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구구글방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도연 Apr 17. 2016

초코칩쿠키 군에게 이별을 고하며

18글자, 폴리글리세린축합리시놀데인산에스테르

 커피숍에서 아메리카노 한잔과 초콜릿 쿠키를 하나 시키고 자리를 잡았다. 구석탱이에 앉아 책을 한 장씩 넘길 때마다 쿠키의 옆구리를 베어 물었다. 역시 달다. 쌉싸래한 아메리카노 한 모금과 조화를 이루니 아껴 먹겠다는 각오는 온데 없이 금세 먹어 버리고 빈 봉지만 남았다. 하나 더 먹을까, 참을까, 봉지를 만지작 거리다 뒷면을 보게 됐다.


제품명: 초코칩 쿠키
내용량: 40g (190kcal)
원재료 및 함량: 소맥분(미국, 캐나다) 가공버터;호주[버터지방(우유), 코코넛유, 무지유 고형분], 백설탕, 준초콜릿 11.76%;싱가포르[설탕, 식물성유지(팜핵 경화유), 코코아분말, 대두레시틴, 폴리글리세린축합 리시놀데인산에스테르], 전란액(계란의 난황, 난백100%), 코코아 분말 3.45%[(코코아분말 100%) 터키], 아몬드분말, 베이킹 파우더[산도조절제, 전분] 정제소금



- 초콜릿이면 초콜릿이지 준초콜릿은 뭔가? 설탕과 팜유, 코코아분말, 폴리그리세린축합리시놀데인산에스테르를 섞어 만든, 초콜릿 맛이 나는 합성품 되시겠다. 폴리글리세린축합리시놀데인산에스테르.... 화공약품을 몇 가지나 섞었기에, 먹는 것과는 어울리지 않는 사이언스스러운 이름이 붙었나. 18자는 심했다. 십팔.


- 과자를 하나 만드는데, 미국-캐나다-싱가포르-호주-터키의 주민들이 출동했구나. 1,500원이라는 단가를 맞춰, 과자다운 맛을 내기 위해 전지구인을 소환했다. 특히 준초콜릿을 만들어, 초코칩 쿠키라는 이름을 달게 해 준 싱가포르인의 노력이 크다.


초코칩쿠키 군! 그냥 밀가루에 계란과 초콜릿만 넣어서 만들 수는 없었어?
누나 갑자기 왜 이래요?
너란 아이의 정체를 믿을 수가 없어!
누나... 삼천 원 낼 수 있어요?
.....십팔...(폴리글리...)


- 할 말 없다. 너를 삼천 원에 사 먹기엔, 누나는 너무 박봉이구나. 점심에 먹은 순두부 양도, 정체를 알 수 없기는 매한가지였겠지. 그러나 입안으로 들어간 이상 내 몸안을 돌아다니며, 일주일 후에는 세포로 태어나 심장을 뛰게 하고, 다리로 걷게 하고, 두뇌로 생각하게 할 것인데... 너무도 개념 없이 마구잡이로 밀어 넣었구나. 그래서 달콤한 것들에 이별을 고하고자 한다.


- 초코칩쿠키 군에게

너도 알다시피 나는 너를 사랑했다. 몹시도. 회사 책상에 초콜릿부터 봉지과자를 종류별로 쌓아놓고 일해야 안심이 되는 스타일이었지. 일이 꼬여 스트레스를 받을 땐 혀끝에 맴도는 단맛이 더 절실했어. 인정한다. 나는 너에게 중독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제 이만하자.

너는 나를 속였어. 너의 호적등본을 떼어보니, 국적도, 가족도, 니 행적도 불분명 하구나. 준초콜릿만 아니었어도.... 18글자의 글리세린만 아니었어도... 이리 이별을 쉽게 고하진 않았을 거야.

내 뱃살은... 내가 너를 사랑했던 증거니, 보아라, 한때는 너에 대한 마음이 이리도 진실했다.


봉지에 든 단맛들, 안녕!



사려깊은 구독자를 구합니다

출발선이니 손잡고 함께 가요!


글 | 김도연

그림 | 김도연

www.attic99.com


매거진의 이전글 하다 보면 가다 보면 살다 보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