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글자, 폴리글리세린축합리시놀데인산에스테르
커피숍에서 아메리카노 한잔과 초콜릿 쿠키를 하나 시키고 자리를 잡았다. 구석탱이에 앉아 책을 한 장씩 넘길 때마다 쿠키의 옆구리를 베어 물었다. 역시 달다. 쌉싸래한 아메리카노 한 모금과 조화를 이루니 아껴 먹겠다는 각오는 온데 없이 금세 먹어 버리고 빈 봉지만 남았다. 하나 더 먹을까, 참을까, 봉지를 만지작 거리다 뒷면을 보게 됐다.
제품명: 초코칩 쿠키
내용량: 40g (190kcal)
원재료 및 함량: 소맥분(미국, 캐나다) 가공버터;호주[버터지방(우유), 코코넛유, 무지유 고형분], 백설탕, 준초콜릿 11.76%;싱가포르[설탕, 식물성유지(팜핵 경화유), 코코아분말, 대두레시틴, 폴리글리세린축합 리시놀데인산에스테르], 전란액(계란의 난황, 난백100%), 코코아 분말 3.45%[(코코아분말 100%) 터키], 아몬드분말, 베이킹 파우더[산도조절제, 전분] 정제소금
- 초콜릿이면 초콜릿이지 준초콜릿은 뭔가? 설탕과 팜유, 코코아분말, 폴리그리세린축합리시놀데인산에스테르를 섞어 만든, 초콜릿 맛이 나는 합성품 되시겠다. 폴리글리세린축합리시놀데인산에스테르.... 화공약품을 몇 가지나 섞었기에, 먹는 것과는 어울리지 않는 사이언스스러운 이름이 붙었나. 18자는 심했다. 십팔.
- 과자를 하나 만드는데, 미국-캐나다-싱가포르-호주-터키의 주민들이 출동했구나. 1,500원이라는 단가를 맞춰, 과자다운 맛을 내기 위해 전지구인을 소환했다. 특히 준초콜릿을 만들어, 초코칩 쿠키라는 이름을 달게 해 준 싱가포르인의 노력이 크다.
초코칩쿠키 군! 그냥 밀가루에 계란과 초콜릿만 넣어서 만들 수는 없었어?
누나 갑자기 왜 이래요?
너란 아이의 정체를 믿을 수가 없어!
누나... 삼천 원 낼 수 있어요?
.....십팔...(폴리글리...)
- 할 말 없다. 너를 삼천 원에 사 먹기엔, 누나는 너무 박봉이구나. 점심에 먹은 순두부 양도, 정체를 알 수 없기는 매한가지였겠지. 그러나 입안으로 들어간 이상 내 몸안을 돌아다니며, 일주일 후에는 세포로 태어나 심장을 뛰게 하고, 다리로 걷게 하고, 두뇌로 생각하게 할 것인데... 너무도 개념 없이 마구잡이로 밀어 넣었구나. 그래서 달콤한 것들에 이별을 고하고자 한다.
- 초코칩쿠키 군에게
너도 알다시피 나는 너를 사랑했다. 몹시도. 회사 책상에 초콜릿부터 봉지과자를 종류별로 쌓아놓고 일해야 안심이 되는 스타일이었지. 일이 꼬여 스트레스를 받을 땐 혀끝에 맴도는 단맛이 더 절실했어. 인정한다. 나는 너에게 중독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제 이만하자.
너는 나를 속였어. 너의 호적등본을 떼어보니, 국적도, 가족도, 니 행적도 불분명 하구나. 준초콜릿만 아니었어도.... 18글자의 글리세린만 아니었어도... 이리 이별을 쉽게 고하진 않았을 거야.
내 뱃살은... 내가 너를 사랑했던 증거니, 보아라, 한때는 너에 대한 마음이 이리도 진실했다.
봉지에 든 단맛들,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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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도연
그림 | 김도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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