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달리기

Ep 24. Running, Again

by 롤라

처음 달리기라는 것을 내 의지로 시도해 봤던 건 무려 6년 전- 울릉에서였다. 울릉도에서 열린 영화제에 스태프로 참여하러 갔다가, 우연히 달리기에 관한 영화를 보고 난 뒤 홀린 것처럼 달리기를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발목을 다치게 되면서 달리기와의 인연은 싱겁게 끝이 났다.


달리기와의 두 번째 만남은 일을 시작하고 나서였다. 함께 일했던 동료분이 제주의 유명한 러닝 크루의 리더였고, 덕분에 제주에서 열리는 4.3 달리기, 8.15 달리기 등 의미 있는 러닝 행사에 참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때뿐, 일상에서도 달리기를 꾸준히 할 만큼 재미를 붙이지는 못했다.


책을 읽다 보면 참 신기하게도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적인 습관은 항상 달리기였다. 그리고 내가 아는 멋진 사람들도 대부분 달리기를 했다. 도대체 이 고통스러운 걸 왜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다들 이렇게 이야기하는 데는 왠지 이유가 있을 것 같았다.


퇴사 후 몸과 마음의 여유를 찾고 나니 달리기에 도전해 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하지만 이 의지가 오래가지 않을 것을 알기에, 리추얼클럽(4년째 운영 중인 습관형성 커뮤니티)에 운동리추얼 챌린지를 새롭게 개설해 포기할 수 없는 환경을 만들었다. 6년 간의 길고 긴 밀당 끝에, 드디어 본격적으로 달리기를 시작했다.


https%3A%2F%2Fsubstack-post-media.s3.amazonaws.com%2Fpublic%2Fimages%2F7afd08e4-4263-4153-9c4e-ea5da503436c_4000x2252.png Lisboa, Portugal

돌이켜보면 한국에서 슬슬 달리기에 대한 열정이 식어갈 때쯤 해외에 나와 다시 열정이 불타오를 수 있었던 것 같다. 덴마크에 오기 전에는 부모님과 스페인, 포르투갈 여행을 했는데, 아침마다 숙소를 나와 세비야의 좁은 골목길을, 리스본의 언덕을 달리며 새로운 풍경을 맞이하는 시간이 정말 좋았다.


덴마크에 와서도 새로운 동네 탐색 달리기는 계속됐다. 혼자였다면 분명 어느 정도 하다 그만두었을 텐데, 리추얼클럽이 내가 운영하는 모임이다 보니 절대 빠질 수가 없었다. 너무 졸려서 더 자고 싶은 날에도 같이 운동하는 멤버들을 떠올리며 몸을 일으켜 학교 주변을 달렸다. 아침의 선선한 바람을 느끼며 고요하고 아름다운 주택가와 바닷가를 달리다 보면, ‘아- 나오길 잘했다’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https%3A%2F%2Fsubstack-post-media.s3.amazonaws.com%2Fpublic%2Fimages%2Fbfbeb269-7bc7-47d3-96bf-699391f958c0_4000x2252.png Helsingør, Denmark

회사를 나오고 소속이 없는 채로 반년 정도가 지나니 불안이 찾아오는 순간들이 있었다. 후회하지 않을 값진 6개월을 보냈다고 생각하면서도, 이러다 한국에 돌아가 취업도 못 하는 건 아닌지- 다른 사람들은 모두 묵묵히, 현명하게 커리어를 쌓아나가는데 나만 제자리에서 맴돌고 있는 건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 종종 조급함이 밀려오곤 했다.


그럴 때마다 신발 끈을 묶고 밖으로 나가 달렸다. 사람들은 달리다 보면 잡생각이 사라진다던데 나는 그 반대였다. 나는 뭘 하고 싶은가, 무엇을 잘하는 사람인가, 어떤 때 행복한가.. 질문과 고민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런데 정말 신기하게도 달리기를 마칠 때쯤이면 미래에 대한 걱정이 기대감으로 바뀌어 있었다. 내 달리기 실력도 지난주보다 이번 주, 어제보다 오늘 조금 더 나아졌으니 뭐든 일단 노력하면 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자신감이 샘솟았다. 달리기 전에는 모든 게 막막하고 답답하게 느껴지다가도, 달리고 나면 왠지 다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근거 없는 확신이 들었다.


언젠가 달리기가 나를 살릴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어떤 위기가 와도 나를 단단히 지탱해 줄 무언가를 찾아낸 느낌이다. 누군가 “퇴사하니 가장 좋은 점이 뭐예요?”라고 물으면 망설임 없이 달리기를 시작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지금이 내 인생의 오르막인지 내리막인지는 알 수 없지만 오르막도 내리막도 잘 달릴 수 있어야 진정한 러너가 될 수 있으니- 그저 묵묵히 오늘의 달리기가 가져다 줄 작은 행복들을 즐기며 한 발 한 발 나아가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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