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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정을 잊어버리셨나요?
by
이김정
Dec 16. 2024
그녀에겐 마음이 중요했을 거라 믿습니다
꽤 오래전이다.
아직 미혼 시절, 함께 신나게 놀러다니던 여사친들이 있었다.
휴일이면, 홍대도 가고, 인사동이며 삼청동도 가고, 점심으로 수제비도 먹고, 이쁜 카페도 가곤 했다.
잔디밭에 피크닉 돗자리를 깔고 가을 재즈 공연도 보았고, 아트영화며 뮤지컬도 보러 가고, 시립미술관 전시회도 가고, 그랬다.
리즈시절이었다. 태평성대였다.
내가 결혼한 이후로는. 음. 쩜쩜쩜.
소식이 끊겼다. 백악관과 크렘린궁의 핫라인처럼.
대충 그렇다고 알면 된다.
뭐, 다시 생각해보니 그애들과 그렇게 재미는 없었던 것 같네요.
(이 글을 마누라가 가끔 뒤적뒤적 볼 때가 있습니다, 이 양반 대체 뭔 글을 쓰고 있는 거야, 검사좀... 하고. 그래서 하는 말은 아닙니다만.)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
그때 일이다.
한번은 그애들과 뮤지컬을 보기로 했다. 공연장 부속의 스파게티 전문점에서 만나기로 하고.
헌데 예정된 약속시간보다 한참 먼저 도착하는 바람에 나 먼저 자리를 잡고 기다리게 되었다.
그렇다보니 혼자 4인 테이블을 차지하게 된 거다.
앉아있자니 뻘줌해졌다.
당연하다. 뮤지컬을 앞두고 삼십대 사내 혼자 2인 테이블도 아니고, 4인 테이블에 앉아있다고 생각해보면 된다.
커플이며, 여자들끼리 있는 테이블은 밝은 조명이 비추고 있는데.
내 쪽만 이상하리만치 설득력도 없고, 외지고, 이끼가 끼고, 어두침침한 것만 같다.
그래서 나는 메뉴판도 세심히 살펴보고(메뉴판 제조회사까지), 웨이터가 따라준 물잔도 빈티지 와인처럼 폼나게 들이키고, 벽에 걸린 명화 모조품을 “음,” 하고 턱을 쓰다듬으며,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온 것처럼 입장료를 생각하며 감상한다.
그래도 남아도는 시간을 주머니에도 넣고, 테이블보 아래에도 넣고, 신발 깔창 밑에도 넣고, 여전히 남는 시간은 또 어디다 넣을까 하던 참이다.
그때 대각선 너머로 남녀 커플이 우연히 내 눈에 들어왔다.
블랙 니트에 금장 단추가 달린 트위드자켓으로 멋을 부린 여자와 돈을 들인 세련된 캐주얼 정장을 한 남자였다.
나이는 삼십대 초반.
한창 좋을 때다.
한창 좋을 둘을 본 순간 난 직감이 들었다.
저 커플은 썸 단계에서 본격적으로 사귀어볼까 하는 단계로 막 넘어가고 있다 라고.
그들 주위의 공기로도 난 그걸 알 수 있다.
아니나다를까, 남자가 여자에게 선물 상자를 쓰윽 꺼냈다.
선물 공세다. 맞다.
고전적 수법이다.
선물은.
펄감이 있는 크라프지에 핸드드로잉 패턴을 넣은 고급스런 포장지로 감싸고 있다.
거기에 핑크빛 리본으로 나비 모양의 매듭을 살짝 묶기까지.
포장에도 얼마나 신경을 썼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만큼 사귀자는 시그널이라면 시그널이겠지.
여자는 감동의 눈빛이다.
“어쩜 이런 걸.” 하고.
남자는 테이블 위의 선물을 여자쪽으로 오센티미터 밀며 말한다.
“포장을 한번 뜯어봐.”
“이거 나한테 주는 거야?”
여기에 그녀말고는 없다. 대체 누구한테 준단 말인가. 웨이터한테 줄까.
“어서.”
“이게 뭘까?” 여자는 갸우뚱한다.
궁금할 것이다. 이제 여자는 투시력을 발휘할 것이다. 이게 뭔지.
사실 핸드폰만한 선물의 크기로 미뤄볼 때 무엇일지는 나같은 사람도 감이 딱 잡힌다.
에센스나 아이크림이겠지.
에스티로더나 랑콤 류 같은.
전체적인 분위기로 봐서 그렇다는 거다.
장소며, 두 남녀의 분위기며, 남자의 눈빛으로 볼 때, 그리고 당시 유행으로 볼 때도.
여자도 충분히 짐작이 된다는 표정이다.
나쁘지는 않네 하는.
어쨌든 둘 간엔 처음으로 주고받는 선물인 것 같다.
너무 과해도 그렇고, 그렇다고 너무 가벼워도 그렇지 않을까.
첫선물인데.
여자가 가느다란 집게와 엄지손가락으로 핑크빛 나비 리본을 슬며시 풀었다.
그리고 겉포장을 조심히 벗긴다.
바라보는 남자의 눈빛이 반짝반짝 한다.
기대하시라 개봉박두 하는.
근데 아무 인쇄도 돼있지않은 마분지 상자가 나왔다.
어째서.
여자도 살짝 당황한다.
당연히 에스티로더나 랑콤의 브랜드 상자가 나올줄 알았던 거다.
나도.
혹시 직구로 샀는데, 알맹이만 받았나.
아니면 상자가 배송중에 오염이 됐거나
파
손된 건지도 모른다.
상자가 무슨 대수겠는가.
겉치레일뿐.
맞다.
안에 든 것이 중요하지.
해서 개의치않고 상자를 열었다.
뭐가 나왔을까.
갈색병?
블랙 스포이드병?
이왕이면 블랙 스포이드병이 낫지않을까 하는데.
근데 아니었다.
여자는 다람쥐가 겨울식량으로 끌어안은 알밤만큼 눈이 커졌다. 동공이 흔들렸다. 고로 놀랬다.
나도.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 그 안에서 나왔던 것이다.
뭐였냐 하면.
마트료시카였다.
러시아 전통인형 마트료시카.
이게 왜 여기서 나오지?
여자도 그런 표정이다.
이게 왜 여기서 나와? 하는.
어쨌든.
여자는 인내력을 갖고, 아무 말도 꺼내지 않고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이게 맞는지 하고.
헌데 남자쪽은 제법 진지했다.
오히려 그는 두손으로 비트는 흉내를 냈다.
어서 열어보라고.
열라고?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사실 마트료시카 라는 인형은 목각이지만 열 수 있는 구조다.
인형의 몸을 양손으로 비틀면 두 개로 분리가 된다.
그리고 열려진 안에는 똑같은 인형이 숨겨져있다.
증조할머니 안에 할머니가. 할머니 안에 엄마가, 하는 식이다.
아하. 알았다.
인형 안에 뭔가를 숨겨놓은 것이구나. 서프라이즈로.
아이디어가 기가 막히네.
여자도 나와 같은 생각이다.
“후후. 진작 말할 것이지.” 하는 표정이다.
이쯤되면 에센스나 아이크림은 아니다.
루즈나 향수일 가능성이 크다.
더 작은 인형에 들어갈 수 있는 크기를 고려한 추리다.
헌데 여기에도 문제가 없는 건 아니다.
여자 취향을 알고서 고른 건가 하는 점이다.
뭐. 남의 일이니 내가 걱정할 문제는 아니다.
그 정도쯤 서로 알고 있을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여자가 미리 힌트를 주었던지.
여자는 다시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마트료시카 인형을 비틀었다.
그리고 열었다.
“딸깍.”
그렇지.
그러자 인형 안에는.
과연.
무엇이 들어있냐 하면.
마트료시카 인형이다.
왜?
여자가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남자가 괜찮으니, 어서 하고 다시 비트는 손짓을 했다.
아하. 한번 더 열어보라는 거네.
다음은 세 번째 인형이다, 그렇다면.
아, 맞다. 그거였네.
자고로 삼이면 복삼자 아닌가. 따라서 세 번째 인형에 뭔가를 숨겼군. 복을 불러오니까.
은근 남자가 샤머니즘인가보다.
세심하기는.
여자도 영민하게 그 뜻을 알아들었다.
끄덕끄덕.
샤머니즘이면 어때. 선물만 받으면 되지.
나도 이 친구 참 신경 써서 재밌는 이벤트를 준비했다고 생각했다.
여자의 사랑을 듬뿍 받겠다 싶다.
여자는 두 번째 마트료시카 인형을 열고, 세 번째 인형을 꺼냈다.
다시 문제의 세 번째 마트료시카 인형을 알아서 비틀었다.
그리고 열었다.
“딸깍.”
세 번째 인형 안에 들어있는 선물은 과연 무엇일까.
루즈일까 향수일까.
과연 어떤 선물이 있을까.
과연.
두구, 두구, 두구.
또.
마트료시카 인형이다.
아니. 이게 무슨.
여자는 이쯤에서 이게 맞나 하는 표정이다.
세 번째 인형 정도면 나와야하지 않나. 인간적으로.
그런데 남자가 아무렇지않게 웃었다.
하. 하. 하.
눈썹을 치켜올리며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애니웨이.
투비 콘티뉴.
어? 뭐야? 계속하라고.
세 번째가 아니었나.
세 번째가 아니라면 말이다.
그럼 더 있다는 건데.
하기는 마트료시카 인형은 대개 7개에서 많게는 10개로 구성된 게 상식이다.
3개로 끝날 게 아닌 건 맞다.
괜히 마트료시카이겠는가.
끝까지 열어야 선물과 만날 수 있는 것이 마트료시카 식 선물 주고받기일 수도 있고.
어쨌든 주는 사람 마음이니 어떻게 하겠는가.
역시나 그의 얼굴을 보니, 마지막에 가면 하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다.
그런가
그렇다면.
잠시 여기서 추리해볼 수 있다.
저 안에 숨겨진 선물은 루즈나 향수가 아니라는 거다.
목걸이나 반지가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왜냐면 앞으로 나올 인형의 크기가 매우 작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여자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런 생각이 들자 살짝 부담스럽기는 하다.
처음으로 받는 선물인데, 그런 비싼 걸 받아도 될까 하는.
단위가 십만 단위에서 갑자기 백만 단위로 가는 건데. 아니면 천만 단위.
헉.
이래도 되나.
아직 애인 사이도 아닌데.
하지만 이내 생각이 바뀌었다.
선물이 무엇인지 확인하고 그때 가서 생각하자는 표정이다.
일단 받고 보는 거지 하고.
남자에게 마음이 없는 것도 아니니까.
선물인데 뭐.
여자는 안에 들어있을 선물을 머릿속에 그리면서 좀더 진지한 표정을 한다.
심호흡을 하고 마트료시카 인형을 응시했다.
이 운명의 사랑을 받아들일 것인가 말 것인가 하고 잠시 생각해본다.
그래, 그때 가서 생각하자.
일단 저 인형들이나 열어보자.
그런 후 손을 움직여 마트료시카 인형을 열기 시작했다.
네 번째 마트료시카 인형 안에 다섯 번째 마트료시카 인형이 나왔다.
다섯 번째 마트료시카 인형 안에 여섯 번째 마트료시카 인형이 나왔고.
여섯 번째 안에 일곱 번째, 일곱 번째 안에 여덟 번째, 여덟 번째 안에 아홉 번째.
그렇게 하여 이제 마지막이 되었다.
저 아홉 번째 마트료시카 인형을 열면 원래는 열 번째 마트료시카 인형이 나와야겠지만.
하지만 마지막 인형대신...
남자도 만면에 웃음을 지었다.
이제 다 왔다는 표정이다.
목걸이일까, 반지일까.
나도 이런 생각이 든다.
나중에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면 어떤 걸 선물할지 벤치마킹해야겠다고.
마트료시카로 선물을 숨기는 방법도 꽤 괜찮을 것 같고 말이다.
숨을 가다듬고 여자가 아홉 번째 마트료시카 인형을 비틀었다.
운명의 비틀기처럼.
그리고 열었다.
마침내.
“딸깍.”
그녀의 인생을 가르는 운명의 소리가 온 실내에 진동한다.
그 안에 숨겨진 선물은 과연 무엇일까.
주위는 숨을 죽이고 바라보고 있다.
나도. 어느새 웨이터들도.
스파게티 전문점의 모든 것들도. 스파게티 면도, 후라이팬도, 피클과 마늘빵도 숨을 죽이고 바라보고 있다.
과연 무엇일까 하고.
나는 좀더 목을 뺐다.
목걸이냐, 반지냐. 의외로 귀걸이일 수도 있고.
뭐지.
작아서......잘 안보이는데...
눈에 힘을 주고 바라보았다.
거기엔.
강보에 쌓인 아기 마트료시카 인형이다.
반지는?
목걸이는?
어디 있지?
왜?
어째서?
이게 무슨 일이지?
아니면 아직 안나왔나.
아기 마트료시카 인형을 더 비틀어봐야 하나 하는.
여자의 표정이다.
남자가 그제서야 입을 열었다.
“지난 달에 나 러시아 출장 갔다왔잖아. 그때 사온 거야.
너 생각이 나지 뭐야
. 이런 거 처음 보지. 이야. 인형 열 개가 안에 숨겨져있네. 거참 신기하지 않아.”
안신기한대.
이거 모르는 사람 있었나.
난 러시아 전통춤도 안다. 코사크 테트리스 댄스도 알고, 깔린까 댄스도 안다.
그 뒤로 우크라이나와 전쟁을 벌이는 나쁜 놈들인 것도 안다.
여자가 아무 대답도 못하고 입만 벌리고 있다.
“아, 부담스러운가 보네. 걱정마. 이거 얼마 안해. 모스크바 광장에서 사딸러 주고 산 거야. 선물은 마음이잖아. 근데 이걸 갖고 있으면 부자도 되고, 출산도 많이 한 대. 생일 축하해.”
게다가 생일이었다.
아니. 마음이 중요하긴 한데.
부자도 되고, 출산도 많이 하지만.
그렇지만.
그렇기는 한데.
어째서.
왜.
여자는 얼어버렸다.
나도 얼어버렸다.
그들을 지켜보던 웨이터들도 얼어버렸다.
아니 스파게티 전문점의 모든 것들, 스파게티 면이며, 후라이팬이며, 피클과 마늘빵도 모두 얼어버렸다.
이게 싫다면 선물은 마음이라는 걸 못알아주는 여자가 되는 거고, 이걸 좋아하면 마트료시카를 신기해하는 여자가 되는 것이다.
그런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마트료시카 10개의 인형들만이 미소를 머금은 채 테이블에 나열되어 있었다.
“이김정! 먼저 왔네!”
때마침 낯익은 목소리와 함께 여사친들이 입구에서 손을 흔들며 우르르 들어왔다.
그 뒤로 그 남녀 커플이 어떻게 됐는지는 알 길이 없다.
그렇지만 난 지금도 진짜 선물은 주차장에 파킹된 저 남자의 자동차 뒷좌석에 있을 거라 믿고 있다.
물론 마음이 중요한 건 맞지만.
그녀도 그렇게 생각했을 거라 믿지만.
(얼마후면 크리스마스네요. 혹시 선물도 주고받고 하실지도. 그럴 때 선물은 마음이죠.
참, 제 글은 교훈은 없습니다. 그냥 재미로 보십시오. 정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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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뭐 있나 즐겁게 살아라 마
17
여자에게 무례하면, 어떻게 되는지 한번 보십시오(전편)
18
여자에게 무례하면, 어떻게 되는지 한번 보십시오(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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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 29일 일요일 발행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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