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기를 내는 일

Ep 25. The Act of Speaking Up

by 롤라

한창 과외를 많이 하던 대학생 시절, 영화 '82년생 김지영'을 보며 어릴 적 보았던 엄마의 삶이 계속 떠올라 너무 펑펑 운 나머지 눈이 퉁퉁 부은 채로 과외를 하러 갔던 날이 있다. 남고에 다니는 고등학생 과외돌이 2명이 왜 울었는지 물어서 영화 이야기를 해줬더니 한 아이가 "우리 담임쌤이 그런 쓰레기 같은 영화 보지 말라고 했는데.."라며 혼란스러워했다. 그때의 당황스러움을 아직도 기억한다.


하루는 독서 모임에서 성평등 관련 책을 읽고 토론하는 시간이었는데, 한 분을 제외한 거의 모든 남성 분들이 “성차별은 이미 없어진 지 오래고 요즘 여성들은 감사할 줄 모른다”라는 식의 주장을 강력히 펼쳤다. 눈물이 나올 것 같은 걸 억누르며 열심히 항변했지만, 내 목소리는 그들에게 그저 '예민한 여성'의 불평으로만 들렸던 것 같다. 이런 경험을 몇 번 하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이 주제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을 피하게 됐던 것 같다.


그래서 덴마크 IPC(International People’s College)에서의 Gender equality and diversity 수업이 더욱 낯설었다. 수업은 우리가 알고 있는 성별에 대한 고정관념을 나열하면서 시작했다. 남성은 강하고 이성적이고, 여성은 부드럽고 감성적이다. 남성은 파란색을 좋아하고, 여성은 분홍색을 좋아한다. 남성은 머리가 짧고 바지를 입으며 여성은 머리가 길고 치마를 입는다. 세계 각국에서 온 학생들이 손을 들며 이야기를 쏟아냈는데, 한국인들이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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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의 역사도 훑어보았다. 덴마크의 1세대 페미니즘 운동은 여성과 하인들에게 참정권이 주어졌다는 191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60년대 말 성적 해방, 자유, 피임, 동일 임금을 주제로 시작된 덴마크의 '레드 스타킹(Rødstrømpebevægelsen)' 운동은 2세대 페미니즘을 대표한다. 그리고 1990년대부터 현재까지 이어지는 3세대는 성적 자기 결정권, LGBTQ+ 권리 등 더 다양하고 복합적인 이슈들을 다룬다.


한국의 경우 일제강점기와 해방 직후 여성 교육권과 참정권을 위한 투쟁이 시작되었고 1980년대부터 여성 노동권 문제에 대한 목소리가 등장했다. 하지만 실제로 성폭력, 성차별 문제 등이 수면 위로 올라오고 페미니즘이 하나의 담론으로서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대화의 시작이 늦어서인지, 한국은 아직 페미니즘에 대한 사회적 수용도가 현저히 낮다고 느낀다.


선생님께서는 덴마크가 이런 면에서는 진보적인 제도들을 많이 도입했다고 설명했다. 강제 부성휴가, 동의 기반 성범죄 입법, 최대 18주까지의 낙태 합법화까지. 하지만 그럼에도 덴마크 역시 완전히 '평등'하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했다. 2022년 선거에서 처음으로 여성 국회의원 비율이 40%를 넘었지만, 시장급 지자체장 중 여성은 여전히 22%에 불과하고 여성 정치인에 대한 성희롱도 심각한 수준이라는 자료를 보여주셨다. 진보적인 제도가 있어도 현실은 여전히 따라가지 못하는 부분들이 많다는 것이다.


페미니즘에 대해 터놓고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이어졌다. 각자의 나라 상황을 공유하고, 경험을 나눴다. 한국에서라면 상상하기 어려운 풍경이었다.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만 꺼내도 날이 서는 분위기가 아니라, 당연히 이야기해야 할 주제로 다뤄지는 공간. 이런 건강한 토론이 우리나라에서는 언제쯤 가능할까를 생각하다 보니 조금 슬퍼졌다.


덴마크 의회의 한쪽 벽에는 최근 100년간 덴마크 민주주의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여성 정치인들의 초상화가 걸려있고, 반대편에는 남성들로 가득 찬 옛날 의회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의회에 방문했을 때 이 두 그림을 양쪽에서 번갈아 보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런 구도로 그림을 배치한 이 나라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놀랐고, 우리나라에는 어떤 변화가 필요할까- 생각하며 고민이 많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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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포기하지 않고 용기를 내어 이야기를 꺼내는 것, 대화할 수 있는 장을 많이 만드는 것, 그럴 수 있도록 내 영향력을 키워가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어렵더라도 계속해서 대화하고, 불편하더라도 서로 다른 생각을 부딪쳐보는 과정들이 쌓여 변화를 만들어갈 수 있을 거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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