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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보고서를 쓰고, 쓰레기를 만들다

by 장수생

재무과에서 국유재산을 업무를 맡게 되면, 가장 많이 하는 일중 하나가 보고서 작성이다. 하지만 농대에서 근무하는 4년 동안 단 한 번도 한 장짜리의 보고서를 작성해본 적이 없다. 당연히 제대로 배운 적도 없다. 재무과 발령 후 처음 발생한 민원에 대하여 보고를 해야 했다. 과장님이 보고서를 작성해서 갖다 달라고 하였다. 전임자가 예전에 만들었던 보고서들을 참고해서 한 장짜리 보고서를 만들어 보았고, 내 생각엔 충분이 내용이 전달될 만큼 잘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보고를 받은 과장님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셨던 것 같다.


과장님 실에 들어가서 조금은 뿌듯하고 당당하게 칼라로 뽑은 화려한 보고서를 드렸다. 과장님은 한 숨을 한번 내쉬더니 나보고 옆에 앉아 보라고 했다. 그리고 빨간색 플러스펜을 손에 들고 보고서를 고치기 시작했다. 제목부터 끝줄까지 단 한 줄도 고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내가 처음 만든 보고서는 온통 빨간색으로 사선이 그어져 있었으며, 그 옆에는 과장님이 손으로 직접 적은 글자들이 쓰여있었다. 그것도 빨간색으로. 나의 첫 번째 보고서는 그렇게 '피바다'가 되었다.


그 이후 나는 수시로 보고서를 작성했으며, 그때마다 내 보고서는 온통 빨간색으로 도배되었다. 수정하고 수정하고 수정한 후에야 총장님까지 결재가 될 수 있는 보고서 한 장이 만들어졌다. 그렇게 수 백장의 종이를 쓰레기로 만든 이후에야 수정 없이 과장님 마음에 드는 보고서 한 장을 가끔씩은 만들 수 있었다. 그래서 나 스스로는 이제 어느 정도 보고서를 작성하는 기획능력을 갖출 수 있게 되었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과장님이 바뀌면서 모든 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갔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 보고서가 종이 쓰레기로 바뀐 이유는 나의 실력 탓 만은 아닌 것 같다. 과장님들 탓도 큰 것 같다. 재무과에서 처음 함께 근무한 과장님은 윗 분들은 보고서를 오래 쳐다볼 수 있는 시간이 없기에, 짤막짤막한 문장을 위주로 사용하여 눈에 쉽게 들어오는 보고서가 잘 쓴 보고서라고 하면서 그렇게 작성하도록 했었다. 하지만 다음 과장님은 상황을 모르는 사람이 읽더라도 바로 이해할 수 있도록 말하는 것처럼 자세히 풀어서 나열을 해줘야 잘 쓴 보고서라고 했다. 두 명의 가르침이 너무 상충되기에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렇기에 내 보고서를 종이 쓰레기로 만든 건 나의 실력이 크게 모자라서가 아니라 그 보고서를 읽는 사람들의 스타일 차이가 더 크다고 생각한다.(당연이 뛰어나게 잘 써진 보고서라면 누가 봐도 좋다고 하겠지만 그 정도의 실력을 가진 직원은 손에 꼽을 정도이니 평균적인 실력을 기준으로 했을 때 이야기이다.)


이런 일도 있었다. 과장이 보고서를 보고 잘 썼다며, 그 보고서를 가지고 윗선에 보고를 하러 가셨다. 그리고 몇 분후 돌아와서는 보고서에 문제가 많다는 식으로 다시 작성하라고 지시했다. 몇 분 전 본인이 칭찬한 내용을 가지고 훈계를 하는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처음에는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직장생활 기간 중 이런 일은 너무나도 흔하게 일어나는 일이었다.


결국 잘 쓴 보고서란 기본적인 형태와 내용이 정말 부실하지 않는다면, 최종 결재권자 단 한 명의 마음에만 들면 잘 쓴 보고서인 것이다. 그 한 명의 마음에 들게 하는 보고서를 만들기 위해 수많은 쓰레기가 발생하고 직원의 소중한 시간을 자꾸 허비하게 한다. 문제는 여기서 잘 쓴 보고서라는 것이 내용보다도 형식에 치중되어 있는 보고서를 잘 쓴 보고서라고 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보고서란 어떠한 이슈에 대해 대응하고 처리하기 위하여 만드는 내부적인 문서이다. 업무 처리 과정이라는 목적에만 충실하면 되는데 자꾸만 형식에 매달리는 상사들이 많다. 일부 기업들은 이러한 보고서의 단점을 정확하게 파악하여, 형식 없이 메모지에 적어서 보고하더라도 내용만 정확하고 빠르게 파악할 수 있으면 된다는 마인드로 형식적인 절차를 최대한 생략하고 있다. 보고서를 '잘 만드는' 시간에 정확한 보고서를 만들고 빠르게 업무를 진행할 수 있도록 하여 아껴지는 시간을 최대한 진짜 업무에 활용한다.


하지만 대학에서는 아직도 보고서를 만드는데 소요되는 시간이 보고서에 적시된 내용과 관련된 업무를 하는 시간보다 더 오래 걸리기도 한다. 어떤 날은 보고서를 만든다는 자체가 주 업무처럼 보이기도 한다. 너무나도 비효율적인 업무 방식이다. 의미 없는 껍데기는 버려야 한다. 정확한 내용 정리와 빠른 업무 처리를 위한 과정으로만 접근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보고서는 예술 작품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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