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투. 사실 질투가 많은 편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못난 감정이라고 생각했을 때가 많았다. ..
누군가가 잘될 때, 누가 사랑받을 때, 그 모습을 바라보는 내 마음이 부끄러웠다. 특히 내가 가진 질투는 '저 사람은 나보다 더 똑똑하고 잘나지 않았는데, 왜 사랑받지?'라는 감정이었다. 하지만 하지만 어느 순간, 질투라는 감각을 느낄 때 이런 전환이 찾아왔다.
정신분석가 라깡은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다”라고 말했다. 즉, 내가 원한다고 생각했던 감정, 목표, 사람들 그 시작점을 들여다보면 ‘내가 욕망했던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욕망하던 대상을 내가 따라 욕망하게 된 것이 이다. 즉, 우리는 종종 ’그 사람이 욕망하는 것을 나도 욕망하게 되는’ 구조 속에 놓인다.
그런데 내가 생각한 건, 그 욕망을 인지하는 감각이었다. 누군가는 저 사람을 질투하지만, 왜 나는 질투하지 않지? 그건 내가 미묘하게 '감각'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누구보다 그 사람의 포인트를 잘 알고, 누구보다 그 사람이 잘되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내 감각은 더 날카로워졌다.
‘나도 저렇게 살고 싶다.’
‘저 사람처럼 중심에 서고 싶다.’
‘저런 관계를 맺고 싶다.’
해당 문장들은 질투에서 나오는 문장들인데, 이 문장들은 상대방의 흐름이나 상태인
"저런 관계", "저런 중심", "저렇게"를 인지할 때만 나타난다.
질투는 결국,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어디에 서고 싶은지를 알려주는 감각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이 질투를 감추려 하거나, 부끄럽게 여기지만 그러므로 나는 조금 다르게 생각한다.
나는 사람들이 질투할 때마다
"아 저 사람은 감각적인 사람이구나-" 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질투를 느낄 때, 동시에 방향을 감지하고 있다. 그 사람의 언어, 리듬, 감정의 결, 사회적 위치…그걸 감지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감각의 증거다. 사랑받고 싶은 마음, 중심에 서고 싶은 마음, 그건 오히려 지금 사랑하고 싶고 살아 있고 싶다는 증거다.
프롬은 말한다.
“사랑은 소유가 아니라, 살아 있게 하는 능력이다.”
나는 프롬의 이야기를 이렇게 받아들인다. 질투는 결코 무의미한 감정이 아니다. 그건 아직 방향을 잃지 않았다는 증거이고, 감각이 여전히 예민하게 살아 있다는 증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