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런이 1호선을 타는 걸까? 아니면 1호선이 사람을 이상하게 만들까?
서울에 갓 올라온 초창기, 금전적인 압박과 직장 상사도 힘들었지만, 가장 힘든 것은 따로 있었다.
바로 넓디넓은 서울 땅에 자리 잡은 커다란 거미줄. 지하철이었다.
급행은 무어고, 까치산행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뿐만 아니라 인천행, 서동탄행, 신창행, 용산 급행…
그 시절 생각하곤 했다. ‘서울 사람들은 도대체 이걸 다 어떻게 알고 타는 걸까?’ ‘지도 앱이 없던 시절 서울 사람들은 이 미로를 대체 어떻게 뚫은 거지?’
특히나 심각한 길치인 나에게는, 무표정하게 핸드폰에 시선을 고정한 채 복잡한 그곳을 걸어 다니는 서울 사람들이 위대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 복잡한 거미줄 속에서도 가장 친숙하고 지독하게 얽힌 노선이 있다. 직장이 서울역이었던 탓에 매일 몸을 실었던 그 호선. 서울의 가장 낡고 오래된 거친 혈관. 바로 1호선이다.
처음 1호선을 타고 서울역으로 출근했던 날이 생각난다. 정장을 차려입고 집을 나서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아침부터 지하철을 타고 출근하는 부지런한 사람들이 이렇게 많았구나' 하고 K-직장인들은 참 대단하다 생각했다. 이 무리 가운데에 내가 섞여 있단 생각에 묘한 자부심도 들었다. (흔히 말하는 '직장인뽕'이다.)
하지만 그것도 한 달을 채 못 갔던 것 같다. ‘대체 이 많은 사람은 어디서 오는가.’ ‘내려야 하는데 이 아저씨는 대체 왜 안 비키는 걸까.’ ‘왜 임산부석에는 임산부보다 할머니들이 많이 앉아있을까?’
특히 겨울이 괴로웠다. 출근시간 지하철 안에는, 털 찐 강아지들마냥 저마다 두꺼운 패딩과 코트를 둘러 입은 사람들이 가득했다. 지각하지 않으려 어떻게든 몸을 욱여넣어 탔던 걸 생각하면 정말 힘들었다. 굳이 장점을 꼽자면 버티느라 코어가 튼튼해졌달까?
1호선과 정도 많이 들었지만 즐겁지 않은 기억도 가득했다. 1호선은 마치 야생 정글과도 같았다. 용산역 계단 한가운데 걸터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육두문자를 날리는 아저씨, 막걸리 냄새가 진동하는 등산객들. 촌놈에게는 생전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처음엔 익숙하지 않았지만 시간이 흐르자 점점 대수롭지 않게 여기게 되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이 빌런들을 귀엽게 만든 한 에피소드가 있다.
가장 충격적이었던 그날은, 유난히도 추웠던 2019년 겨울밤이었다.
막차 시간이 가까워진 휑한 플랫폼. 출구가 하나뿐인 역이었다. 지상에 있던 그 플랫폼에는 아무도 없어 보였다. 이어폰을 끼고 출구를 향해 걸었다.
걷다 보니 혼자인 줄 알았으나 시야 끝에 한 아주머니가 홀로 서 있었다. 별로 신경 쓰이진 않았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힐끗 쳐다보았다. 그런데 갑자기... 주섬주섬 치마 속으로 손을 넣으며 주저앉는 자세를 취하는 게 아닌가.
'???'
'에이, 설마... 설마… 여기 지하철역인데. 아니겠지.’ 재빨리 고개를 돌리고 눈을 질끈 감았다. '아니야, '아니야', '아닐 거야...' 속으로 빌기까지 했다. 상식 밖의 행동을 보면 고장 난 다고들 하지 않던가. 갑자기 머리가 새하얘지고, 현실을 부정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역시 하수였다. 나의 안일한 생각을 비웃듯, 귀에 낀 에어팟을 뚫고 적나라한 소리가 고요한 플랫폼을 울렸다.
"쏴아아-"
'으웩...' 눈을 더 세게 질끈 감고 광인 옆으로 발걸음을 재촉해 지나갔다. 마치 맹수를 피해 도망가는 초식동물 같았달까... 진짜 광기 앞에서 겸손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분이 술에 취한 건지, 어디가 아프신 건지 사정은 모르겠지만 나에게 평생 잊지 못할 끔찍한 경험을 선사해 주신 것만은 분명했다.
'왜 1호선엔 이런 이상한 사람들이 많은 걸까...?' 하고 생각하곤 했다.
그로부터 6년이 지났다. 이사를 2번이나 하고 이직도 했지만 나는 여전히 1호선 근방에 살고 있다. 어쩌면 1호선과 나는 떨어질 수 없는 사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이사한 집과 이직한 직장 사이 거리가 멀지 않았다. 도보로 30분 거리였기에,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했다. 덕분에 1호선을 전처럼 자주 타진 않았다. 하지만 가끔 약속 때문에 어쩔 수 없이 1호선을 타야 할 때가 있다. 늦은 겨울밤, 덜컹거리는 열차에 몸을 실을 때면 가끔 그날의 기괴한 장면이 떠오르곤 한다.
어느 날 늦은 저녁. 술 한 잔 걸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1호선을 타고 용산역을 지나 노량진으로 향하는 다리 위에서 한강 야경을 바라보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어쩌면 이상한 사람들이 1호선을 타는 게 아니라, 1호선에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어떤 오컬트적인 마력이 있는 게 아닐까?'
이런 생각이 들다니, 위 가설이 맞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