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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은성 Aug 09. 2021

여름휴가 어디로 가세요?

7월의 마지막 3일을 20년째 여름휴가로 쓰고 있다. 날짜 선택권이 주어지지 않았을 때부터의 습관인 건지 선택권이 주어진 지금도 여전히 그 3일을 주말과 붙여 여름휴가로 삼고 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때의 습관이 ’ 굳어졌다 ‘라는 피동형 보다는 ’굳혔다‘라는 능동형이 맞는 표현이겠다. 휴가를 즐기는 여러 가지 방법 중에 내게 가장 최상의 형태를 발견한 이후부터는 날짜가 의미 없어졌기 때문이다. ’5일 동안 도서관에 콕 처박혀서 책만 읽기‘를 하고 싶은데 그건 어차피 혼자 하는 일이라 누군가와 휴가 날짜를 맞출 필요도 없고 어딘가 예약을 해야 하는 것도 아니어서 날짜를 고른다는 것이 무의미하다. 덕분에 휴가 날짜를 선택해야 하는 번거로움도 없어졌고 뭘 하며 즐겁게 보낼지에 대한 행복하면서도 귀찮은 휴가 계획으로부터도 해방되었다. 삶이 조금 더 심플해졌다.     


하지만 내가 선택한 최상의 여름휴가는 언제나 바라는 만큼의 목표 달성을 한 적이 없다. 휴가 시작엔  이번엔 기필코 5일 동안 내내 혼자 도서관에서 칩거할 거라 욕심부리지만 꼭 하루 이틀은 놀러 갈 일이 생기곤 한다. 목표 달성에 뜻을 두면 놀러 가자는 제안을 단호하게 물리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휴간데 좀 말랑말랑한 재미도 있어야 하지 않나 싶어 흔쾌히 응하게 된다. 이번에도 휴가 이틀째 되는 날 팥빙수와 바닷가라는 두 가지 목적을 가지고 경주에 살짝 다녀오는 시간을 가졌다. 도서관을 못 가는 대신 한정원 작가의 <시와 산책>이라는 에세이를 챙겨 들고서.      


하얀 눈꽃 얼음에 팥이 수북이 쌓인 빙수를 야금야금 퍼 먹으면서 책장을 넘기는 신선놀음이 시작됐다. 가지고 온 책은 ’내가 겨울을 사랑하는 이유는 백 가지쯤 되는데..‘로 시작되었고 35도가 넘는 폭염에 읽기에 딱 어울리는 구석이 있었다. 에어컨 바람도 시원했고 팥빙수 덕에 입도 차가웠던 건 맞지만 겨울을 이야기하는 책이 뿜어내는 시리고 차가운 공기가 몸과 기분을 시원하게 감싸는 듯한 느낌이 좋았다. 무심코 집어 온 책인데 참 잘 골랐다 스스로 칭찬을 하며 책장을 넘기는데 <11월의 푸가>라는 소제목의 글에서 ‘나는 11월을 편애한다.‘라는 문장을 만났다. 이 짧은 세 단어의 문장에 마음이 녹아내렸다.


담백하고 유난스럽지 않으면서 반짝반짝 빛나는 ’11월‘과 ’편애‘라는 낯선 조합에 숨이 멈췄다. 나는 기껏해야 ’11월이 참 좋다‘ 정도 밖에는 생각이 나지 않는데, ’좋다‘와 ’편애한다‘는 그 섬세함의 차이가 확연하지 않은가. 밀란 쿤데라의 통찰이 담긴 문장을 열렬히 좋아하고 알랭 드 보통의 섬세하고 위트 있는 문장도 사랑하지만 거창한 의미를 담지 않은 심심함 속에 낯섦이 있는 이 문장도 참 매력 있다. 이런 문장 한둘을 더 만나면 그 책을 사랑하게 되고 그런 말을 쓰는 작가를 좋아하게 된다. 그렇게 한 명의 친구가 늘어가고 읽고 싶은 책이 한 권이 더 생긴다. 그리고 년 여름휴가를 도서관으로 갈 계획을 세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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