에도 흔들리는 촛불들을 보고 있자니 내 감각들이 선명해졌다. 창을 타 넘는 흐릿한 차 소리와 간장 냄새가 만지 듯 느껴진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이에게 시와 노래는 애달픈 양식..."


김광석의 '나의 노래'란 노래를 나직하고 고요히 읊조렸다. 기타 줄은 많아야 두 줄 정도만 사용한다. 원곡은 경쾌한 박자지만 분위기에 맞춘 듯했다.


"안녕하세요"


1절도 못 마쳤을 때 손님이 들어왔다.


"오랜만에 오셨네요."


"계속 출장이 겹쳐서 힘들었네요. 노래 마치시고 주던 걸로 주세요."


새로 온 손님에게도 익숙한 광경이었나 보다. 사장님은 술과 안주를 챙겨주고 다시 노래를 이어나간다. 나는 술 한잔을 노래 한곡에 꺾어 마시며 시간을 음미한다. 언젠가 직업 이야기를 했을 때, 멋진 일 한다며 나를 치켜세우던 사장님 모습이 떠올랐다. 많은 이들에게 도움되는 일이라며 자랑하듯 말했었는데. 술이 올라 붉어진 얼굴만큼이나 부끄럽다. 지금 이곳에 내가 사장이었다면, 둘의 시간을 책임질 만한 사람이었을까? 나 스스로 조차도 책임지지 못하는데.


"사장님 오늘 노래 감사했습니다."


11시쯤 가게를 나와 집 주변을 돌았다. 들어가도 앉지 못하고 서성일까 봐. 


"이 일을 계속하는 게 맞나?"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자'라는 강박이 손끝, 발끝부터 스몄다. 1년 전엔 끄트머리 정도였는데, 이젠 심장 근처까지 도달했다. 봉사활동을 해보라는 지인의 말에 연탄 나르기나 보호시설을 다녀온 적도 있지만 도움되지 않았다. 그런 것으로 해소가 되는 사람도 있겠지마는 나는 아니었던 것 같다. 다른 류의 즐거움을 나누길 바라는가 보다. 


"하,,, 내가 나도 모르는데."


다음날, 나는 다시 딱딱한 책상으로 돌아왔다.


"화면이 춤을 추네, 화면이 춤을 추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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