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이 안 써도 되는 제도용 글씨체가 있다.
이 글씨체의 특징은 좁은 공간에 쓰기 좋게 좀 길게 생겼다.
굳이 설명하자면 내 글씨는 통통 직사각형이다.
내 글씨체의 특징은 넓은 공간에 쓰기 좋게 좀 넓게 생겼다.
평면도의 표제란에는 공사명, 도면명, 수목수량표, 시설물수량표, 축척과 방위를 기록한다.
특히 수목수량표에는 10여 종이 넘는 나무의 성상, 수목명, 규격, 단위, 수량을 모두 적어야 한다. 좁은 공간에 보기 좋고 깔끔하게.
이름이 긴 나무가 나오면 내 글씨는 긴장모드다.
나무가 어디 소나무만 있겠나. 스트로브잣나무는 단골로 등장한다.
좁은 칸에서 힘을 빼고, 살을 빼도 깔끔하고 균일하게 쓰기 힘들다. 몇 번씩 지우기를 반복하니 지저분해져서 늘 마음에 걸렸다.
고민 끝에.
너무 늦은 것은 아닌지 걱정하면서 글씨체를 바꿨다.
용감해서 해결되는 문제는 아니다. 오래된 습관을 고치기는 정말 어렵고 힘든 일이다.
짬이 나면 글씨 연습을 했다. 마음먹고 앉아서 글을 쓰면 제법 써지는 듯하다가도 설계도를 그릴 때 마음이 급하면 넓고 통통한 원래 글씨로 돌아가기도 했다. 그래도 살짝 뾰족하고 날씬한 글씨를 위해 찾기도 힘든 내 인내심을 발휘하는 노력을 계속했다.
그랬더니 내 글씨에 제도용 글씨체가 합해져서 흡족하지는 않아도 타협은 가능한 살짝 날씬한 글씨가 만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