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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이스 Jul 30. 2019

아직 끝나지 않은 사람

책 <휴전> Mario Benedetti, 창비

  라틴아메리카가 존경하고 우루과이가 사랑한 작가, 마리오 베네데띠(Mario Benedetti)의 소설 『휴전』은 작년에 읽은 일본 소설 『끝난 사람』과 비슷하면서도 매우 다르다.


  두 작품 다 은퇴를 한, 혹은 앞둔 남자의 내면을 세밀하게 보여준다. 『끝난 사람』의 다시로 소스케는 정년퇴직을  '생전에 치르는 장례식'이라 여기며 자괴감에 빠진 63세 남자다. 그는 이대로 끝날 수 없다며, 안타까울 정도로 재기를 위해 몸부림친다. 『휴전』의 마르띤 산또메는 은퇴를 6개월 앞둔 49세 우루과이 남자다. 그는 몇 년 더 일할 기회를 타진하는 회사의 제안을 망설임 없이 거절하고 은퇴를 서두르는 다소 무기력한 남자다. 시대와 공간이 달라서인지  '은퇴'라는 생의 과정을 겪는 두 남자의 마인드와 태도는 좀 다르다.   


  일기 형식으로 된 『휴전』의 서사는 1957년 2월 11일부터 1958년 2월 28일까지 1년 남짓 전개된다. 이 시기 우루과이는 사회, 정치적 개혁이 강화되고 산업 발전과 국가 개입을 토대로 한 경제 성장이 모색되던 시기였다고 한다. 이러한 정책이 가져온 가장 큰 결과는 공무원과 연금생활자의 폭발적 증가와 관료주의의 강화였다.


  사실 남미도 생소한데, 그중 한 나라인 우루과이는 내 생전에 가볼 일이 있을까 싶을 만큼 아득한 나라다. 가뜩이나 그 나라에 대한 역사적 지리적 지식이 없는데, 소설의 배경은 현재가 아닌 1950년대다. 지금의 우루과이와는 또 다른 시간 속에 펼쳐진 50이 낼모레인 남자의 삶은, 처음엔 낯설었지만 차츰 익숙해지며 공감을 자아낸다.


  일기를 쓰는 주인공 마르띤 산또메는 20대 자녀를 둔 가장이다. 아내 이사벨은 22년 전, 셋째 아이를 낳다 죽었다. 그는 큰아들 에스떼반과는 겉돌고, 딸 블랑까와는 그나마 일상적인 대화를 한다. 내심 귀여워하던 막내아들 하이메가 동성애자라고 커밍아웃하자 몹시 낙담한다.

  무역회사에서 경리팀장으로 일하며 은퇴를 손꼽아 기다리던 그에게 어느 날 운명 같은 사랑이 찾아온다. 딸뻘인 신입사원 라우라 아베야네다는 다정하고 사려 깊은 여성이다. 산또메는 그녀와 은밀한 교감을 나누다가 신중하게 고백한다. 급기야 아파트를 얻어 사람들 눈을 피해 어린 연인과 사랑을 나누며 행복한 나날을 이어간다.


작가 마리오 베네데띠


  마흔아홉에 스스로를 저물어가는 인생이라고 규정한 산또메는 어린 시절 친구를 만나도 시큰둥하다. 자식들 눈치를 보고, 회사 직원들과는 몇십 년을 알고 지내도 결코 친구가 될 수 없다고 고백한다. 재혼도 안 하고, 가끔 아무 여자와 눈이 맞아 원나잇을 하지만 두 번 이상 만나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킨다.


  산또메가 사는 우루과이 수도 몬떼비오엔 혁명 기념일로 명명된 거리가 많다. 이 나라의 머지않은 과거엔 많은 일이 있었고, 세상이 몇 번 뒤집히는 동안 사람들은 국가와 행정을 불신하며 냉소적이 된듯하다.


  곳곳에 묘사된 당시 우루과이의 정황은 사전 지식이 없는 나로서는 매우 생소하고 불합리와 부당함이 만연한 곳으로 보인다. 언론은 각각 정당을 대변하는 기관지처럼 변질되었고, 청년들은 편법으로 눈을 돌리며 살 길을 찾는다. 많은 사람들이 정당과의 연줄을 통해 국가기관에 일자리를 얻고, 뇌물을 제공하지 않고 공적인 일을 처리하기란 불가능하다.


  이런 고질적인 관료주의는 개인의 삶에 막대한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 산또메가 일하는 회사의 불합리한 관행이나, 그의 큰 아들 에스떼반이 낙하산으로 공무원이 되는 것은 이 곳에서 특이한 일이 아닌 듯싶다. 거의 30년 동안 한 회사에서 일한 산또메가 은퇴를 앞둔 나날을 지리멸렬하게 보내며 냉소적인 염세주의자로 사는 게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그래도 산또메가 아베야네다와 몰래 사랑을 나누며 사는 몬떼비오는 시에스타(*지중해 연안 및 라틴아메리카 국가의 낮잠 시간)가 있는 나라 특유의 나른함 속에서도 라틴아메리카의 열정이 간간이 느껴지기도 한다.


  사실, 그 당시 라틴아메리카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는 내가 우루과이 중산층 도시 노동자의 내밀한 삶을 이해하는 덴 한계가 있다. 인물들 못지않게 몬떼비오라는 도시의 디테일한 묘사를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는 건 알겠는데, 그게 인물들과 사건과 결합해 어떤 화학작용을 일으키는지는 막연하게 짐작할 뿐 완벽하게 파악하긴 힘들었다. 결국 난 이 소설의 배경인 도시는 한편에 놔두고, 주인공의 감정에 이입해 그의 사랑과 운명에 부대끼며 사건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가 도시에서 연인과 만나고 거닐다 헤어지는 거리, 은밀한 아파트, 회사 사무실은 그저 사건의 배경 정도로만 받아들였다.   


  메마르지만 묘한 긴장감을 지닌 도시 몬떼비오는 염세적 운명론자인 중년 남자와 매우 닮았다. 산또메에게 찾아온 기적 같은 사랑은, 그가 자신의 거친 운명과 잠시 협상한 짧은 '휴전'에 지나지 않았다는 게 드러난다.  정체되어 있고 무기력한 한 남자의 생에 잠시 숨 고르기 한 시간은, 장난처럼 젊은 연인의 죽음으로 강렬하게 끝나버린다. 남은 산또메가 불쌍한지 죽은 아베야네다가 더 불쌍한지 모르겠다. 둘 다 짧고 달콤한 휴전을 맛본 후 운명에 버림받았다는 생각이 들어 안타까울 뿐이다.    


다시 한번 입술을 움직여 “죽었어”라고 말하는 순간, 내게 남은 한 줌밖에 안 되는 역겨운 고독을 보았다. 내가 가진 이기심을 총동원하여 나 자신을, 이제 고뇌에 찬 누더기가 돼버린 나 자신을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그녀에 대해 생각하는 관대한 방식, 그녀를 상상하는 가장 완전한 방식이었다. 9월 23일 오후 3시까지는 내 안에 나 자신보다 아베야네다를 훨씬 더 많이 가졌었다. 그녀는 내 안으로 들어와 나 자신이 되기 시작했다. 바다와 지나치게 섞여 결국 바다처럼 짭짤해지고 마는 강물처럼.


  일기라는 형식 때문인지, 나이 지긋한 남자의 내면은 더할 수 없이 진솔하고 은근히 뜨겁다. 그가 죽은 아내와 애인을 묘사하고 사유하는 부분은 문장 자체가 직설적이면서도 아름답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두 번의 크나큰 이별은 나 같은 생뚱맞은 독자의 마음을 후벼 파기도 한다. 정말 읽다가 오래간만에 뒤통수 맞은 느낌이다. 이 급작스런 전개는 산또메에겐 안됐지만, 읽는 입장에선 기분 나쁘지 않은 얼얼함을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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