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드라마 속에 나오는 ‘주인공’ 같은 삶을 살았다는 생각이 든 적은 과연 얼마나 있을까? 난 내 자신이, ‘드라마 속 주인공 같은’ 경험을 하고, 그런 삶을 살았다고 생각한다.
가난한 집안의 착하고 예의 바른, 아무리 힘든 일들이 닥쳐도 굳건히 이겨내며 열심히 살아가고, 결국엔 능력 있는 부잣집 남자와 사랑에 빠져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그런 신데렐라 같은 여주인공의 삶은 안타깝게도 아니다.
TV 속 드라마에서, 으리으리한 집에서 부를 누리며 살고있는 주인공 집에 어느 날 검은 정장을 차려입은 많은 남성들이 갑자기 집안에 들어와 TV며 장식장이며 돈이 될 만한 모든 물건들에 빨간딱지를 붙이는 장면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부유한 집안의 자녀인 주인공이, 한순간에 부를 잃고 가난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그런 삶.. 너무나 안타깝게도 나는 그러한 드라마 같은 경험을 했고, 그로 인해 180도 달라진 삶을 살아야 했다. 내 나이 10살, 너무나 어린 나이에 말이다.
내 나이 서른 중반에 다다른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장면이 있다. 내가 10살, 초등학생 3학년 이었을 당시, 우리 집에 들이닥친 많은 성인 남성들.. 그리고 우리 집 온 물건에 붙여진 빨간 종이들.. 아버지께서, 사업자금으로 돈을 빌려달라고 하시는 친구분에게 우리 집을 담보로 1996년 그 당시, 약 6억 원을 빌려주셨으나 친구분이 갚지 않으셨고, 그 일로 우리 집이 경매로 넘어갔던 모양이다. 그 당시 어렸던 나는, 자다가 깨어 눈을 비비며 어리둥절 해 했다. 도대체 무슨 일인지, 왜 모르는 사람들이 우리 집에 와서 그러는 건지, 도무지 영문을 몰랐다. 당시 해외에 친척들이 많이 거주하고 계셨기에, 우리 가족은 호주로의 이민을 계획하고 있었고, 어머니와 언니는 해외에 나가 있던 때였다. 그날 나는, 잠옷 같은 차림으로 키우던 강아지를 안고 근처에 살고 계시던 할머니 댁으로 울면서 걸어갔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그저 추억 속에 잠긴 으리으리했던 우리 집.. 그림으로 그리라면 상세하게 그릴 수 있을 정도로 내 머릿속엔 아직도 생생하기만 하다. 하지만 이제는 사라지고 없다. 오로지 내 기억 속에서만, 우리 가족들의 기억 속에서만 존재한다. 그래서 더욱 가슴이 아파 온다.
생각만으로도 눈가에 눈물이 맺힐 것만 같은, 그리운 우리 집. 내가 태어나고 자라온 그 동네는 서초동이었다. 지하도 있던 2층짜리 주택이였는데, 한 층이 50평 이상 이였던 것 같다. 아버지께서는 100평의 대지를 사서 집을 지으셨다. 1층과 지하에 각각 세 집으로 나뉘어 총 여섯 집을 세를 주며 부모님께서는 집 주인으로 사셨다. 나무와 예쁜 꽃들로 가득했던 마당.. 마당에 있던 모과나무에서 모과를 따던 일도 생각난다. 크고 멋진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푸르른 나무들과 예쁜 꽃이 가득 핀 마당이 보였다. 마당을 지나 오른쪽에 위치한 계단을 오르면, 우리가 살고 있던 2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 현관문이 나온다. 그 문을 열면 초록빛 대리석 계단이 펼쳐졌고, 2층으로 올라가 또다시 만나는 현관을 열고 들어서면, 하얀색 대리석이 깔린 넓은 거실이 눈에 들어왔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집 전체 평수가 그 당시의 거실만 했던 것처럼 넓게만 느껴진다. 당시 키우던 강아지가 거실을 몇 바퀴 뛸 때면 헥헥 거리며 운동장을 뛴 듯, 힘들어할 정도였다. 그렇게 너무나 감사하게도 부를 가지신 부모님에게서 태어나 부유한 어린시절을 보냈지만, 초등학교 3학년, 아직 어렸던 나는 너무나 참담한 현실을 마주해야 했다.
어린 나이에 경험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일을, 다른 사람들은 평생을 살면서 경험 해 보지 않을지도 모르는 일을, TV 속, 드라마에서만 보던 일을.. 험하고 참담한 세상을 너무 어린 나이에 경험한 나는, 서른 중반에 다다른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남편을 제외하고는 그 어느 누구에게도 이러한 사실을 상세히 털어놓지도 못한 채 가슴 속 깊은 곳에 꽁꽁 숨기며 살아왔다. 내 가슴 깊은 곳에 숨겨둔 상처 가득한 가슴아픈 이야기.. 그 이야기를, 이렇게 세상에 꺼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