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장수생 Feb 10. 2022

아빠, 나 이것도 처음 해봤어

휴직 중 아빠와 방학 중 딸 - 32, 33일째

-32일째 - <아빠, 나 이거 처음 해본다>


정말 정말 오랜만에 막내가 유치원을 갔다. 설 연휴부터 시작된 방학에 아이도 나도 지쳐가고 있었는데, 다행히 지난주 목, 금 나오지 않는 한 명뿐인 친구가 오늘부터는 유치원을 온다고 한다. 다행이다. 우리 아들 포함 3명만 유치원에 다니기에(전체 4명 중 3명만 방학 중 방과 후 학습을 신청함) 한 명만 오지 않아도 유치원이 너무 심심하기에 보내지 않는다.


그래서 방학 중 평일 스케줄을 오늘은 정확하게 지켜서 해 볼 수 있는 날이었다. 아침에 막내 유치원 데려다주고, 집에 와서 세탁기와 청소기를 돌리고, 씻고, 옷 입고 딸을 데리고 클라이밍장에 갔다. 운동 후 점심은 딸에게 직장인의 점심을 알려주는 시간으로 부대찌개를 먹으러 갔다.

부대찌개를 먹던 중 탄산음료가 먹고 싶어서 사이다를 한 병 시켰다. 이 집은 캔이 아니라 병 음료를 주는 곳이었다. 직원분이 사이다 한 병과 병따개를 주고 가셨다. 그래서 병을 따려고 하는 그때 딸이

"아빠, 내가 따 보면 안 돼? 나 한 번도 안 해봤는데?"

"진짜! 병따개 한 번도 안 해봤어?"

"응. 맨날 캔이나 뚜껑 돌려서 따는 음료수만 먹었지"

"그래. 한번 해봐"

"병따개 어떻게 잡는 거야?"


그렇게 딸에게 병따개 잡는 법과 따는 법을 알려주었고 딸은 시원하게 인생 첫 병 음료 뚜껑을 열었다. 생각해보지도 않았다. 설마 병따개 사용을 처음 해볼 줄이야. 벌써 13살인데도 말이다.


그러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어찌 됐던 또 딸의 처음을 내가 도와주었고 함께 했었다는 것에. 예전 글에서 쓴 적이 있지만 휴직 중일 때 아이들의 처음을 많이 해주고 싶었다. 그런 계획의 대부분은 여행이나 돈이 드는 것들이었다. 그런데 돈도 안 들면서 아이에게 웃음을 줄 수 있는 해보지 않은 것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나한테는 너무 별거 아닌 것들이라 이런 것들을 경험하게 해줘야 한다는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 병따개 사건으로 생각을 바꿔 보기로 했다. 쉬운 거, 나에게 너무 흔해서 그냥 지나쳤던 것들 중에서도 내가 아이들에게 알려주고 함께 경험해 볼 수 있는 걸들이 충분히 있을 것 같다.


그런 것들부터 아이들과 함께 해봐야겠다.

'딸, 별거 아닐 수 도 있는 거고 나중에는 어디서 배웠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흔한 일일 테지만 너의 처음을 아빠가 도와줄 수 있어 너무 좋았어'


-33일째 - <아빠, 나 이것도 처음 해봐>


41번째 나의 생일이다. 덕분에 오늘 아침은 내가 준비하지 않아도 됐다. 아내가 미역국을 끓여 주었다. 거의 1년 만에 국을 끓이다 보니 "국이 너무 짜게 된 것 같아"라고 말을 하며 자신 없어했지만, 내가 준비하지 않고 얻어먹었다는 기분만으로도 그 국은 굉장히 맛있게 느껴졌다. "맛있네. 여전히 잘 끓이네"


그리고 딸이 예전에 큰아빠한테 받고 사용하지 않고 있던 아이스크림 케이크 쿠폰으로 내 생일 케이크를 사준다고 했다. 시골이라 근처에 가게가 없으니 당연히 딸을 데리고 내가 직접 운전해서 내 케이크를 사러 갔다. 그나마 딸이 본인이 사고 싶은 게 있었던 것 같은 눈치인데 꾹 참고 "아빠, 먹고 싶은 걸로 골라"라고 말하는 게 역력히 눈에 보였다. 그래서 그냥 나 먹고 싶은 걸로 샀다. 이런 기회가 또 언제 있을지 모르니깐.

그렇게 사 온 아이스크림 케이크를 고이 잘 모셔두었다가 막내가 유치원에서 돌아오자마자 내 생일 축하 파티를 시작했다. 케이크를 열고 초를 꽂고 불을 지펴야 하는데 이때도 딸이

"아빠, 내가 불 붙이면 안 돼?"

"성냥인데 할 수 있겠어?"

"한번 해 볼게"라며 몇 번 실패 후 성냥에 불은 붙여 냈다. 

"대단하네"


이렇게 오늘도 우리 딸은 인생 처음 성냥에 불 붙이기를 해냈다. 그리고 그 처음에 또 내가 함께 했다. 그렇게 우린 또 하나의 첫 추억을 남겼다. 나한테 추억인데, 아이한텐 그냥 기억이 될 수 도 있긴 하겠다. 그렇게 까지 신기하고 신비한 일은 아닐 테니.


병 음료수 뚜껑 따는 거, 성냥불 붙이는 거 정말 별거 아니고 앞으로 살면서 수 없이 해볼 수 있는 흔한 일일 테지만 어제오늘 이것들을 처음 했을 때의 즐거웠던 기억과 그 자리에 함께 했었던 나의 모습을 딸이 기억해 주었으면 좋겠다. 난 다른 사람이 병뚜껑을 따거나 성냥에 불 만 붙여도 딸의 모습이 떠오를 것 같다.


그러면서 빨리 더 많이 찾고 싶다. 딸은 아직 해보지 않은 소소한 일들을. 내가 꼭 가르쳐 주고 싶기에.


이전 17화 딸의 취미를 함께 해보았습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