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로이스 Aug 14. 2018

해피엔딩이 능사는 아니다!

영화 <미워하고 사랑하고 Hateship Loveship> (2013)

  누군가를 미워하다 사랑하게 된다면, 분명 해피엔딩일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가 그리 해피해 보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잠재되어 있던 나의 냉소가 불시에 삐져나와서 그런 건 아닌 것 같고, 해피엔딩 치고는 차분하고 현실적인 결말이 달달하기보다는 저만하길 다행이다 싶어서 그런 것일까.


외로운 여자 조해너


  어릴 때부터 간병일을 해온 조해너(크리스틴 위그)는 인생의 행복과 기쁨을 모른 채 무미건조하게 살아온 여자다. 새로 일하러 간 집에서 외할아버지와 사는 십 대 여자 아이 사비타와 그녀의 아버지 켄(가이 피어스)을 만난다. 켄은 사고로 아내를 죽인 전력 때문에 감옥에 다녀와 딸아이와 떨어져 산다. 마약중독으로 장인의 불신까지 받는 그는 시카고로 떠나며 조해너에게 딸을 부탁한다. 얼마 후, 켄의 편지를 받은 조해너는 예의상 답장을 써주는데, 사비타와 그녀의 친구는 어리숙해 보이는 조해너에게 켄인 척하며 계속 이메일을 보낸다.  


사비타와 그녀의 친구


  조해너의 건조한 일상은 켄의 메일로 변한다. 그의 관심과 칭찬에 설렘을 느낀 조해너를 보며, 사비타와 친구는 낄낄거리며 편지의 수위를 높인다. 결국 조해너는 켄과 결혼하기 위해 드레스까지 사들고 시카고행 버스에 올라탄다. 도착해 보니 켄은 마약에 절어 몸져누워있다. 기대했던 상황은 아니지만 조해너는 그를 정성껏 돌보고, 정신 차린 켄은 그녀에게 자신은 이메일을 보낸 적이 없다고 한다. 여기까진 좀 황당하긴 해도 경솔한 오해와 실수가 빚은 해프닝이라 할 수 있는데, 그다음 상황은 예상 밖으로 전개된다. 메일이 아이들의 장난으로 밝혀졌는데도 조해너는 켄을 떠나지 않는다. 그를 사랑해서 그런 것 같진 않다. 만나서 데이트를 한 것도 아니고 메일 몇 번 주고받은 걸로 (결혼까지 결심할 정도로 어처구니없긴 하지만) 그를 사랑할 수 있을까. 아니, 사랑했다 해도 메일은 가짜로 밝혀졌고, 켄은 그녀의 돈을 훔치기까지 했다. 심지어 켄의 껄렁한 여자 친구가 와서 노골적으로 무시하는데도 그녀는 꿋꿋이 버티며 그 집을 떠나지 않는다. 오히려 지저분한 창고나 다름없는 그곳을 쓸고 닦으며 마약에 중독된 켄을 위해 요리하고 세탁까지 한다.


조해너와 켄


  지독하게 외로우면 그럴 수 있을까. 아니면 오해일 망정 자신이 느꼈던 감정을 떨칠 수 없었던 걸까. 그것도 아니면 그녀는 마더 테레사의 정신을 계승한 성녀라도 되나. 상대는 아니라는 데도, 그만 돌아가라는 데도 조해너는 하루하루 버티며 그의 곁을 지킨다. 그녀의 성의에 켄도 차츰 반응한다. 애정이 생겼다기보다, 황당한 오해로 벌어진 상황일 망정 그녀가 생활에 적절한 도움이 되고 생기를 주기 때문이다. 그들은 결국 결혼한다. 사비타와의 사소한 갈등은 용서와 화해로 적절하게 넘긴다.


  결과적으로 기적 같은 결혼을 이끌어낸 이 못된 장난을 주도한 사비타의 친구는 뻔뻔한 태도로 졸업식장에서 조해너와 마주친다. (장난친 것에 대한 사과를 바라듯) 빤히 보는 조해너에게 그녀는 원하는 게 뭐냐고 묻는다. 조해너는 이미 다 가졌다고 말한다.  


가족이 된 세 사람


  엘리스 먼로의 단편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한 여자의 삶을 조용하지만 격렬하게 따라간다. 그녀의 태도와 마인드는 솔직히 내 이해 밖이지만, 생을 긍정하고 좌절하지 않은 모습에선 뭔가 달관한 듯한 초자아가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녀에게 묻고 싶다. 지금 행복하냐고. 이게 정말 원하던 거냐고. 아이들 장난으로 엮인 남자에게 쉽게 반하고, 혼자 한 사랑을 떨치지 못해 얼떨결에 결혼하고 아이까지 낳아서 사는 현실이 좋냐고. 아픈 노인을 돌보는 것보다 설렘을 느낀 남자와 사는 게 낫겠지 싶으면서도 이 기적 같은 행복이 왠지 석연치 않다. 그녀가 몸소 보여준 미움에 대한 용서, 사랑과 화해는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녀는 원하는 것은 이미 다 가졌다고 말하지만, 그녀의 욕심 없는 마음이 좀 짠하게 느껴진다. 어떻게 보면 나보다 가진 게 많은 그녀에게 왜 이런 마음이 드는지 모르겠다.


  만약 나에게 이런 장난 같은 해프닝이 벌어지고 그 대가로 기적 같은 해피엔딩을 보장받을 수 있다면, 난 정중히 거절할 것이다. 결과가 중요하고 해피엔딩은 모든 걸 용서할 힘이 될지 모르겠지만, 인생을 결정짓는 사건에서 결과보다 과정의 섬세함을 (고달프더라도) 만끽하고 싶기 때문이다. 나도 어쩌지 못한 타인의 개입과 변수가 내 삶을 변화시키는 걸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싶지만, 그렇다 해도 파렴치한 장난과 악의는 묵과할 수 없다. 비열한 짓에 대한 책임은 반드시 묻고 할 수만 있다면 응징할 것이다. 내가 너그럽지 못하고 냉소적인가? 그럴지도...

매거진의 이전글 러브리스, 돌아오지 않는 아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