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너도 해봐
대학교 시절, 친구들에게 제주도 출신인 걸 밝히면 가장 많이 듣는 말은 “너희 집도 귤 농사짓니?”도 있었지만, 압도적으로 “제주도 사투리 한번 해봐”가 많았다. 처음엔 무슨 말을 해야 하나 난감했지만, 익숙해지자 서비스 차원으로 억양을 듬뿍 넣어 “혼저옵서예” 한 번 해주면 다들 좋아라 했다.
난 이게 대학 시절의 장난으로 끝날 줄 알았다. 사회로 나오면 없어질 줄 알았는데, 내 착각이었다.
입사 첫 주, 신입사원 환영 회식 자리였다. 삼겹살 불판이 달궈지고 소맥이 몇 바퀴 돌자 누군가 외쳤다. "아 맞다, 얘 제주도에서 왔다며? 야, 사투리 한번 해봐!"
사실 대학 신입생 때부터 귀에 딱지가 앉도록 당해온 일이라 익숙하긴 했다. 술자리마다 앵무새처럼 반복했던 내 개인기였으니까. 하지만 기분이 참 묘했다. 대학생들도 아니고, 양복 입고 넥타이 맨 다 큰 어른들이 모인 번듯한 직장 회식 자리에서도 똑같은 걸 시키다니.
순간 정적이 흐르고 사람들의 눈이 반짝거렸다. 친구들 앞에서 할 때는 장난으로 넘겼는데, 상급자들이 시켜서 하려니 속으로 묘한 불쾌감이 치밀었다. 마치 동물원의 원숭이가 재주를 부리길 기대하는 눈빛. 나는 분위기를 깰 수 없어 억지로 입을 떼곤 했다.
다행히도 그들은 어른답게 매번 시키진 않았고, 나는 그 신고식을 치른 뒤 회사 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해 가고 있었다.
당시 <SNL 코리아>에서 1980년대 서울 사투리(말끝마다 "~그든요", "~걸랑"을 붙이는 말투)를 사용하는 콩트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어느 회식 날, 마침 또 사투리 얘기가 나왔다. 내가 서울말을 많이 배웠니 어쩌니 하는 내 말투에 대한 품평회가 지루해지던 차였다. 나는 화제를 돌리고자 입을 열었다.
"근데 팀장님, 옛날에 서울 사투리도 있었다던데 아세요? 요즘 SNL 보니까 당시 서울 사람들도 특유의 억양이 있던데요."
재밌자고 한 얘기였으나, 반응은 싸늘했다. "에이, 서울말에 사투리가 어디 있냐. 그건 그냥 표준어지." 그중에서도 가장 크게, 정색하고 비웃은 사람은 본부장이었다.
"야, 너가 진짜 모르나 본데, 서울 사람은 사투리란 개념 자체가 없어. 태어나서 그런 말은 처음 들어본다 야!"
그는 진심으로 어이없어하며 비웃었다. 마치 표준어 수호자라도 되는 듯한 당당한 태도였다. 속으로 생각했다. '아니 요즘 SNL에서...' ‘유튜브 쇼츠만 봐도 나오는 게 서울 사투리 콩트인데…’ 계속 설명을 해보려 했지만, 아무도 촌놈의 말을 들을 생각이 없어 보여 포기했다.
술자리에서 혼자 욱해서 흥분한 것 같아, 식당 밖으로 나와 찬 바람을 쐬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열이 더 확 뻗쳤다. 내가 알기로 본부장의 고향은 강원도 원주였고, 대학도 강원도에서 나온 강원도 토박이였다.
피, 지도 잘 모르면서... 하지만 어쩌겠나. 내가 을(乙)인 것을. 그저 사회생활의 안녕을 위해, 나는 오늘도 꾹 참아야 했다.
머리를 식히고 다시 식당 문을 열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술 좀 더 먹고 한 번 물어볼까. 본부장님, 강원도는 진짜 버스 탈 때 감자로 결제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