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느끼는 불안의 정체는 무엇인가. 깊이 가라앉아있던 불안감은 연말이 다가올수록 점점 더 수면 위로 올라왔다.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과 먹고사는 문제, 모든 속박과 구속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은 소망, 나의 내적 성장에 대한 타는듯한 갈망. 매년 달라지고자 하는 삶을 살고 있지만 여전히 만족스럽지가 않다. 올해는 작년보다도 더 다른 삶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알랑 드 보통의 책 <불안>은 사회적 지위에 대한 불안의 정의, 원인, 해결책에 대해 친절하고 쉽게 쓰여 있었고 내가 느끼는 불안이 무엇인지 파악하는 데에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두 번을 정독한 후, 서평을 써보려고 했으나 내가 쓰고자 하는 글은 책 내용 위주의 글보다는 나만의 생각과 느낌을 적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한동안 쉬었다가 작년 봄부터 다시 시작했던 탱고는 연말 송년회를 끝으로 일단락이 되었다. 나름 즐겁고 유익하고 건강한 시간이었지만 내가 느끼는 나만의 불안감을 잠재우기에는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이 새해초 2주 동안 곰곰이 생각해보고 내린 결론이다. 내 몸의 건강을 유지하는 차원에서는 좋지만 나의 관심과 노력과 시간을 많이 투입해야 하는 단점이 있다. 탱고도 계속하려면 성장은 필수다. 성장하지 않으면 탱고도 또한 불안해진다. 불안해하지 않으려면 레슨도 계속 받고 연습도 꾸준히 해야 하고 시간을 많이 투자해야 한다. 탱고도 잘하고 다른 것도 잘하면 좋겠지만 그게 참 어렵다... 양립이 안될 것 같다.. 탱고에 시간을 쓰면 쓸수록 불안하다..
이것도 불안하고 저것도 불안하고. 어느 불안이 더 큰가. 작은 불안은 잠시 제껴두고 큰 불안을 먼저 잠재우는게 우선순위가 아닐까 싶다. 누구 때문이 아니다. 그냥 전부 나 때문이고 내 문제인거지.
내가 꿈꾸는 나의 모습과 현재의 나의 모습의 큰 괴리가 나를 불안하게 만든다. 이 불안을 줄이려면 내가 꿈을 향해 매진해서 나아가야 한다. 다른 잡다한 여러 분야의 관심과 활동을 줄여서 한쪽으로 몰입하지 않으면 나아갈 수가 없어. 인간의 몸은 소모품이고 수명이 있어서 사용 효율은 갈수록 떨어질 수밖에 없고 내가 집중해서 무언가에 고도로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은 길지가 않다. 앞으로 5년 정도 바짝 올인해서 하다 보면 뭔가가 만들어지지 않을까. 설사 원하는 결과가 안나오더라도 노력하는 과정에서 얻는 무언가가 반드시 있을 것이다. 시도를 하고 안하고의 차이는 크다. 그냥 어영부영 평범한 대중들처럼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가 않다.
아마도 마지막 스퍼트가 될지 모를 지금부터 향후 몇 년 간.더욱 나에게 집중하고 내가 원하는 삶을 살아봐야겠다. 후회 없는 삶을 향해 매일매일 묵묵히 걸어간다.
아래는 알랑 드 보통의 책 <불안>에서 원인에 대한 해법 중에서 제가 관심 있게 본 주요 문단들이니 참고로 봐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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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법
I 철학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 피상적이고 하찮다는 것, 그들의 사야가 편협하다는 것, 그들의 감정이 지질하다는 것, 그들의 의견이 빙퉁그러졌다는 것, 그들의 잘못이 수도 없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면 점차 그들의 머릿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관심을 갖지 않게 된다. 그러다 보면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많은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그들을 필요 이상으로 존중하는 것임을 알게 된다.
쇼펜하우어는 볼테르가 한 말을 인용한다. "세상에는 이야기를 나눌 가치도 없는 사람들이 들끓는다."
이렇게 인간성을 통찰력 있는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 유용하기는 하지만 한 가지 불리한 점은 이런 관점을 따를 경우 친구가 줄어든다는 것이다. 철학적 염세주의자였던 샹포르는 "도덕적이고 고결한 태도로 합리성과 진실한 마음을 갖추고, 관습이나, 허영이나, 격식 같은 상류사회의 소도구 없이 우리를 대하는 사람들만 만나겠다고 결심하는 순간, 그 대가로 우리는 결국 혼자서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
쇼펜하우어는 "이 세상에서는 외로움이냐 천박함이냐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사람은 다른 사람과 만날 일이 줄어들수록 더 낫게 살 수 있기 때문이다."
II 예술
예술이 무슨 쓸모가 있을까. 매슈 아널드에 따르면 위대한 예술은 구름 잡는 이야기이기는커녕, 삶의 가장 깊은 긴장과 불안에 해법을 제공하는 매체다. 예술이 아무리 비실용적으로 보일지 몰라도, 예술은 무엇보다도 존재의 부족한 부분을 해석하고 그 해법을 제시할 수 있다. 위대한 예술가의 작품을 보면, "인간의 잘못을 없애고, 인간의 혼돈을 정리하고, 인간의 곤궁을 줄이고자 하는 욕망"의 흔적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예술가들의 작품에는 현재의 상황에 대한 항의가 나타나기 마련이고, 이에 따라 우리의 시각을 교정하고, 아름다움을 인식하도록 교육하고, 고통을 이해하거나 감수성에 다시 불을 붙이도록 돕고, 감정이입 능력을 길러주고, 슬픔이나 웃음을 통하여 도덕적인 균형을 다시 잡아주려고 노력하기 마련이다. "예술은 삶의 비평이다."
이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우선 가장 분명한 점은 삶이 비평이 필요한 현상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늘 가짜 신들을 섬기고,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남의 행동을 오해하고, 비생산적인 불안과 욕망에 사로잡히고, 허영과 오류에 빠질 위험에 처해 있다는 것이다. 소설, 시, 희곡, 회화, 영화 등 예술 작품은 은근히 또 재미있게, 익살을 부리기도 하고 근엄한 표정을 짓기도 하면서, 우리에게 우리의 조건을 설명해 주는 매체 역할을 한다. 예술작품은 세상을 더 진실하게, 더 현명하게, 더 똑똑하게 이해하는 방법을 안내해 준다.
우리가 지위와 그 분배에 접근하는 방법만큼 비평(또는 통찰과 분석)이 필요한 것도 없을 것이다. 예술의 역사는 지위의 체계에 대한 도전, 풍자나 분노가 서려있기도 하고, 서정적이거나 슬프거나 재미있기도 한 도전으로 가득하다.
소설가는 사회에서 사람들을 바라보는 표준 렌즈, 즉 부와 권력을 크게 확대해 보여주는 렌즈를 인격의 특질을 확대해 보여주는 도덕적 렌즈로 바꾼다.
그림 역시 누가 또 무엇이 중요한가 하는 문제에 대한 세상의 정상적인 이해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비극
나의 실패를 다른 사람들이 차가운 눈길로 바라보며 가혹하게 해석한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않는다면 일에서 실패를 크게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비극은 위대한 실패의 이야기에 집중하면서 조롱이나 심판은 삼간 특별한 예술 형식이다. 이 형식의 장점은 파국을 맞이한 사람들-불명예스러운 정치가, 살인자, 파산자, 감정적으로 강박감에 사로잡힌 사람-의 행동의 책임을 면제해주지는 않으면서도 그들에게 어떤 수준의 공감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사실 모든 인간이 마땅히 이런 공감을 받아야 하지만, 실제로 받는 일을 드물다.
비극은 죄지은 자와 죄가 없어 보이는 자 사이에 다리를 놓으려는 시도이며, 책임에 대한 통념에 도전하고, 인간이 수치를 당한다 해도 자신의 이야기를 할 권리까지 상실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존중하면서 그 사실을 심리학적으로 세련되게 표현해 낸다.
비극 작가들은 저항할 수 없는 진실로 우리를 이끈다. 역사상 인간이 저지른 모든 어리석은 일은 우리 자신의 본성의 여러 측면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우리 자신의 내부에도 최악의 측면과 최선의 측면을 아울러 인간 조건 전체가 담겨 있으며, 따라서 적당한, 아니 엉뚱한 상황이 닥치면 우리 역시 무슨 짓이든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이다. 관객은 이러한 진실에 가까이 다가서면 기꺼이 높은 말에서 내릴 것이고, 공감이 커지면서 마음이 겸손해지는 것을 느낄 것이다. 자신의 성격상 약점이 다행히도 지금까지는 아무런 심각한 사고를 일으키지 않았지만, 언젠가 어떤 상황과 마주쳐 무제한의 재앙을 불러일으키는 위력을 발휘하면 자신의 삶도 쉽게 박살 나, '어머니와 동침으로 눈이 멀었다'라는 신문기사 때문에 고통받는 불행한 인물과 마찬가지로 수치스럽고 비참한 상황에 처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귀스타프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
플로베르에게 예술은 조악한 도덕주의의 정반대 자리에 서 있는 것이다. 예술은 인간의 동기와 행동을 깊이 탐사하는 영역이고, 이 영역에서는 어떤 사람을 성자나 죄인으로 해석하려는 시도를 조롱했다. 우리는 플로베르의 소설을 덮으면서 우리가 사는 방법을 배우기도 전에 살아야만 했다는 사실에 대해,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이해가 대단히 제한적이라는 사실에 대해, 우리 행동이 엄청난 파멸을 불러올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 우리 잘못에 대한 공동체의 반응이 무자비하다는 사실에 대해 두려움과 슬픔을 느끼게 된다.
소설의 독자나 비극의 관객으로서 우리는 '쇼핑 중독자인 간통녀 비소를 삼키다'라는 머리기사의 정신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비극은 실패나 패배에 대한 단순화된 관점을 버리게 하고, 우리 본성의 풍토병과 같은 우둔과 일탈을 너그러운 눈으로 바라보게 한다.
사람들이 비극 예술에 담긴 교훈을 받아들인 세계에서는 실패의 결과가 우리를 그렇게 심하게 짓누르지 않을 것이다.
희극
농담은 비판의 한 방법이다. 이것은 오만, 잔혹, 허세에 대하여, 미덕과 양식으로부터 이탈한 것에 대하여 불평을 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유머는 불만을 제기하는 데 특별히 효과적인 방법이다. 겉으로는 즐거움만 주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은근히 교훈을 전달하기 때문이다. 농담은 겉으로는 해가 없어 보이기 때문에 위험하거나 직접 말하기 어려운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 프로이트는 농담을 통하여 위험한 메시지가 "농담의 형태가 아니라면 결코 듣지 않을 사람의 귀에도 들어가게 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유머는 높은 지위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공격하는 데 유용한 도구일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의 지위에 대한 불안을 이해하고 조절하는 데도 도움을 준다.
만화가들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마주치면 당황하거나 창피해할 수 있는 상황이나 감정에서 웃음을 끌어낸다. 그들은 환한 대낮에는 차마 살펴볼 수 없는 약한 부분을 짚어낸다. 또 우리가 혼자만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아주 어색한 측면들을 드러낸다. 걱정이 은밀하고 강렬할수록 웃음의 가능성도 커지며, 이때 웃음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꼬챙이에 꿰어내는 솜씨에 바치는 찬사가 된다.
따라서 많은 유머가 지위에 대한 불안에 이름을 붙이고, 그럼으로써 억제하려는 시도라는 것도 놀랄 일은 아니다. 우리는 그런 유머를 보고 들으면서 세상에는 나만큼이나 질투심 많고 사회적으로 허약한 사람들이 많으는 것을 확인하고, 나처럼 돈 문제 때문에 고민하며 잠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나처럼 멀쩡한 표정을 짓지만 속으로는 약간 맛이 간 상태인 사람들일 많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안심한다. 또 나처럼 고통받는 이웃들에게 손을 내밀고 싶은 마음도 생긴다.
따라서 만화도 다른 예술과 함께 매슈 아널드가 말하는 예술의 정의, 즉 삶의 비평이라는 정의를 공유하고 있다. 만화도 비극과 마찬가지로 가장 안타까운 인간 조건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만화가들의 밑바닥에 깔린 무의식적 목표는 유머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그런 식으로 조롱할 일이 조금이라도 줄어드는 세상을 만들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III 정치
이상적인 인간형
사회마다 각기 특정한 종류의 사람을 높이 평가한다. 또 기술, 억양, 기질, 성별,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어떤 사람들은 단죄하거니 무시한다. 그러나 이런 규정은 영원한 것도 아니고 보편적인 것도 아니다. 어떤 곳에서는 높은 지위를 얻을 수 있는 기술이나 자질이 다른 곳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거나 경멸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역사의 몇 층을 파고 들어가 보면 여러 시대 여러 사회에서 어떤 사람을 명예로운 사람으로 간주했는지 그 다채로운 양상이 드러난다.
지위를 분배하는 원칙은 무엇인가? 왜 어떤 사회에서는 군인이 찬사를 받고, 다른 사회에서는 토지를 소유한 신사가 찬사를 받는가? 다른 사람들에게 필요한 일을 해주지 못하는 집단은 지위를 잃게 된다.
높은 지위를 결정하는 요인들이 계속 바뀌면서, 자연스럽게 지위에 대한 불안을 촉발하는 요인들도 바뀌어간다.
자신이 사는 사회의 이상 때문에 불안이나 실망을 느낀 사람이라면 이렇게 대충 살펴본 지위의 역사에서도 기본적이고 중요한 사실을 간파할 것이다. 그런 이상이 돌로 만들어져 굳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상적인 지위는 오래전부터 계속 바뀌어왔고 앞으로도 계속 바뀔 수밖에 없다. 이런 변화 과정을 묘사하는 데 정치라는 말을 사용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현대의 지위 불안에 대한 정치적 관점
현대 서양에서 사람들을 판단하고 지위를 분배하는 기준이 되는 지배적인 이상은 무엇일까?
과학적인 분석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과거의 전사, 성자, 기사, 토지를 소유한 귀족 신사가 한때 누렸던 높은 지위를 상속한 현대의 성공적 인물의 관심이나 자질 몇 가지는 제시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높은 지위를 얻을 수 있는 자격
2005년 런던, 뉴욕, 로스앤젤레스, 시드니
성공한 사람이란 인종과 성별을 막론하고, 상업적 세계의 무수한 분야(스포츠, 예술, 과학 연구를 포함하여)의 어느 한 곳에서 자신의 활동(물려받은 유산이 아니라)을 통해서 돈, 권력, 명성을 축적한 사람을 가리킨다. 이들 사회에 기반은 '능력주의'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경제적 성취는 그럴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 거둔 것이라고 이해한다. 부를 축적한 사람은 일단 주요한 미덕이 적어도 네 가지는 있다고 칭송을 받는다. 그 네 가지란 창의성, 용기, 지능, 체력이다. 다른 미덕, 예컨대 겸손이나 경건은 이제 눈길을 끌지 못한다.
이런 이상이 아무리 자연스럽게 보인다 해도, 정치적 시각이 우리에게 일깨워주듯이, 이것은 단지 인간이 만든 것일 뿐이다. 실제로 이 이상은 그리 머지않은 18세기 중반에 여러 가지 확인 가능한 요인들에 의해 생겨났다. 나아가서 정치적 시각에 따르면, 이런 이상은 가끔 순진하기도 하며, 때로는 불공평하기도 하다. 물론 바꾸는 것이 불가능하지도 않다.
스미스의 시대 이후로 경제학자들은 궁핍한 상태를 규정하고 그것을 속상한 일로 만드는 것은 직접적인 신체적 고통이라기보다는 그 상태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부정적 반응에서 나오는 수치감, 즉 가난 때문에 스미스가 말하는 "기존의 품위 유지 규칙"을 지키지 못하는 데서 나오는 수치감이라는 데 거의 만장일치로 동의하고 있다. 사람들은 자신의 소득이 생존에는 모자라지 않는다 해도 공동체의 소득에 비해 현저하게 뒤쳐지면 언제나 가난에 시달리게 된다.
존 러스킨에 따르면 부자가 되는 사람이나 빈자가 되는 사람이나 딱히 범주를 정할 수 없는 다양한 사람들이라는 것, 소득과 명예가 비례하는 것은 아니라는 메시지이다. 수많은 외적 사건과 내적인 특징이 어떤 사람은 부유하게 만들고 다른 사람은 가난하게 만든다. 운과 환경도 있고, 병과 공포도 있고, 우녕과 뒤늦은 발달도 있고 적절한 시운과 불행도 있다.
미셸 드 몽테뉴는 삶의 결과들을 결정하는 우연적 요인의 역할을 강조했다. 그는 "변덕스러운 의지에 따라 우리에게 영광을 베푸는 우연"의 역할을 잊지 말라고 충고했다.
장-자크-루소는 세계의 역사가 야만에서 출발해서 유럽의 훌륭한 작업장과 도시로 진보해 왔다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소박하게 살기는 했지만 우리의 요구를 정확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던 특권적 상태로부터 우리 자신의 인격과는 거의 관련이 없는 생활 방식들에 선망을 느끼는 상태로 퇴보해 왔다고 말한다.
만족스러운 삶의 핵심적인 특징은 가족을 사랑하고 자연을 존중하고, 우주의 아름다움에 경외감을 느끼고, 다른 사람들에게 호기심을 품고, 음악과 소박한 오락을 즐기는 것이 그런 특징이었다. 그러나 근대의 상업적 "문명"은 우리를 이런 상태로부터 떼어냈으며, 우리는 풍요의 세계에서 선망과 갈망에 사로잡혀 고콩을 겪게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것을 이루고 소유하면 지속적인 만족이 보장될 것이라고 믿고 싶어 한다. 행복의 가파른 절벽을 다 기어 올라가면 넓고 높은 고원에서 계속 살게 될 것이라고 상상하고 싶어 한다. 정상에 오르면 곧 불안과 욕망이 뒤엉키는 새로운 저지대로 다시 내려가야 한다고 말해주는 사람은 드물다.
인생은 하나의 불안을 다른 불안으로 대체하고,, 하나의 욕망을 다른 욕망으로 대체하는 과정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불안을 극복하거나 욕망을 채우려고 노력하지 말아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노력은 하더라도 우리의 목표들이 약속하는 수준의 불안 해소와 평안에 이를 수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선망을 멈추지 못한다면, 엉뚱한 것을 선망하느라 우리 삶의 얼마나 많은 시간을 소비할 것인가.
지위와 관련된 근대의 이상에 대한 공격의 핵심은 이것이 우선순위를 엄청나게 왜곡하여, 물질적 축적 과정을 가장 높은 수준의 성취로 치켜세웠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자아상을 진실되고 폭넓게 규정한다면, 물질적 축적은 우리 삶의 방향을 규정하는 여러 가지 가운데 하나에 불과할 뿐이다.
존 러스킨은 친절, 호기심, 감수성, 겸손, 경건, 지성-그는 이런 일군의 특징을 단순하게 "삶"이라고 불렀다-에서 부유해지기를 바랐다. 그는 <이 최후의 사람에게>에서 부에 대한 일반적인 금전적 관점을 버리고 "삶"에 기초한 관점을 채택하라고 호소했다. 이에 따르면 이 세상에서 부유한 사람은 상인이나 지주가 아니라, 밤에 별 밑에서 강렬한 경이감을 맛보거나 다른 사람의 고통을 해석하고 덜어줄 수 있는 사람이다. 러스킨은 말한다. "삶, 즉 사랑의 힘, 기쁨의 힘, 감탄의 힘을 모두 포함하는 삶 외에 다른 부는 없다. 자신의 삶의 기능들을 최대한 완벽하게 다듬어 자신의 삶에, 나아가 자신의 소유를 통해서 다른 사람들의 삶에도 도움이 되는 영향력을 가장 광범위하게 발휘하는 그런 사람이 가장 부유하다."
정치적 변화
사회적 위계 때문에 아무리 기분이 상하거나 난처해지더라도 우리는 그런 위계가 너무 뿌리가 깊고 너무 견고하게 자리를 잡아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며, 그 위계를 지탱하는 공동체나 신념들을 바꾸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한 마디로 이런 위계가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하여 체념을 하고 그냥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사회의 목소리 큰 사람들이 선험적 진리로 여기는 견해들이 사실은 상대적인 것이고 연구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 비로소 정치적 의식이 깨어난다. 그런 견해들은 자신만만하게 주창될 수도 있고, 나무나 하늘처럼 존재의 기본 구조에 속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은-어떤 정치적 관점에 따르면- 특정한 사람들이 특정한 현실적 또는 심리적 이해관계를 옹호하고자 만든 것이다.
이런 상대성을 받아들이기 어렵다면, 그것은 지배적인 믿음들이 자신은 태양의 궤도처럼 인간의 손으로 바꿀 수 없는 것이라고 공들여 주장해 왔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저 자명한 것을 이야기할 뿐이라고 주장한다. 키를 마르크스의 유용한 표현을 빌리자면, 그런 믿음들은 이데올로기다. 이데올로기적 진술이란 중립적으로 말하는 척하면서 교묘하게 어떤 편파적인 노선을 밀어붙이는 전술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조지 버나드 쇼는 <지적인 여자를 위한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안내>(런던, 1928)에서 이렇게 말했다. "어릴 때 우리 모두 가졌던 환상, 즉 우리가 살아가는 제도가 날씨처럼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환상을 머리에서 씻어내야 한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그것이 우리의 작은 세계 어디에나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이 늘 존재해 왔고 또 늘 존재해야 한다고 당연하게 생각한다. 이것은 위험하고 잘못된 생각이다. 이런 제도는 사실 일시적으로 임시변통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것이다. 실제로 아무도 가능하다고 믿지 않았던 변화가 몇 세대 만에 일어나곤 한다.
관념이나 제도가 "자연스럽다"라고 생각할 때는 고통의 책임을 아무에게도 묻지 못하거나 고통을 겪은 당사자에게 묻게 된다. 그러나 정치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우리가 아니라 관념이 문제일지도 모른다고 상상하게 된다. 제도, 관념, 법은 어리석고 편파적이라는 인식에서 나오는 질문이다.
사회의 어디에나 존재하는 진술과 이미지에서는 메시지들이 쏟아져 나오며, 이것은 생각보다 쉽게 우리에게 스며든다. 정치적 관점에 추구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이데올로기에 대한 애다. 분석을 통하여 이데올로기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님을 밝혀 그 뇌관을 제거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 어리둥절한 채 우울한 표정으로 대응하던 태도를 버리고, 눈을 똑똑히 뜨고 그 원인과 결과를 계보학적으로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연구를 해보면 지위와 관련된 근대의 이상 역시 자연스럽지도 않고 신이 주신 것처럼 보이지도 않게 된다. 그것은 18세기 후반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 생산과 정치 조직의 변화에서 생겨난 것이며, 그 이후 유럽과 북미로 퍼져나갔다. 신문과 텔레비전에 주입되어 있는 물질주의, 기업가 정신, 능력주의에 대한 열망은 체제의 키를 쥐고 있는 사람들의 이해관계를 반영한다. ("모든 시대의 지배적 관념은 늘 지배계급의 관념이다") 그리고 다수는 이 체제에 의해 생계를 유지한다.
이렇게 이해한다고 해서 지위와 관련된 이상 때문에 생기는 불편이 기적적으로 사라지지는 않는다. 정치적 어려움을 이해하는 것은 기후 위성으로 기상 상태의 위기를 파악하는 것과 같다. 그것이 늘 문제를 막아주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거기에 접근하는 최선의 방법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유용한 것을 가르쳐준다. 그 결과 피해의식, 수동적 태도, 혼란은 현저하게 줄어든다. 이해는 사회의 이상들을 바꾸거나 그것과 씨름해 보는 첫 단계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이것만으로도 죽마를 신고 다니는 사람들을 아무런 호의 없이 무조건 숭배하고 존경하는 경향이 조금이라도 줄어든 세계를 만드는 데 어느 정도는 도움이 될 것이다.
IV 기독교
죽음
톨스토이의 중편 <이반 일리치의 죽음>(1886)
이반은 중병을 살 날이 몇 주 안 남은 상태에서 자신이 지상에서 얻은 시간을 낭비했고, 겉으로는 품위가 있지만 속으로는 황폐한 삶을 살았음을 인식한다. 그는 자신의 성장, 교육, 일을 돌이켜보며, 다른 사람들 눈에 중요해 보이고자 하는 욕망 때문에 그 모든 일을 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는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려고 자신의 이익과 감수성을 희생해 왔는데, 이제야 그들은 자신에게 전혀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어느 날 새벽 이반은 통증에 시달리다가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좋다고 생각하는 곳에 저항하고 싶다는 어렴풋한 충동, 늘 억눌려왔던 그 모호한 충동이 어쩌면 정말로 중요한 것이며, 나머지는 모두 진짜가 아니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공적 의무, 생활 방식, 가족, 사교계와 자신의 분야에 속한 사람들이 고수하는 가치, 이 모든 것이 진짜가 아닌지도 몰랐다."
이반 일리치가 가장 괴로웠던 것은 아무도 그에게 그가 바라는 동정을 주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오랜 고통 끝에 이제 병든 아이처럼 동정을 받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인정하기는 부끄러웠지만) 순간들이 있었다. 어린아이를 위로하고 달래듯이 누가 안아주고, 입 맞추어주고, 울어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는 턱수염이 허연 중요한 관리였기 때문에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럼에도 갈망하는 마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지금 내가 추구하는 것은 사회적 지위가 아닌 삶을 바라보는 지혜에 대한 깊은 호기심이다. '왜'에 대한 갈망. 이 '왜'에 대한 이해는 일반 대중들또는 나와 비슷한 사람들과의 만남에서보다는 책에서 얻을 것이 많다고 생각된다. (Loche 생각)
지위에 대한 지나친 관심에서 다른 데로 방향을 트는 데 죽을병이 어떻게 도움을 줄까?
무엇보다도 사회가 우리를 존중하던 여러 가지 이유를 빼앗아간다. 예를 들어 저녁 파티를 열고, 능률적으로 일을 하고, 후원을 할 능력이 우리에게서 사라진다. 이런 과정에서 죽음은 지위를 통해 우리가 얻으려고 하던 관심의 덧없음, 나아가 무가치함을 드러낸다. 우리의 건강이 좋고 권력도 막강할 때는 우리를 칭찬하는 사람이 진짜 애정 때문에 그러는지 아니면 어떤 이익을 노리고 그러는지 굳이 알고 싶지 않다. "나 때문인가 아니면 나의 사회적 지위 때문인가?"하고 물어볼 용기 또는 냉소적 태도는 보여주기 힘들다. 그러나 병은 세속적 사랑의 조건을 제거하여 그런 구별이 잔인할 정도로 분명하게 눈앞에 나타난다.
죽음에 대한 생각의 가장 큰 효과는 아마 나일 강변에서 술을 마시든, 책을 쓰든, 돈을 벌든, 우리가 당장 일어나고 있는 일로부터 가장 중요한 일로 시선을 돌리게 해 준다는 것이다. 어차피 다른 사람들이 우리 대신 죽어주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우리 자신의 소멸을 생각하다 보면 우리가 마음속으로 귀중하게 여기는 생활 방식을 향해 눈길을 돌리게 된다.
죽음에 대한 생각은 잘 이용하면 성공을 위해 근본적인 일을 계속 미루며 살아가는 태도를 고치는 데 도움을 줄 수도 있다. 우리는 죽음에 대한 생각에서 용기를 얻어 사회의 기대 가운데 정당성이 없는 것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해골 앞에서는 다른 사람들의 억압적인 의견도 위압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우리의 불안의 많은 부분이 우리의 기획과 관심의 중요성을 과장하는 데서 나오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이상 때문에 괴로워하며,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의 중요성을 너무 크게 생각하기 때문에 괴로워한다.
지위에 대한 우리의 하찮은 걱정을 천년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은 우리 자신의 미미함을 바라보며 마음의 평정을 얻을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가 된다.
광대한 공간에서 시간을 보내다 보면, 사회적 위계 내에서 우리가 하찮다는 느낌은 모든 인간이 우주 안에서 하찮다는 느낌 안에 포섭되면서 마음에 위로를 얻게 된다. 우리 자신이 중요한 존재가 아니라는 느낌은 우리 자신을 더 중요한 존재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인식함으로써 극복할 수 있다. 자신이 하찮은 존재라는 생각 때문에 느끼는 불안의 좋은 치유책은 세계의 거대한 공간을 여행하는-실제로 또는 예술작품을 통하여-것일 수도 있다.
공동체
현대 세속 사회에서 영향력 있는 한 입장에 따르면 '다른 모든 사람처럼' 끝나고 마는 것보다 더 창피한 운명은 없다.' 다른 모든 사람'이란 평범하고 순응적인 사람들, 따분한 교외 거주자들을 포괄하는 범주이기 때문이다. 올바른 생각을 하는 모든 사람의 목표는 군중으로부터 자신을 떼어내, 자신의 재능이 허락하는 어떤 방법으로든 '튀는'것이다.
우리가 공유하는 약점을 인정하면 우리는 서로 붙들고 묶일 수 있다. 우리의 약점에는 늘 두 가지 요소가 있다. 공포와 사랑에 대한 욕망이다.
예수는 동료애를 장려하기 위해 어린아이를 보듯이 어른을 보라고 촉구했다.
사회적인 명성을 얻고자 하는 욕망은 평범해지는 것에 대한 공포감 때문에 더 커지기 때문이다. 평범한 삶이 모욕적이고, 천박하고, 초라하고, 추하다고 생각할수록, 그 삶으로부터 멀어지고자 하는 욕망도 강해진다. 공동체가 부패할수록, 개인적 성취의 유혹도 강해진다.
공동체에서 제공하는 주택, 운송, 교육, 보건의 수준이 낮으면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집잔에 소속되는 것을 피해 단단한 벽 뒤에서 살게 된다. 평범하다는 것이 존엄과 안락에 대한 중간적인 요구도 충족시키지 못하는 삶을 영위한다는 의미일 때는 높은 지위에 대한 욕망이 강렬해질 수밖에 없다.
모든 인간이 귀중하다는 인식을 회복할 수 있을 때, 아니, 그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그런 인식을 유지할 수 있는 공간과 태도를 조성할 수 있을 때, 사람들은 평범한 삶을 어둡게 보지 않는다. 그럴 때 단단한 벽 뒤에 고립된 채 혼자 의기양양하게 살아가고 싶은 욕구는 악화될 것이며, 이것은 심리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유익이 된다. 이것이 공동체의 윤리에 적용할 수 있는 기독교적 통찰이다.
V 보헤미아
19세기 초 서구와 미국에서 새로운 집단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그들은 소박하게 옷을 입고, 도시의 싼 지역에 살았고, 책을 많이 읽었고, 돈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였고, 다수는 우울한 기질이었고, 사업이나 물질적 성공보다는 예술과 감정에 충실했고, 가끔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성생활을 하기도 했고, 여자들은 단발이 유행하기 오래전에 단발을 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이들을 '보헤미안'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품위라는 부르주아적 개념에 들어맞지 않는 광범위한 사람들과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보헤미아는 어디에나 있을 수 있다. 그것은 장소가 아니라 마음의 태도다.
보헤미안들에게 중요했던 것은 세상을 예민하게 받아들일 수 있느냐, 감정의 주요한 저장소인 예술에 관람자나 창조자로서 헌신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보헤미안의 가치 체계에서 순교자적 인물은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음악을 만들기 위해, 또는 여행이나 친구와 가족에게 헌신하기 위해 안정된 정규 직장과 사회의 존경을 희생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이런 헌신 때문에 외적인 품위의 표시는 부족할지 몰라도, 보헤미안들의 세계에서는 최고의 명예를 누릴 자격이 있었다. 그들의 윤리적 양식과 감수성과 표현 능력 때문이었다.
돈과 실용적인 직업이 영혼을 부패시킬 수 있다는, 또는 스탕달의 말을 빌리자면 "부드러운 감각"을 향유하는 능력. 외적으로는 평범하지만 내적으로는 풍요로운 삶을 사는 것. 돈이 없다는 것은 어떤 사람이 자신의 에너지를 사업 말고 다른 활동에 쏟는 쪽을 택했고, 그 과정에서 현금이 아닌 다른 것에서 부유해졌다는 뜻일 수도 있다.
주류 문화와 갈등하면서도 자신 있게 살아가려면 우리의 직접적인 환경에서 작동하는 가치 체계, 우리가 사교적으로 어울리는 사람들, 우리가 읽고 듣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보헤미안들의 통찰이다.
그래서 보헤미안들은 함께 시간을 보낼 사람을 고르는 데 특히 주의를 기울였다.
우리는 점점 더 높이 올라가 군중으로부터 고립된다. 그 높은 고도에서 우리는 마침내 고독의 순수한 공기를 숨 쉰다. 우리는 전설의 황금 컵으로 망각을 마셨다. 우리는 시와 사랑에 취했다.
어떤 사람이 이해받지 못하는 것은 이해할 것이 많다는 뜻이다.
지위에 대한 불안의 성숙한 해결책은 우리가 다양한 사람들로부터 지위를 인정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데서 시작한다. 산업가로부터 인정받을 수도 있고 보헤미안으로부터 인정받을 수도 있으며, 가족으로부터 인정받을 수도 있고 철학자로부터 인정받을 수도 있다. 누구로부터 인정받기를 원하느냐 하는 것은 우리의 의지에 따른 자유로운 선택이다.
지위에 대한 불안이 아무리 불쾌하다 해도 그 불안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좋은 인생을 상상하기는 어렵다. 지위에 대한 불안은 성공적인 삶과 성공적이지 못한 삶 사아의 공적인 차이를 인정할 경우 치를 수밖에 없는 대가다.
그러나 지위에 대한 요구는 불변이라 해도, 어디에서 그 요구를 채울지는 여전히 선택할 수 있다. 창피를 당할 걱정을 하게 되는 것은 어떤 집단의 판단 방식을 우리가 이해하고 존중하기 때문이다. 지위에 대한 불안은 결국 우리가 따르는 가치와 관련이 되는 경우에만 문제가 된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어떤 가치를 따르는 것은 두려움을 느껴 나도 모르게 복종을 하기 때문이다. 마취를 당해 그 가치가 자연스럽다고, 어쩌면 신이 주신 것인지도 모른다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 주위의 사람들이 거기에 노예처럼 얽매여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상상력이 너무 조심스러워 대안을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철학, 예술, 정치, 기독교, 보헤미아는 지위의 위계를 없애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다수의 가치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가치, 다수의 가치를 비판하는 새로운 가치에 기초하여 새로운 위계를 세우려 했다. 이 다섯 집단은 성공과 실패, 선과 악, 수치와 명예의 구분 자체는 유지하면서, 무엇이 각 항목에 속해야 하는지를 재규정하려 했다.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이들은 각 세대마다 높은 지위에 대한 지배적인 관념들을 충실하게 따르지 못하는 사람들이나 따르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 그럼에도 패자나 이름 없는 사람이라는 잔인한 규정과는 다른 규정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 정당성을 얻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들 덕분에 우리는 삶에서 성공을 거두는 데는 하나 이상의 길, 판사나 약사의 길과는 다른 길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위로와 확신을 얻을 수 있다.
알랑은 <불안>에서 사회적 지위에 따른 불안만을 다뤘습니다. 인간이 처한 실존적인 조건에 의해 발생하는 불안, 뇌신경이나 호르몬에 문제가 있어 발생하는 불안, 트라우마로 다가오는 개인적인 체험이나 사건으로 인해 발생하는 불안 등은 책에서 다루지 않고 있습니다.(알랭 드 보통의 <불안> 서평, by 이슬빛 브런치매거진 일부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