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못 받고 자랐지만 질투하지 않습니다.

by 시몬 베유

사랑을 못 받고 자랐지만 질투하지 않습니다.


“사랑 많이 받고 자랐겠어요.” 내 가정사를 모르는 이들은 나에게 짐짓 이런 말을 던지곤 한다. 이 말은 칭찬의 기쁨과 가정의 둔탁함 어딘가를 강하게 긋고 간다. 상대방의 밝은 얼굴에 나는 ‘칭찬의 기쁨’ 쪽을 보여주곤 하지만, 왠지 모르게 마음엔 소위 ‘긁’히는 마음의 찝찝함이 남아있다. 미숫가루를 생으로 먹었을 때의 텁텁함.


그러므로 가끔 좋은 사랑을 무럭무럭 먹고 자란 사람을 질투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은 사랑을 주는 법도, 받는 법도 알았다. 대학교 1학년 시절, 인간관계의 거의 모든 면에서 “이런 것도 알려줘야 해?”라는 눈빛이 쌓이던 시절, 그러니까 ‘모태솔로지만 연애는 하고 싶어’를 보며 마냥 재밌게 웃지 못하는 이유가 됐던 시절, 나는 능숙하게 하는 이들을 질투했다.


그렇게 10년여가 지났고, 나도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겠어요”라는 말을 종종 듣고, 쌓은 사랑을 줘보기도 하고, 반대로 사랑을 받아보며 안 것. 아, 사랑을 받기만 하는 것과 사랑을 스스로 먹여보는 것은 또 다른 일이구나. 그렇게 질투가 사라지니 반대로 사랑을 굳건히 받았음에도 불행한 친구들이 보였다.


그래서 시작한 고민. "그런데 사랑을 굳건히 받은 사람임에도 불행할까." 스스로 생각해보고 결론지은 차이는 이랬다. 스스로 사랑을 주는 법. 곧 자기 자신에게 사랑을 지어 먹이는 법을 아는가. 모르는가.


내가 문학, 철학, 미술, 음악에서 배운 건 스스로 사랑을 먹이는 방법과 힘이었다.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많은 이들은 주린 배를 내버려두고 가만히 있던 건 아니었다. 나름대로 발견한 사랑을 먹여 짓는 방법으로 스스로에게 사랑을 줬고, 그 기록들은 반대로 타인을 살리는 일종의 ‘레시피’이기도 했다. 예술가 자신을 살리는 도피처이자 상대방을 살려내는 환대처. 나는 그 레시피들을, 보고, 듣고, 활용하고, 스스로를 먹였다. 그렇게 10년여가 지났다.


질투는 많이 적어들었고, 나는 많은 것에 휘둘리지 않는다.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만큼 사랑을 준다. 회사의 문화를 조금 바꾸기도 하고, 내가 있는 곳은 어쨌든 화사하고 즐겁게 바뀐다. 사람을 모으고, 또 사람과 어울린다.


반대로 (판단하는 무례를 용서해 줬으면 한다.) 사랑을 받기만 한 사람들은 어떠한지 나 나름대로 선입견을 가지고 판단해 본다. 특정 수준의 사랑을 받고 있었으니 이를 유지해야 하면서도, 스스로 사랑을 주는 방법을 모르니 사랑의 모자람을 경험하는 것만 같다. 그럴 때 유지하는 건 주변으로부터 의지하는 사랑이다. 하지만 주변으로부터 사랑은 한계가 있다. 기업이 스스로 가진 힘 없이 굴러가면 위태롭듯이, 사랑도 마찬가지다. 사랑을 위탁하고, 사랑을 외주하면 주체성이 사라지는 것만 같아 아쉬운 마음.


그럼에도 그나마 가진 부러움은, 그럼에도 엄마가 요리사라면 좋은 요리를 배울 가능성이 있듯, 그들은 어깨너머로 사랑을 배운다는 점. 실제로 결혼도, 사랑도 잘하는 것만 같아, 그 레시피를 기웃거리기는 한다. 사실 사랑을 받고 자란 이들은 좋은 사랑을 짓는 법을 어느 정도 안다. 그들은 부모가 서로에게 하는 사랑과 자신에게 주는 사랑을 보고 배웠다.


레시피가 없는 나는 어떤가. 나는 조금 독특한 방식으로 사랑하는 법을 배웠으므로 이 삶이 썩 만족스럽기는 하다. 남에게 써먹기 애매하고, 자신만 채우는 사랑일 순 있으나 또 나름대로의 독특성과 창의력이 있다. 언제나 철학자들은 나에게 말을 걸고, 나는 나름대로 삶에서 스스로 사랑을 짓는 법을 구상해나간다.


그러므로 사랑을 받지 못했다면, 조금의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이 글에 쥐여주고 가고 싶다. 그럼에도 다른 세계에서, 비슷한 감수성을 겪어내고, 사랑의 레시피를 만들어낸 이들의 사랑의 방법이 있다. 사랑 역시 노력은 배신하지 않으며, 언젠가 도달할 수 있음을 난 간절히 응원한다. 부디 이 글이 자랑으로 전달되지 않기를 빌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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