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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섬돌 Aug 07. 2023

【느리게 살기】

 

 회사 입사 이후 퇴사 전까지 27년을 나의 기상 시간은 대체로 6시를 넘기지 않았다. 직장인으로서 의무감이라고 하기에는 강제성도 있었던 것 같다.      


 “넌 용가리 통뼈야? 왜 이제 나오는 거야?”     


 내가 신입사원 때 9시가 아니라 8시에 출근하면서도 상사의 짜증스런 소리를 들었고, 오전 내내 그 상사는 나를 괴롭혔다. 물론 대체로 7시 30분에 회사를 나왔지만 그날은 전날의 숙취로 도저히 일찍 일어날 수 없었다. 1990년대 말 홍보실의 야간업무는 기자들과 술자리가 다반사였다. 그날도 새벽에 귀가했고, 과도한 음주로 아내의 격한 기상신호가 아니었으면 난 일어나기 어려웠을 거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마을버스에 몸을 구겨 넣고 20분 와서 또 10분을 걸어오니 오전 8시가 조금 넘어 사무실에 들어올 수 있었다. 그나마 회사가 가까워서 다행이었고, 매일 그런 것도 아니고 입사 후 처음 있는 일이어서 별일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상사의 불호령은 내가 대역죄인이 된 기분이 들게 했다.     


 당시만 해도 사무실에는 오전 8시 전 출근이라는 보이지 않는 그라운드룰이 있었다. 아니 그라운드룰이기보다는 그냥 상사가 정한 룰이었는데 아무도 거부하지 않았다. 그렇게 10년이 지나니 몸에 익은 습관처럼 늘 7시 30분이면 회사 책상에 앉아 있게 되었다. 그리고 또 10년이 지나도 그 습관은 없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26년째 직장생활을 하는데 몸에 이상이 왔다. 십이지장에 혹이 생겨 수술을 하게 되었고, 담당의는 이제 중년이 지나 노년으로 가고 있으니 몸을 너무 혹사하지 말라했다.      


 앞만 보고 달려온 27년 6개월의 직장생활을 뒤로하고 은퇴를 선택했다. 그것 역시 건강을 제일 우선순위에 놓으니 가능한 결정이었다. 그리고 제일 처음 해보자 했던 것이 평일 아침 늦잠을 자는 것이었다. 사실 나는 ‘아침형 인간’이 아니다. 그런데 직장생활 내내 ‘아침형 인간’인 척하고 살았다. 무척 괴로웠다. 아침에 실컷 자는 것이 소원이었다. 물론 주말에 늦게 일어나는 날도 있었지만 평일에 그러고 싶다는 로망이 있었다.      

 처음에는 역시 새벽 5시면 눈이 번쩍 떠졌다. 그렇게 3주 정도 지나니 기상 시간이 1시간 정도 늦춰졌다. 그리고 다시 또 3주 지나니 아침 7시까지 푹 잠을 잔다. 퇴사 직전에는 잠을 못자 그렇게 힘들었는데 이제는 쿨쿨 잔다. 누군가 잠자는 시간이 아깝니 않냐? 하지만 나에게 잠은 건강을 지키는 최고의 조치였다. 그리고 늦게 일어나니 모든 것이 천천히 늦게 시작된다. 출근하자마자 네스프레소 버튼을 눌러 급하게 마시던 커피 대신 느리게 내려오는 드립커피와 우유를 데워 커품을 내고 다시 시나몬 가루로 향은 내는 카푸치노를 즐기니 정말 삶이 느려지긴 했다.        

 “여보 일어나지요?”

 “음~~~ 나 좀 더 자고.”     


 나를 깨우는 아내의 알람소리가 이제 익숙해졌다. 전에는 아내가 일어나기도 전에 내가 먼저 나가야 했으니 이런 아침의 달콤함도 없었다. 가끔씩은 돈을 벌지 않는다는 현타(현실 자각 타임)가 있기는 하지만 지금 나는 행복하다. 하루 종일 음악 들으며 책을 보고 싶다는 것도 이제는 희망이 아니라 습관이라 말하게 되었다. 국악을 좋아하지만 마음 놓고 듣기 어려운 장르여서 이어폰으로만 접했는데 이제는 내 거실에서 자유롭게 대금 연주를 듣는다. 운동도 일주일에 두 번은 꼭 하자 마음먹고 의무감으로 하니 몸이 쑤시고 근육을 다치곤 했는데, 이제는 뭐 하고 싶을 때 자전거도 타고, 동네 앞산도 가고, 골프연습장도 가니 즐겁다.      


 세상 급할 게 뭐가 있겠는가? 때론 느리게 사는 것도 괜찮아 보인다. 오늘은 장기하의 ‘느리게 걷자’를 들어야겠다.          




우리는 느리게 걷자 걷자 걷자(걷자 걷자)

점심때쯤 슬슬 일어나

가벼운 키스로 하루를 시작하고

양말을 빨아 잘 펴 널어놓고

햇빛 창가에서 차를 마셔보자

우리는 느리게 걷자 걷자 걷자(걷자 걷자)

우리는 느리게 걷자 걷자 걷자(걷자 걷자)

그렇게 빨리 가다가는(우후후)

죽을만큼 뛰다가는(우후후)

아 사뿐히 지나가는 예쁜(우후후)

고양이 한 마리도 못보고 지나치겠네


-장기하 <느리게 걷자>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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