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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이스 Feb 01. 2019

자면서도 다 듣는 애인아

책 <자면서도 다 듣는 애인아> 김개미 시집, 문학동네, 2017년

불행을 통과하는 방법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개미'라는 필명을 쓰는 시인은 얼핏 보면 명랑한 말투로 과거를 얘기한다. 조잘대는 것 같기도 하고, 덤덤하게 읊조리는 것도 같기도 한 어두운 시절은 가만히 듣고 있으면 또 그러려니 하게 된다. 시인의 힘인지, 원래 지나간 과거의 속성이 그런 것인지.


흉곽을 뜯고 들어와 심장을 갈가리 찢어먹는 사랑스러운 파괴자 H, 당신의 소원대로 나는 미쳐가고 있어. 부디, 나의 불면이, 당신에게 위로가 되기를. 악마의 유전자를 가진 당신에게 이 시집을 바친다.


시집 맨 앞에 써놓은 시인의 말은, 아마 '자면서도 다 듣는 애인'에게 한 말이 아닐까 짐작해 본다. '악마의 유전자를 가진 당신' 은 누구이기에 이렇게 대놓고 하고 싶은 말을 퍼붓는 것일까. 의외로 시인의 유전자를 받은 자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순전히 단순 무지한 나의 상상이다.


시인이 '개미'가 된 것은, 어릴 때 친구들이 붙여준 개미라는 별명 때문이라고 한다. 말이 없고 조용한 친구를 아이들은 따돌리거나 무시하지 않고 개미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 별명이 좋아서 시를 쓰는 시인은 필명으로 삼았다고 한다. 개미보다 개미라고 불러준 친구들이 더 좋지 않았을까 싶다. 그래도 개미는 좀 그렇지 않나 싶지만, 시인이 성실한 개미처럼 수많은 글자들을 요리조리 배열해 불행을 명랑하게 만들고, 어두움을 덤덤하게 포장하는 건 아름다운 재주라 생각한다. 불운을 어둡고 비참하게 그리는 건 비상한 재주가 없어도 가능하지만, 담담하고 싱싱하게 얘기하는 건 보통 재능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시집의 거의 모든 시가 불행을 얘기하지만, 왠지 싱싱하게 느껴진다. 내가 좀 이상한 것일 수도 있다.

어쨌든 시인을 떠난 시는 읽는 사람의 마음속에서 낯선 이미지를 달고 떠돌아다니는 게 숙명이니, 시인의 불행은 그의 의도와 상관없이 내 주위에서 명랑 발랄하게 다시 태어났다.   



봉인된, 곳


.........

우리 둘이 함께 있으면 아무리 추워도 얼음이 들어오지 않아. 그러니 꽃이 필 때까지 자도록 하자. 우리는 불을 켜지 않았다. 눈을 뜨면 어떤 괴물이 기다리고 있을까. 우리는 누구의 두개골에 고인 백일몽일까. 봄이 올 때까지 문을 열지 않았다.



너보다 조금 먼저 일어나 앉아


.........

자면서도 다 듣는 애인아. 우린 썩은 이마를 맞대고 살아온 거야. 날개라고 알고 있었지만 등 뒤에서 나온 건 새싹이었어. 그러니까 우린 열매였던 거지. 더 썩을 일도 없이 썩은... 혹시 넌 곰팡이를 키우면서도 누군가를 기다리니? 나 아닌 누군가를?

........



평생


당신에게 저주를 퍼붓다 끝날 줄 알았어.


알코올이 당신에게 밤낮으로 기름을 부어 당신은 전쟁 없는 평화로운 고향에서도 처절한 난민이었어. 황폐한 당신이 초점 없는 눈으로 허공에 끌려다닐 때도 나는 당신을 동정하지 않았어.

.................



즐거운 청소

.................


언니 언니, 저기 좀 봐, 장롱 옆

얼룩이 꼭 시조새 같아

싫어 싫어, 거긴 싫어

이불 밑의 엄마는 하나도 안 궁금해

죽었으면 어쩌려고 자꾸 나보고 보래?

................



해맑은 웅덩이


녹슨 꼬챙이 두 개를 먹었습니다

찌그러진 깡통도 한 개 먹었고요

병뚜껑도 다섯 개 먹었습니다

...............


저기, 덤프트럭이 오는군요

순식간에 제가 납작해지겠군요

아니 잠깐 없어지겠군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괜찮습니다, 늘 있는 일입니다

잠시 죽었다가 깨어나면 그뿐

나는 피 흘릴 줄 모릅니다

아파할 줄 모릅니다



정오의 축복

.................


안다, 머리통은 열쇠 없는 자물통이라는 것

아무리 들쑤셔도 고통은 꺼낼 수 없다는 것

머릿속으로 자라는 뿔은 뽑히지 않는다는 것

울음은 허락되지 않는다는 것, 그러나 지금은 정오

돌멩이가 제 그림자에 뼈를 만드는 시간
병든 개가 턱뼈를 덜그럭거리며 운동장을 뛰는 시간

유리창에 모여든 아이들의 치아에서 간혹

새까만 침묵이 굴러 떨어지기도 하는 시간 축복의 시간



지옥에서 온 겨울


..................

혈액이 딸기잼처럼 뻑뻑했다

심장이 가슴에도 팔에도 머리에도 있었다

누군가의 절망은 누군가에게는 쇼라는 것

나는 실패 전문이라는 것

..................



개미 시인의 시집은 이런 분위기다. 시들은 한결같다. 그래서 좋기도 하고 섬뜩할 때도 있다. 묘한 발랄함과 해맑은 리듬이 불행을 새롭게 환기시킨다. 추상적이지 않은 구체적인 불운은 빛처럼 밝게 어둠을 뚫는다. 그렇다고 어둠이 사라지는 건 아니지만, 나를 포함한 세상의 불운을 차분하게 응시하고 있다는 느낌만으로도 구구절절한 슬픔보다는 낫다.

개미 시인이 개미처럼 부지런하게 지은 다른 시집도 보고 싶다. 나도 개미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할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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