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는 어떻게 삶을 바꿨나(12)
베를린은 참 재밌는 곳이었어요. 클럽에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곳이었죠. 그러니까 딱 1년 전, 글의 앞부분에 ‘제주도 파티 게스트하우스’에서 얻었던 깨달음과 비슷했어요. 다만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때의 깨달음은 재미가 ‘나’의 행복을 보장해 준다는 생각이었다면 이번 깨달음은 재미가 ‘모두’의 행복을 보장해 준다는 것이었어요. 공공성의 의미로 확장된 거죠.
이는 ‘나’의 재미에서 ‘모두’의 재미로 확장한 경험이 기반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봐요. 제주도에서 재미의 가치에 대해 깨닫고 회사에서 이래저래 시도해 본 뒤로 경험치가 쌓인 거죠. 그 재미는 철학에서 얻었던 ‘니체가 깨달은 초인이라는 존재는 하이데거가 실존자와 현존재를 말할 수 있도록 하여 인간이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 와 같은 어렵고도 하드 한 문장에서 주어지는 도파민과는 거리가 멀었어요. 같은 공을 슈팅하고, 슈팅하는 공을 전심으로 막고, 마지막 남은 막창을 나눠먹으며 얻은 즐거움이었죠.
이 경험들을 통해 모르는 사람들과 혼자 축구하고, 혼자 밥집과 카페를 찾아다니고 좋은 공간에 가는 것에서, 모두와 함께 할 때 즐거울 수 있다는 감각이 생겼어요. 그렇게 할 수 있는 최선의 즐거움을 채우고 나자, 어느 순간 ‘여행을 가야겠다-‘라는 생각이 스칩니다. 좋은 여행지는 머무는 것 자체만으로도 생각을 바꿔주거든요. 당시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재미와 모임에 대한 생각들을 나름대로 현실로 구현해 내고 있었습니다만 뭔가 아쉬운 부분들이 많았어요. 그래서 적막 같던 겨울을 거치고 난 뒤, 여행 계획을 세웁니다. 연장근무한 시간들을 차곡차곡 모아 장기 휴가를 갈 수 있는 휴가를 모았습니다. 그렇게 베를린행 비행기 티켓을 구매합니다.
왜 베를린이었나-는 베를린을 다녀오고 나서 알았어요. 베를린의 경험이 삶을 어느 정도, 아니 꽤 바꿔놨거든요. 제가 알던 자유와 즐거움은 흉내 정도일 수 있다는 사실을 느꼈습니다. 가장 큰 깨달음을 준건 박물관이나 미술관, 베를린 방벽등이 아니었어요. 물론 그 공간들도 매우 중요했지만 저에게 가장 중요한 깨달음을 준건 바로 클럽이었습니다.
멋도 모르고 베를린행 티켓을 끊고 나서는, 그래도 일주일 전 어디를 가야 할지 고민합니다. 그래도 콘셉트라도 정해야 한다는 생각에요. 그렇게 찾아보던 중 다름 아니게 발견한 것은 ‘베를린 클럽’. 베를린의 테크노 뮤직이, 그것도 무형문화가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문화였다는 사실을 알게 됐죠. 아- 이거다 싶었습니다. 경험과 역사가 응축된 판소리와 같은 무형문화도 아니고, 어떤 예술적인 작품의 의의가 있는 유형문화도 아닌, 클럽문화가 인증되었다니-말이에요.
후기들을 찾아보니 새벽 1-2시에는 출발해야 한다는 후기들이 많았어요. 그래서 저는 당찬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다름 아닌 새벽 1-2시에 깨어 몇 시간을 놀고, 다시 잤다가 오후에 여행을 하는 계획이요. 지금 보면 무슨 정신머리와 체력으로 그 행동들을 했나 싶지만 그걸 또 며칠 동안 해냈어요. 그렇게 저는 베를린에 머무는 11일간 약 5일 이상을 클럽에 방문하게 됩니다. 한국의 클럽과 목적은 좀 다르다는 생각을 두고요.
물론 아닌 분들도 있겠지만 저에게 한국의 클럽은 인간관계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선입견이 있는 편이에요. 흥과 노는 것 자체에 초점이 있는 분들도 많겠지만 여러 의미에서 사람을 사귀러 가는 분들이 많았던 것 같거든요. 그래서 그런지 ‘베를린의 클럽은 조금 다를 거야-‘라는 기대감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선입견이긴 하지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저는 베를린의 클럽에서 휠체어 댄스를 보았어요. 그것도 메인 스테이지와 같은 곳에서요. 여기엔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었죠. 첫째, 클럽의 가드는 장애인을 막지 않았다. 클럽의 가드는 장애인을 막지 않았기 때문에 클럽에 들어올 수 있었어요. 그러므로 와서 춤을 출 수 있었습니다. 저에겐 마치 ‘흥에 진심이라면- 모두 들어올 수 있어-‘라고 말하는 것 과 같았어요.
둘째, 메인스테이지로 올라왔다. 클럽의 사람들은 장애인과 같이 춤을 췄어요. 전혀 이상하지 않은 채로요. 그리고 그 춤이 멋있었는지 메인스테이지와 같은 곳으로 그를 이끌었어요. 몇몇 사람들은 휠체어를 잡고 함께 춤을 추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다 어울려 춤을 췄습니다. 그때 제 질문이 바뀌었습니다. ‘이들은 장애인을 차별하는가?’라는 삐딱한 시선이, ‘이들은 얼마나 이 춤을 독특하게 보는가?’ 로.
셋째, 휠체어 댄스를 췄다. 그때 ‘차별하는가-차별하지 않는가’라는 이분법의 구조가 부서졌어요. 오히려 춤을 추는 사람들 그리고 그 댄스를 보는 사람들은 이 춤이 ‘힙한가-힙하지 않은가’라는 모습으로 보고 있었죠. 그 예술에 동참하고 어울리기 위해 관찰하기도 하고, 같이 춤을 추기도 했어요. 그 순간 그의 장애는 불편한 것이 아니었어요. 그의 장애는 독특한 것이었고, 예술을 만들어내는 핵심적이자 중요한 요소였고, 오히려 모두와 어울릴 수 있는 특징이었습니다.
여기서 ‘모두’는 단순히 휠체어에 앉아 있는 그분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거기엔 할머니, 할아버지, 노인도 있었습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도 와서는 각자만의 춤을 췄습니다. 젊은 친구들과 어울리면서요. 물론 동양인인 저도 있었어요. 춤을 추다 지쳐 테이블에 앉아있던 저에게 갑자기 라틴계열의 친구 두 명이 오더니 ‘여기서 이러고 있으면 안 된다’며 팔을 잡고 끌고 스테이지로 끌고 나가더라고요. 그렇게 함께 춤을 추고 나서는 그들은 저에게 ‘진짜 재밌게 놀았어 친구-!’라며 포옹을 해줬습니다.
장애인, 할머니, 라틴과 아시안이 함께 어울려 춤을 출 수 있는 단 하나의 키워드, 그건 흥과 재미였습니다. 재미는 저뿐만 아니라 모두를 즐겁게 했습니다. 사람과 사람의 경계를 허물고, 그저 이 사람이 지금 ‘재밌는가 아닌가-‘라는 질문을 던지게끔 했어요. 그러면서 어느샌가 ‘차별하는가-차별하지 않는가-‘라는 질문은 저기 밑으로 들어가 버렸죠. 이미 재미 위에서 차별은 해결되어 증발해 버렸거든요.
물론 소위 말해 ‘입구컷’이 높은 클럽들도 있었습니다. 동양인이기 때문에 클럽에서 쫓겨났다-고 생각할만한 상황도 있었어요. 그러므로 저는 베를린의 모든 클럽문화와 분위기를 제 마음에 담아낼 순 없었어요. 이 장면이 모든 베를린의 모습을 담아내는 건 아니지만 재미의 힘을 보고 온건 사실이었습니다. 그렇게 재미로 하나가 될 수 있다-라는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더 깨달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 재미를 지탱할 수 있는 건 ‘자유’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렇게 다시 돌아온 한국에서는 업무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귀국하자마자 오후에 업무를 시작한 저는 업무에 뚜드려 맞고 있었죠. 그렇게 정신을 차려보니 한 개, 두 개씩 베를린 이야기가 정리가 됐습니다. 재미, 유대인학살, 베를린 장벽, 클럽 등등의 키워드가 스쳐갔어요. 그리고 그 끝에 바로 자유가 있었습니다. 어떻게 그 클럽에서의 장면을 내가 볼 수 있었는지 고민하고 있었나 봅니다.
자유. 그것은 분명 자유였습니다. 제 판단일지 모르지만 필히 자유의 감각이었어요. 그러니까 이 공간에서 타인을 차별하지만 않는다면, 네가 충분히 즐겁기만 한다면, 타인을 해치지만 않는다면 네가 누구든, 어떤 사람이든, 어떤 마음이든 상관없다-라는 자유였어요. 그리고 그 자유가 장애인을, 동양인을, 라틴인을, 노약자를 모두 ‘사람’으로 보게 했다고 생각됐습니다.
이 인식의 변화는 저에게 큰 전환과 깨달음이 됐어요. 칫, 자유가 거기서 거기지 뭐-가 아니었죠. 어쩌면 지금까지 살았던 삶의 방향들, 삶의 이해들을 모두 바꿨어요. 심지어 내가 원하고 꿈꾸고 생각하는 것도 서서히 변경하기 시작했습니다. 상상력의 근간과 방향성의 나침반을 흔들고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제가 들었던 그리고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많이 건네었던 말은 ‘네가 다른 사람의 자유를 해치면 너는 그 자유를 누릴 권리가 없다’였어요. 마치 내가 다른 사람 것을 훔치면 너는 그 사람이 너의 것을 훔쳐도 할 말이 없다-라고 비유해야 할까요. 혹은 네가 다른 사람을 때리면 너도 맞는 게 당연하다-라고 해야 할까요. 사실 당연하지 않지만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써 저는 어른들에게 그리고 스스로에게 이 문장을 계속 들으면서 자라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저는 “하지 말아야 할 것”이 정말 많았어요. 다른 사람이 나에게 하지 않았으면-하는 일들을 정말 신경을 많이 썼거든요. 그래야만 저를 방어할 수 있었고, 나댄다는 소리를 듣지 않을 수 있었고, 공격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스빈다. 그러다 보니 제 신경은 오직 하지 말아야 할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베를린 클럽에서도 이곳은 차별의 공간인지, 아닌지- 다른 사람들은 차별하는지-차별하지 않는지 계속 판단했어요. 나도 모르게 그들을 차별했을 때 내가 할 말이라도 있을 것 같아서요. 하지만 이 문장의 가장 큰 한계는, 이 문장이 부정문이었다는 겁니다.
반대로 베를린 클럽의 사람들은 굳이 말하자면 “해야 할 것”에 신경을 쓴 것 같았어요. 물론 그들도 저와 비슷하게 ‘차별’에 대한 감각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최소한 다른 사람을 때리지 말고, 소외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감각은 있었던 거 같아요. 하지만 그들은 “하지 말아야 할 것”에 신경 쓰지 않았어요. 그들은 그저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넘지 않으며 나는 어떻게 즐겁게 놀아야 하는가. 어떻게 멋지게 춤을 춰야 하는가-. 어떻게 함께 즐길 수 있는가-를 신경 쓰고 있었어요. 최소한의 룰을 지키면서 “해야 할 것”을 생각하고 행동하고 곧 누리고 있었습니다.
최소한 이 시각은 “해야 하지 않을 것”을 생각했던 저에겐 충격이었습니다. 매 번 이것만 하지 말자- 이것만 하지 말자-를 생각하던 사람과 다르게, 이 걸해 볼까-! 저 걸해 볼까-! 하는 마음이 느껴졌거든요. 클럽 안의 사람들은 법칙이나 룰을 자신을 얽매는 요소로 이해하지 않았어요. 그러다 보니 그들은 자유롭고 재밌게 놀 수 있었습니다. 걸리적거리는 행동 없이요.
그들은 자유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저를 어느 정도 옭아맸던 “하지 말아야 할 것”조차도 자유를 위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룰에 의해 눈치를 보고 에너지를 쓰고 있어 어느새 약간의 증오심이 생겨버린 저와는 다르게, 그들은 룰의 필요성을 느껴 거기에 호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어요.
그 이후로 저는 ‘하지 말아야 할 것’보다 ‘해야 할 것’들에 대해 많은 고민을 시작한 것 같습니다. 한국에서 나고 자라며, 한국의 교육 시스템에서 듣고 자라며 들었던 것들을 조금 비틀어서요. 또한 오히려 ‘이 룰이 왜 필요하지?’라고 질문하기 시작하기도 한 것 같아요. 그건 그 룰이 실현하려고 했던 가치에 대해, 하지 말아야 할 것-이 아닌 해야 할 것-에 집중하기 시작했기 때문인 것 같고요.
제가 베를린에서 본 건 해야 할 걸 제대로 할 경우,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지킨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차별하지 않는 마음으로 잘 놀 경우, 휠체어 댄스를 힙하게 대할 경우, 모두가 건강하게 즐겁게 노는 경우, 하지 말아야 할 것은 자연스럽게 지켜졌어요. 그렇게 저는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전전긍긍하는 사람에서 점점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묻는 사람으로 변했습니다.
그렇게 저는 “해야 할 것”이 더 소중해졌습니다. 정확히는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지 않기 위해 ‘해야 할 것’이요. 그렇게 저는 재미와 의미를 통합해 냅니다. 건강한 재미를 추구하면 해야 할 것을 자유롭게 하면서-하지 말아야 할 것을 지킬 수 있겠구나-싶었어요. 과거에 저에게 항상 묻던 질문은 이것이었습니다.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가?’ 그러나 이제 저에게 남는 질문은 이것이었습니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